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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호흡을 잊었다.
검게 물든 도진의 증표가 허공에 투영한 문장과 글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ZION」
그렇다. 도진이 가진 증표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대마법사 시온의 것이었다.
“이 미친 아줌마, 자기 걸 준 거였어?”
도진은 속에서 솟아오르는 경악을 그대로 뱉어 냈다.
이건 참고 뭐 하고 할 레벨이 아니었다.
툭 하고 던져 주기에 그냥 엘토마기아 증표(양산품)인 줄 알았더니!
자기 증표를 던져 주면 어쩌잔 말인가.
하지만 도진이 느끼는 경악과 어이없음은 다른 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비에고는 유령 보듯 도진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린 끝에 겨우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서, 설마… 탑주님이십니까?”
그가 필사적으로 뇌세포를 쥐어짜 도출해 낸 것은 ‘시온 그레이스가 변신해서 장난을 치는 상황’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비에도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비약이긴 했다.
하지만 더 말이 안 되는 다른 추측을 소거하다 보니 남은 게 겨우 이거 하나였다.
엘토마기아의 심장부에서 시온 그레이스를 사칭하는 미치광이가 있을 가능성보다는, 은거한 시온 그레이스가 변덕과 장난을 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나.
물론 이건 비에고의 생각이었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왜 당신네 탑주야! 이건 그냥 당신네 대장이 나한테 휙 던져 준 거라고!”
도진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오해였다.
“에, 엘토마기아의 주색위 르네 다시아가 탑주님을 뵙습니다! 제, 제 능력이 미천하여 미처 탑주님을 알아 뵙지 못한 무지와 그로 인해 저지른 무례를 부디……!”
숨도 못 쉬고 있다가 비에고가 ‘탑주’라는 말을 꺼내자 반 박자 느리게 무릎을 꿇고 발작하듯 사죄하는 르네.
시온 그레이스의 문장과 이름을 보자마자 이미 반쯤 정신줄이 잘린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는 물론 외부 자극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처럼 보였다.
“아니라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도진은 외롭게 진실을 외쳤다.
하지만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벌벌 떠는 르네는 물론이고,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 비에고도 도진의 말을-
【아하핫.】
혼돈이 가득한 공간에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를 매질로 삼아 퍼지는 소리가 아니라 마나를 진감하는 마법의 소리.
그렇기에 소리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물론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이 미친 마녀 아줌마가…….’
도진은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 놀리면 재밌습니까.”
허공을 향한 물음.
“글쎄. 생각보다는?”
이번에 돌아온 답은 보통의 소리였다.
도진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다.
소리는 벽에 걸린 그림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녕?”
그림 안의 남자가 도진을 향해 손을 흔들며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온 남자는 어느새 도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타, 탑주님을 뵙습니다!”
시온 그레이스를 몇 번 봐서 익숙한 도진과 달리 비에고와 르네는 실제로 시온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비에고는 확신했다. 이런 마법적 이적을 숨 쉬듯 남발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 전체를 뒤져도 몇 되지 않으리라.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세계의 마나의 중심이 된 듯 모든 마나의 흐름을 앗아가 버린 게 가장 큰 증거였다.
저분, 저분께서 바로 세계에서 가장 지고한 마탑 엘토마기아의 지존이시자 마법과 진리의 근원에 가장 근접한 필멸자. 시온 그레이스이시다.
“죄, 죄송합니다!”
르네도 혼신의 힘을 다해 겨우 한마디를 쥐어짜 냈다.
자신의 마나가 다른 존재에게 복종하는 듯한 감각에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비에고도 필사적으로 참고 있으나 같은 현상으로 인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정상이 아닌데.’
도진은 그런 둘을 살피다가 시온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두 사람한테 뭐 하고 있는 건가요?”
도진의 모습을 한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오히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건 너다. 나의 영향력이 너의 마나에 간섭하지 않게 배려를 하고 있지.”
즉, 대마법사가 숨만 쉬어도 일어나는 자연재해에 피해를 입지 않게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도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왕 하는 배려 저쪽도 좀 해 주시죠. 힘들어 보이는데.”
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입장에선 널 나쁘게 대한 자들인데?”
“따지고 보면 원칙을 지키려고 한 거니까요.”
오해 받은 입장에서 짜증은 났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지자면 저쪽에선 오해를 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누가 이딴 상황을 예상이나 하겠냐고.’
도진은 이 사태의 원흉에게 보내는 눈빛에 약간의 원망을 담았다.
그 시선에 픽 웃은 시온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마나 장악력을 전부 회수했다.
“허억……!”
“으음…….”
체내 마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건 몸이 편해진 것에 대한 안도일 뿐.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었다.
시온의 증표, 오간 대화, 두 사람의 태도 등 눈앞의 상황은 도진과 시온이 범상치 않은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
르네도 비에고도 속으로는 떳떳하지 못한 마음으로 도진을 압박했으니 내심 찔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야.”
도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시온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르네 앞에서 고양이가 되어 나타났다.
르네는 거의 발작을 하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앞의 고양이에게 대답했다.
“네, 넷!”
“규칙과 원칙을 지키려 한 것. 훌륭하다.”
“…가, 감사합니다.”
“다만.”
시온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르네와 비에고의 입이 사라졌다.
꼭 입 부분만 달걀귀신이 된 듯 깨끗하게 사라진 것.
깜짝 놀란 둘은 입가로 손을 가져가려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너희 둘이 비친 감정의 색채가 다소 거슬리더구나. 규칙과 원칙을 허울 삼아 스스로 표출하고픈 혐오를 포장하지 말거라. 너희 둘 모두 말이다.”
