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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녀의 직업, 아니 포지션이 마음에 걸린다.
묵직한 한 방을 위해 기동력과 내구성을 포기한 극단적 근접 딜러.
그녀는 도진이 볼 때 딱 이거였다.
‘망치 든 마법사.’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냥터만 골라서 다닐 때는 몰라도, 강력한 공격이 빗발치는 보스전과 같은 상황에서는 없는 게 나은 포지션이다.
피하기 힘든 광역 공격에 휩쓸려서 바닥에서 굴러다니면서 피 질질 흘리면 괜히 파티원 사기만 뚝뚝 떨어질 테니.
‘애초에 그게 아니어도 아네모네가 있는 이상 근접 물리 딜러의 필요성이 낮기도 하고.’
해서, 도진에게 있어 가장 쓸모 있을 포지션은.
‘탱커가 좋은데.’
탱커였다.
‘지금도 늦진 않았어.’
딜러로 성장했다 해도 아직 100레벨 언저리라면 시간은 좀 걸릴지언정 탱커 전향이 얼마든지 가능한 시기다.
그녀에게 의지만 있다면, 도진에게는 그녀를 랭커급 탱커로 성장시킬 정보와 능력이 있었다.
‘기회를 잡고 안 잡고는 본인 선택에 맡겨 볼까.’
생각이 길어진 탓일까.
현장은 벌써 파장 분위기였다.
“레사 누나.”
도진은 주섬주섬 자기 물건을 챙겨 돌아갈 채비를 하는 테레사를 불렀다.
“네?”
돌아보는 테레사의 얼굴엔 어색함이 잔뜩 묻어났다.
바뀐 호칭이 어색한 모양이지만, 도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은 필요한 건 아닌데, 조금 있으면 탱커가 필요한 시기가 올 거 같아서… 혹시 탱커로 전향할 생각 없어요?”
테레사는 잠깐 동안 자신이 뭘 들었는지 곱씹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할게요!”
바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너무 빠르게, 그리고 간단히 나온 대답은 오히려 제안한 도진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해도 돼요?”
“할 수 있으니까 말씀하신 거잖아요? 그럼 할게요!”
“…….”
테레사가 이렇게 바로 무조건 하겠다고 나서는 건 도진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였다.
‘다른 탱커도 많은데 굳이 나한테 탱커 할 생각 없냐고 물어? 이거 완전 스카웃 제의잖아! 가끔만 불러줘도 그때마다 대박이 터질 텐데. 이 사람 옆에 붙어 있을 수만 있으면 무조건 붙어 있는 게 이득이야!’
옆에 붙어 있기만 해도 콩고물이 우수수 떨어질 거라는 신앙에 가까운 맹신.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 그러니까 왔을 때 확실히 잡아야 돼.’
동글동글한 눈망울에 비치는 테레사의 결의. 그걸 본 도진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인재일지도 모르겠어.’
의심 없이 하라면 하는 사람. 이건 도진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파티원의 조건이었다.
* * *
다가온 기회를 잡기 위해 테레사는 과감히 움직였다.
먼저 가지고 있는 장비를 전부 팔아 버렸다.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세팅한 장비는 탱커 전향의 걸림돌일 뿐.
급히 파느라 제값을 받지 못했지만, 테레사는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게 다 투자다, 이게 다 투자다, 이게 다 투자다…….’
사실 아까웠다. 손이 달달 떨렸다. 그럼에도 팔았다.
그런 뒤 탱커용 장비를 구매했다.
80~90레벨, C~B급 장비로 방어 관련된 능력치가 덕지덕지 붙은 장비로 세팅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장비를 다운그레이드 하면서 남은 차액은 스킬북에 투자했다.
마지막 차례는 보너스 포인트 분배였다.
‘보너스 포인트를 모아 놔서 다행이야.’
사실 테레사는 도진과 호수 밑바닥에서 보스전을 치른 이후로 보너스 포인트를 조금씩 모아 두고 있었다.
그때 아무것도 못 하고 느릿느릿 뛰어만 다녔던 경험이 그녀에게 생존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포인트는 체력과 민첩에 적절히 나누어 투자했다.
‘여전히 힘만 엄청 높긴 하지만… 앞으로 레벨업 하면서 얻는 포인트를 다 생존 쪽에 투자하면 돼. 할 수 있어.’
