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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밤이 깊은 시간.
부족장과의 만남까지 마무리한 도진은 마을에서 내준 숙소에서 마글로와 마주 앉아 있었다.
“너한테는 뭐라고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지…….”
얼굴이 멍으로 가득한 몰골로 술에 취해 훌쩍거리는 아저씨랑 대화라니.
‘죽겠네…….’
술병을 들고 쳐들어왔을 때 내쫓았어야 했다.
오랜만에 마을 사람들이랑 술을 마시다가 생각나서 왔다는데, 그냥 거기서 마시지.
내일 아침 부족장이 실버문의 금고를 직접 보여 주기로 해서 빨리 잠들고 빨리 일어나고 싶었다.
“아저씨, 너무 취한 거 아니에요?”
“아냐, 인마! 내가 명색이 드워픈데 겨우 이 정도에 취할 거 같아!”
“취했잖아요.”
“내가… 내가 다른 녀석들한테 네가 얼마나 착하고 멋진 녀석인지 몇 시간이나 떠들었어! 알어?”
이젠 듣지도 않는다. 아니, 듣질 못하는 건가.
“넌 이제 내 형제야! 내 목숨이 네 거라고! 원한다면 내 인생을 줄게!”
소리친 마글로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잔다, 이 아저씨.
“그런 거 안 받아요, 아저씨.”
중년 아저씨의 뜨거운 마음이라니. 별로 갖고 싶지 않았다.
[‘강철 봉우리의 돌아온 탕아’ 마글로 로이드와 인연이 이어집니다.]
[인연이 이어짐으로 인해 마글로 로이드의 호감도가 70으로 상승합니다.]
그런데 이미 들어온 거 같았다.
* * *
다음 날.
도진은 부족장 무르 아이그를 따라 금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금고는 모르면 찾지 못할, 지하 동공 아주 구석의 작고 깊은 비밀 공간에 있었다.
“이게 우리가 만든 금고다. 이왕 만들어 둔 김에 잘 만들어진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있었는데, 록켈 그놈한테 들킨 이후로는 그놈이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상자를 보관하는 용도로 썼지.”
“록켈이요?”
무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큼지막한 열쇠와 그것보다는 작은 열쇠를 내밀었다.
“큰 건 금고 열쇠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록켈 그놈 시체에서 찾은 거다. 아마 그놈이 애지중지하던 상자를 여는 열쇠겠지. 그놈이 평소에서 만지작대며 애지중지했으니 적잖이 귀한 걸 보관한 거 같다.”
“정말 저한테 줘도 괜찮겠어요?”
“강철 봉우리는 은혜를 잊지 않아. 강철 봉우리는 널 영원한 친구로 기억할 거다. 이 안에 들어 있는 건 우릴 구해 준 보답이자 친구에게 보이는 성의다.”
[<강철 봉우리의 영웅> 업적 달성]
[업적 보상: 모든 능력치 +3]
[강철 봉우리 드워프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강철 봉우리 드워프는 이제부터 당신을 영웅으로 여길 것입니다.]
[강철 봉우리 드워프는 당신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이게 됐습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개인의 호감도가 아닌 하나의 집단인 ‘강철 봉우리 드워프 부족’ 전체에 대한 평판이 올랐다는 메시지.
“정말 저한테 줘도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가지고 싶으면 금고를 통으로 가져가도 상관없어. 그럼 난 간다. 마을에 할 일이 태산이야.”
무르는 정말 마을로 돌아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도진은 금고를 열었다.
일반적인 컨테이너 박스보다 3배는 커다란, 거의 건물이라 불러야 할 금고 안은 휑했다.
가운데에 가죽 주머니 하나와 검은 상자가 있을 뿐이었다.
저 주머니와 검은 상자가 록켈을 처치하지 못했다면 없었을, 운명 퀘스트 보상일 것이었다.
도진은 가죽 주머니부터 집어 들어 봤다.