엘토마기아에서 시온은 단순한 탑의 주인이 아닌 신앙의 대상에 가까웠다.
그런 시온에게 이런 말을 들었으니, 비에고와 르네의 얼굴이 시체 빛깔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슬람 교도가 돼지고기 굽다가 알라한테 들키면 저런 얼굴이겠는데.’
저 정도면 짜증 나게 한 대가로는 충분하다.
잠시 지켜보던 도진은 한숨 섞인 투로 시온을 만류했다.
“그만하시죠.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이런 장난을 쳐서 이 사태를 만든 시온 님이 제일 잘못하셨습니다.”
자신들을 변호하는 도진의 소신발언에 비에고와 르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진은 불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말했다.
“이거나 정상적인 걸로 바꿔 주시죠.”
내민 것은 시온의 증표였다.
고양이 모습을 한 시온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정상이다.”
“아뇨. 이 사태가 이게 비정상적인 물건이란 증겁니다.”
“어차피 나는 마지막으로 꺼낸 게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 가지고만 있던 물건이다.”
고양이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방금 엘토마기아의 데이터베이스에 너를 등록했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지.”
이 마녀 아줌마, 오늘따라 이상하네. 말투도 뭔가 일부러 무게를 잡으려고는 하는데 툭툭 친근함이 묻어나오는 느낌이었다.
‘뭐지?’
그냥 심심한 대마법사의 변덕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
도진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제가 포기하죠.”
고양이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장난 다 치셨으면 그만 저 두 사람 입이나 돌려주세요.”
이왕이면 좀 돌아가 주시고. 할 일이 산더미인데 할 수가 없잖아요.
눈으로 말하는 도진에게 시온이 말했다.
“의외구나. 너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던 자들을 계속 신경을 써 주다니.”
“누구랑 달리 전 사회성이 있는 편이라서요.”
도진의 말을 들은 시온이 충격을 받은 듯 굳었다.
“…….”
대마법사를 상대로 너무 막 나갔나 싶어 눈치를 보는 도진.
근데.
[시온 그레이스의 호감도가 10포인트 상승하여 20이 되었습니다.]
호감도가 올랐다.
“……?”
영문을 알 수 없어 온몸으로 물음표를 띄우는 도진을 보며 시온은 조용히 독백했다.
“…묘하게 닮았구나.”
“예?”
하지만 그녀의 독백은 도진에게 닿지 않았다.
“시끄럽다. 너무 나와 있었더니 피곤하구나. 너와 놀아주는 것도 지겨우니, 이만 돌아가야겠다.”
“놀아주긴 뭘 놀아줬다는 겁니까! 사람 피곤하게만 해 놓고!”
대마법사고 나발이고 도저히 인정 못 할 망언에 결국 도진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온은 그 모습이 즐거운지 맑게 웃었다.
【역시 닮았어.】
시온이 사라지며 잔향처럼 남긴 말.
이 말 또한 도진에겐 닿지 않았다.
“…어이가 없네.”
도진 입장에선 말도 없이 휙 사라진 셈이라,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대마법사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릴 따름이었다.
‘뭐, 어찌 됐든 호감도는 올랐으니 이득은 이득이라고 봐야 하나.’
도진은 이제야 좀 일이 진도가 나가겠네 하는 생각으로 돌아서며, 입이 정상으로 돌아온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 님들이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의 9할은 헛다리니까 다 폐기하시고, 이쪽도 지금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기도 하니까 서로서로 조용하게 넘어갑시다.”
사람 귀신 보듯 하지 말고, 좀.
“시살라나 불러 줘요. 제발.”
* * *
시온 그레이스는 하염없이 일렁이는 끝없는 공허를 바라보며 방금까지 같이 있었던 도진에 대해 생각했다.
희망 없는 탐색을 이어 가며 점점 자포자기의 영역으로 들어서던 자신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말을 전한 리제니안.
미치지 않기 위해 두서없이 주워섬기던 말들이, 자신의 목소리가 녀석에게 닿았다는 사실을 듣고 얼마나 안도했던가.
“이젠 너를 찾아 헤매는 이 시간이 외롭지도, 괴롭지도 않아.”
시온은 자신의 한쪽 손을 차원의 경계 너머로 집어넣었다.
“오늘,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어.”
저 너머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친구에게 말을 건다.
네가 듣는다면 아마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된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이네.」
하고.
‘너도 나한테 자주 사회성 좀 기르라고 구박했었으니까.’
시온이 그렇게 친구를 추억하고, 친구를 추억하게 만들어 준 도진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
경계 너머 손끝에서 퍼져 나간 마력장 끝에 아련한 감각이 스쳤다.
추억에 취해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오랜 기다림으로 거짓 희망을 꾸며 낸 걸지도 모르고.
감지된 무언가가 자신이 찾는 것일 확률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목표를 이루려면 수백 년, 아니 그보다 더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시온은 기뻤다.
‘이런 적은 처음이야.’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한 끝에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허의 바다에서 무언가를 찾아냈으니.
하필 도진이 찾아와, 그를 만나고 온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시온의 마음속에서 도진에 대한 점수가 상향조정되었다.
* * *
“아니, 그러니까 사과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여전히 로비를 벗어나지 못한 도진은 연신 사과와 감사를 표하는 비에고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도진 앞에 또다시 메시지가 떴다. 시온의 호감도가 10포인트 더 올랐다는 메시지였다.
‘…….’
메시지를 본 도진은 기쁘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종잡을 수가 없는 거지?
도진은 마음속에 있는 마법사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1스택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