모든 준비를 마친 테레사는 방송을 켜고 사냥터로 향했다.
[방패 숙련도? 올릴게요.]
“오늘 뭐 하냐고요? 몬스터한테 맞을 거예요.”
환골탈태를 위한 노가다의 시작이었다.
* * *
휴식 기간으로 정한 일주일을 꽉 채웠다.
더 이상 쉬다가는 심심함에 질식할 거 같아서 바로 LOST에 접속한 도진은 바로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먼저 엘토마기아부터.’
첫 번째로 처리해야 할 일은 역시 시살라에게 맡긴 걸 찾는 것이었다.
제론에 위치한 제국 마탑 엘토마기아로 향한 도진은 습관적으로 탑 옆에 있는 허름한 건물로 걸어가려 했다.
‘잠깐. 이젠 마탑에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냐?’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출입 자격이 없으면 접근 자체를 못 하는 게 엘토마기아지만, 지금 자신에겐 무려 시온 그레이스가 직접 준 증표가 있지 않나.
그럼 그냥 들어가도 된다.
결론을 내린 도진은 걸음을 돌려 탑 쪽으로 걸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탑과의 거리가 줄지 않는 구간이 나왔다.
‘결계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군.’
그럼에도 도진은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어느 순간 마나의 막을 통과하는 감각이 느껴지고, 서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
화려한 엘토마기아의 로비였다.
로비를 지키고 있던 주색위(朱色位) 마법사 르네 다시아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도진을 훑었다.
마탑에 등록된, 출입 자격을 부여받은 자라면 결계에 접한 순간부터 해당 인물의 인적사항이 떠야 정상이었다.
‘색이 없는 걸 보니 외부인인데? 그런데 왜 아무것도 뜨질 않지?’
엘토마기아에 등록된 마법사가 이곳에 들어서면, 설령 알몸으로 들어왔다 해도 강제로 색이 드러나게 된다.
목에 리본이 달리든, 일시적인 문신이 새겨지든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곳이 이곳이었다.
반대로 출입 자격을 부여받은 외부인이라면 그게 장기적인 출입 자격이든 1회용 출입증이든 그걸 승인한 마법사의 정보까지 뜬다.
그런데 아무것도 뜨질 않는다는 건 누군가가 1회용 출입증을 발급하고서는 따로 마탑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지 않은 것 말곤 떠올리기 힘들었다.
저 남자가 아무런 전조나 현상 없이 엘토마기아의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 말이다.
“엘토마기아 소속이 아니시군요. 어떤 용건으로 방문하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바로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경솔하게 행동해선 안 된다.
폐쇄적인 엘토마기아에서 출입증을 발급하고도 보고 및 등록을 하지 않은 건 분명 큰 실수이지만, 외부인을 불러들이는 건 보통 높은 위계를 가진 마법사들이기 때문.
“시살라 오멘을 만나러 왔습니다.”
“…시살라 오멘이라고 하셨나요?”
하지만 이젠 경솔해도 될 것 같았다.
르네는 시살라를 알고 있었다.
재능도 없으면서 이곳에 빌붙어 있으면서 엘토마기아의 격을 떨어뜨리는 반푼이 마법사.
“녹색위 마법사 시살라 오멘을 찾아오셨다는 말씀이신가요?”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실력이 아닌 운으로 녹색위에 올라간 주제에 신성한 엘토마기아에 외부인을?
황색위 이상부터 ‘증표’에 1회용 출입증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기능이 부여되긴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할 때를 대비한 거고.
이곳에 외부인을 초대할 수 있는 건 암묵적으로 청색위 이상부터였다.
‘하물며 출입증 발급 기록을 등록하지도 않았다니…….’
시살라 오멘 같은 거랑 엮여 있는 걸 보면 저 마법사 수준도 알 만하다.
사고가 이어질수록 르네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 갔고, 눈치 빠른 도진은 그걸 바로 알아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 가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외부인에게 출입증을 발급할 경우 발급자는 엘토마기아의 데이터베이스에 해당 내용을 등록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출입증을 발급해 준 시살라 오멘은 그 원칙을 어긴 듯하군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출입증은 또 뭔 소리고. 난 내 증표로 들어온 건데.”
도진은 진실을 말했으나 르네는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대놓고 적대감을 표출했다.