[퀘스트 합산 보상으로 25,00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엄청난 액수의 골드가 들어왔다.
두 개 퀘스트, 그것도 운명과 히든이 합산된 값을 한다.
‘하지만 메인은 골드가 아니겠지.’
메인은 누가 봐도 검은 상자다.
높은 확률로 아공간 상자이지 않을까.
도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르에게 받은 록켈의 열쇠로 검은 상자를 열었다.
[갈망의 상자가 개봉되었습니다.]
[갈망의 천칭이 당신의 갈망을 들여다봅니다.]
아공간 상자이고, 안에 아이템이 들어 있을 거란 도진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원래는 그랬을지 모른다.
록켈이 자기가 모은 재물을 보관해 둔 그런 상자였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운명 퀘스트 보상으로서 배치된 검은 상자는, 개봉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종류의 보상을 주는 상자가 되어 있었다.
[갈망의 천칭이 보상의 가치를 조정합니다.]
[보상이 결정되었습니다.]
검게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도진의 손에 뭉쳤다.
아니, 손이 아니다.
검은 기운이 감싼 건 도진이 끼고 있는 건틀렛이었다.
[운명의 힘이 「봉인된 룬 건틀렛」의 봉인 일부를 무효화합니다.]
[「봉인된 룬 건틀렛」이 「봉인이 약해진 룬 건틀렛」으로 이름이 변경됩니다.]
[봉인이 약해진 룬 건틀렛]
등급: 유물
착용 제한: 없음
[표면에 룬이 세공된 건틀렛. 봉인이 약해져 룬의 힘이 조금 더 돌아왔다. 본래 가진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남은 봉인을 해제해야 한다.]
마법 공격력 +200
물리 방어력 +200
마법 방어력 +200
[활성화 룬]
-필살 룬
-파멸 룬
도진의 눈이 커졌다.
100레벨을 넘기고도 「진리의 서」가 봉인을 해제하지 못해서 당분간은 무리겠구나 생각했던 룬 건틀렛의 봉인 해제.
그게 이루어진 것이다.
도진은 바로 새롭게 해금된 룬의 능력을 살폈다.
[상세 보기]
[파멸 룬]
적에게 가한 물리 및 마법 피해를 힘으로 전환해 룬 건틀렛에 충전한다.
충전된 힘을 해방하여 착용자의 공격에 파멸의 힘을 실어 강화할 수 있다.
“미쳤다.”
이건 육성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룬 하나 더 해방됐다고 붙은 능력치가 100에서 200으로 오른 건 둘째 치고.
「파멸 룬」의 능력이 그야말로 미쳤다.
공격을 가해 피해량을 쌓고, 그걸 한 번에 해방해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다니.
크리티컬 때도 그랬지만, 충전과 강화라는 능력은 ‘공격’에 특화된 마법사에겐 특히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그럼… 여기까진 록켈을 죽여서 받은 운명 퀘스트 보상 개념이라고 치고.’
다음은 실버문이 남긴 유산을 볼 차례다.
일단 금고 안은 텅텅 비었다.
방금 가죽 주머니와 검은 상자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지.”
하지만 도진은 보이는 걸 믿지 않았다.
《진리의 서》
가장 먼저 치트키부터 써 봤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다음은 「적야」를 동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잘 숨겨 뒀네.”
도진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금고 안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지도.’
그래. 지도다.
평범한 지도가 아니라 마법으로 만든 지도이니 모종의 트리거가 되기에 충분한 개연이 있었다.
도진은 인벤토리를 열어 <버려진 땅의 비밀 거점>에서 얻은 실버문의 지도를 꺼냈다.
우웅.
그러자 바로 반응이 왔다.
지도가 진동을 일으키더니, 서서히 가루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금고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마법을 숨겨 둔 게 아니라 완성 직전에 멈춰 둔 거였구나.”
금고 안에 준비된 마법을 완성시키기 위함 마침표.