“증표도 예외 없이 만들어지는 즉시 등록됩니다. 당신이 이곳에 들어섰음에도 단말 화면에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는 건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시살라 오멘의 잘못을 덮어 보려는 시도 같은데, 그럴수록 문제는 심각해질 겁니다.”
도진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증표를 꺼내 보여 주려는데.
“무슨 일이냐.”
로비 마법진 중 하나가 번쩍- 하더니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그를 본 르네는 화들짝 놀라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비에고 님, 여긴 어쩐 일로…….”
“학회 일로 잠시 나갈 일이 생겼다. 그런데 이게 웬 소란이냐. 외부인이 들어왔으면 부른 사람을 호출하든, 접객층으로 올려 보내든 하면 될 것을.”
비에고의 호통에 르네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녀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비에고 님이라니. 너무 완벽하잖아.’
르네와 마찬가지로, 비에고는 시살라를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재능 이전에 평민 출신인 시살라를, 비에고는 엘토마기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벌레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르네는 재빠르게, 그리고 당당하게 고자질을 시전했다.
“출입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뜨지 않아 확인 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녹색위 마법사 시살라 오멘이 외부인에게 개인적으로 출입증을 발급하고서도 따로 마탑 데이터베이스에 해당 내용을 등록하지 않은 듯-”
“뭐라고?”
다 듣지도 않고, 비에고는 도진을 사나운 눈빛으로 훑었다.
이때쯤 도진의 짜증은 임계점을 넘기고 있었다.
‘이젠 어디까지 하나 궁금할 지경이네.’
하하. 재밌는 새끼들이네, 이거.
자신은 그저 들어올 수 있으니까 들어왔고, 그냥 친구한테 맡긴 거 찾으러 왔을 뿐이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삐걱대는 건지.
‘그래. 이게 LOST지.’
쉽게 가면 그게 LOST냐.
그때 비에고가 말했다.
“호출해라.”
“네?”
“시살라 오멘을 호출하라고 했다.”
“아, 네! 지금 당장 호출하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하하호호 친구 만나라고 불러주는 건 아닌 거 같고.
꼰대같이 생긴 놈이 시살라를 갈구려고 부르는 게 분명해 보여서, 도진은 증표를 보여 주고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진짜 아까부터 말했지만, 난 내 증표로 들어왔다니까요. 여기, 증표 있잖아요.”
도진은 자신이 가진 엘토마기아 증표를 내보였다.
그런데 그걸 본 비에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어이가 없군. 그냥 따끔히 한마디 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는구나.”
선을 넘다니 이건 또 뭔 개소리지?
“1회용 출입증이면 백 번쯤 양보해 발급자가 깜빡할 수라도 있겠지만, 외부인에게 발급된 증표가 마탑에 등록되어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즉, 너는 지금 닥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가짜 증표를 내게 내밀었다는 것이 되지.”
이래서 평민은 안 돼.
시살라 오멘, 아니 평민 출신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비에고의 사고력을 제한했다.
동시에 그의 선민의식에 불을 붙였다.
“내 앞에 그런 성의라고는 없는 모조품을 들이밀다니. 잘 봐라. 내 것과 네 것의 차이를. 이것이 진짜 엘토마기아의 증표다.”
비에고는 자신의 증표를 내밀며 마나를 주입했다.
증표의 색이 청색으로 물들며, 같은 색의 마력 입자가 방출되어 허공에 소유자의 정보와 엘토마기아의 문장을 새겼다.
“보이느냐. 이것이 바로 엘토마기아의 증표다. 자, 이제 네 우매함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 가벼운 징계로 넘어갈 일을 크게 만들었으니, 가짜 증표를 만들어 사칭을 한 너는 물론이고 시살라 오멘 또한…….”
허공에 뜬 자기 이름과 엘토마기아 문장에 도취된 비에고가 주절주절 떠들고 있을 때.
도진도 증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등록인지 뭔지는 안 했어도 뭔가 입력은 해 놨겠지.’
누가 대마법사 아니랄까 봐 일 처리가 대충대충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시온 어쩌고 하면 더 일만 꼬일 거고.
‘하아…….’
이래서 마법사 새끼들은 안 돼. 하고 한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마나를 빨아들인 엘토마기아의 증표가 모든 빛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심연의 색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