그게 바로 이 지도였다.
순식간에 공간이 확장한다.
금고 안이 마치 아공간으로 변하는 듯한 현상.
그러한 현상 끝에 주변은 어느새 커다란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장소로 변해 있었다.
도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실버문이 훔쳤다고 전해지는 것들이네.’
박물관을 가득 채운 전시품은 하나하나가 유명한 것들이었다.
“아그트라의 창, 카타의 관, 성녀의 편지.”
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들이다.
하지만 이것들, 아니 박물관을 가득 채운 물건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실버문이 반납한 물건들이다.’
그러니 이것들은 가짜겠지.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자 역시나 그대로 통과한다.
여기에 전시된 모든 게 환영이란 뜻이었다.
“이걸 보여 주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슬슬 나오지 그래?”
도진은 실버문을 향해 말을 걸었다.
우물 밑에 파 놓은 던전에도 사념체를 남겨 둔 놈이다.
자신이 준비한 보물찾기 놀이의 최종 도착 지점에 비슷한 짓을 안 했을 리가 없다.
“눈치가 괜찮은 후배님이시군.”
역시나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누군가의 초상화 뒤에서 은색 가면을 쓴 남자가 나왔다.
“실버문.”
“의 기억이지. 기억이 뭉쳐 만들어진 사념체.”
실버문이 덧붙이는 정정에, 도진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했다.
“디테일한 정체야 내 알 바 아니고. 난 이런 환영으로 가득한 전시장은 관심 없어. 받을 걸 받으러 왔을 뿐.”
도진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각인 도면의 일부분을 내보였다.
실버문이 가면 너머에서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테스트를 통과해서 여기까지 온 게 성격이 매우 급한 후배님이셨군. 인성보다는 실력 위주로 뽑히게끔 시험을 설계한 내 잘못이지, 뭐.”
“…다른 건 몰라도 너한테 인성으로 지적받고 싶진 않아.”
실버문은 도진의 항변을 무시했다.
“자, 따라오라고. 재미있는 놀이에도 끝은 필요한 법이잖아?”
도진도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1층이 서서히 사라지며 다시 1층과 똑같은 공간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시되어 있는 물건이 단 하나였다.
중앙에 둥둥 떠 있는 책 한 권.
실버문이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자세로 책을 가리켜며 말했다.
“난 인생을 바쳐 가치 있는 것에 나의 흔적을 새겼지. 잠시 가져왔다 다시 돌려놓는 것만으로 그 물건에 나의 이름이 남을 테니.”
도진은 실버문의 말을 무시하고 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투명한 막으로 막혀 있었다.
이 새끼, 주절주절 떠들고 싶어서 별걸 다 만들어 놨네.
“미친놈인가.”
“맞아. 미친놈이지. 하지만 어쩌겠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보면, 나의 예술을 더하고 싶어지는걸. 유려하게 훔치고, 아련하게 돌려놓는 그 과정 자체가 나의 행위 예술이었거든.”
“…….”
할 말이 없는 광인이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위대한 창작물에 흔적을 남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타자의 예술에 기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말이야. 그래서 만든 것이 저것이지.”
“요점만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낭만과 예술을 위해 버렸던 마법사로 되돌아가 내가 남길 수 있는 ‘위대한 것’을 만들고자 했고, 완성했다는 이야기이지.”
실버문이 팔을 뻗었다.
저 멀리 허공에 떠 있던 책이 빠르게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실버문은 책을 두 손으로 잡아 도진에게 표지를 보여 줬다.
[고유 마법 체계 - 염동체술 편]
“이게 바로 마법사였던 내가 위대한 대도이자 트레져헌터로 이름을 남길 수 있게 해 준 기예(技藝)의 집대성.”
고유 마법 체계 ‘염동체술’과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마법 각인을 정리한 책자야.
“어때? 이 정도면 후배님 입장에서 만족스러운 ‘보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