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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게 반복될수록 추위는 강해졌다.
해발고도가 높아지면서 떨어지는 기온에 더해 해가 저물어 떨어지는 기온까지.
‘더 있다간 동상이 아니라 동사를 걱정해야겠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마글로가 말했다.
“더 걷다간 큰일 나겠어. 오늘 밤은 저기서 쉬자. 이런 산에선 말이야, 적당히 평평한 곳에서 멈출 줄 알아야 돼. ‘조금만 더 가서’ 같은 생각을 하면 언제 쉴 수 있는 장소가 나올지 알 수 없단 말이지.”
중년 드워프는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자신이 말한 ‘평평한 곳’으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걷느라 못 보고 지나칠 뻔했는데 역시 산을 고향으로 둔 사람답다.
“바람이 엄청나네요.”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에 도진이 인상을 썼다.
마글로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빨리 쉴 준비나 하죠.”
도진은 「염동」으로 주변 눈을 벽돌 모양으로 퍼냈다.
“오, 역시 마법이란 게 편리하긴 하구나.”
안 그래도 도진이 천막 같은 어설픈 걸 꺼내면 핀잔을 주려던 마글로는 자기가 만드는 것보다 빠르게 쌓이는 건축 재료를 보며 오히려 감탄했다.
“좋아,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해 볼까.”
마글로는 도진이 만든 얼음 벽돌을 착착 옮겨서 쌓기 시작했다.
필요할 때는 손도끼로 자르고 긁어 다른 모양으로 얼음을 조형할 때는 역시 드워프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마법사와 드워프가 힘을 합치자 그럴싸한 이글루가 순식간에 완성됐다.
“여기 겉 좀 싹 한번 구워 줄래? 아주 조금만 녹인다는 느낌으로.”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도진은 마법으로 이글루 겉을 살짝 녹였다.
그러자 녹았던 눈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눈보다 훨씬 튼튼한 얼음이 되었다.
“너 추운 데서도 돌아다녀 본 적이 있구나?”
“안 겪어 본 환경이 드물걸요.”
“어우, 눈 가지고 씨름하느라 땀 흘렸더니 더 춥다. 얼어 죽겠어. 빨리 들어가서 쉬자!”
마글로가 좁은 이글루 입구로 기어서 들어갔다.
도진도 따라서 들어갔다.
“어우, 좀 낫네.”
이글루 안은 꽤나 널찍했다.
편한 휴식 공간 확보를 위해 넓게 지은 덕이었다.
“불 좀 피워야겠지?”
마글로가 장갑을 벗고 손을 비비며, 이글루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도진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배낭을 뒤져 마른나무 조각을 꺼내 이글루 중앙에 쌓았다.
《점화》
그리고 도진이 불을 붙였다.
바닥에 깔 것을 깔고, 침낭을 꺼내 잘 준비를 마쳤다.
“바람 소리가 갈수록 거칠어지는 걸 보니 다행히 눈보라가 올 거 같다. 몬스터들도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는 비교적 얌전할 테니, 편히 잘 수 있겠어.”
불에 손을 녹이며 마글로가 하는 말.
설산에서 밤새 눈보라가 몰아치는 게 행운이라니.
괴물이 일상인 세계다웠다.
“빨리 먹고 빨리 자자.”
먹성 좋은 종족인 드워프로서, 마글로는 앞선 두 끼를 겨우 육포 쪼가리와 비스킷 쪼가리로 때운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시지에 치즈, 돌돌 말아 놓은 베이컨과 스모크 햄이 덩어리째 마글로의 배낭에서 튀어나왔다.
“아니, 술까지 들고 왔어요?”
거기다 술병까지.
마글로는 뭘 새삼스런 소리를 하냐는 듯 도진을 쳐다봤다.
“집 밖으로 나오는데 술을 가지고 나오는 건 상식이잖아?”
“그런 상식 인간 세상엔 없어요.”
“쯧쯧, 그러니까 인간들이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사는 거다. 우릴 봐. 500년은 거뜬하게 살잖냐.”
“…….”
도진은 어이가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밥이나 먹자.
* * *
다음 날부터 도진은 아네모네를 소환해서 함께 이동했다.
눈 덮인 설산의 풍경을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워서였다.
아네모네 몫의 설신은 마글로가 즉석으로 만들어 줬다.
【이렇게 춥고 하얀 곳은 처음이야.】
아네모네는 눈은 물론이고 차가운 공기마저 신기한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가며 걸었다.
말릴 새도 없이 텁 하고 눈을 삼켜 보기까지 한다.
【차가워!】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외치는 아네모네.
그녀의 신난 모습에 도진도 미소 지었다.
“이 녀석아, 차가운 걸 그렇게 삼키면 배탈 난다.”
아네모네를 처음 봤을 때는 겁을 먹었던 마글로도 몇 시간 만에 그녀와 많이 친해져 있었다.
【배탈? 난 그런 거 안 나.】
“그런가? 늑대처럼 보여도 정령이니까 배탈은 안 나려나?”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키가 작아? 얼굴은 엄청 아저씬데 키는 어린애 같아.】
“흥. 이래 봬도 우리 종족 사이에선 내가 엄청 장신이라고.”
【거짓말.】
“진짜다, 이놈아.”
종족과 나이를 초월해 티격태격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걷고 있을 때였다.
-그우우우우.
바람에 흩날리는 눈이 만들어 낸 장막 저 너머에서 굵고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 설인!”
마글로는 바짝 긴장하며 허리에 찬 도끼를 쥐었지만.
“갔다 올게요.”
그가 나설 틈은 없었다.
도진과 아네모네가 앞으로 치고 나간 것이다.
작은 눈보라가 가라앉고, 적의 정체가 드러났다.
설인 두 마리다.
키가 3~4미터는 될 법한 털복숭이들.
“아네모네, 시선만 잠깐 끌어 줘.”
【맡겨 둬.】
아네모네가 속력을 냈다.
급조된 설신이 박살 났으나 발이 눈에 빠질 일은 없었다.
정령력을 끌어올려 달리는 아네모네의 속도는 눈에 발이 빠질 정도로 느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아네모네에게 설인들의 적의가 집중됐다.
-그워!
설인 둘이 동시에 주먹을 휘두르며 아네모네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아네모네는 요령 좋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놈들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사이 도진은 시간을 충분히 들여 마법을 완성했다.
빛과 어둠 다음으로 다루기 어려운 뇌전의 힘을 응축하여 만든 한 자루의 창.
창은 도진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다른 마법과 빠르게 힘이 흩어지는 전격 속성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요란하게 튀는 스파크가 도진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뇌전의 창》
도진이 쥐고 있던 창을 던졌다.
번쩍 하는 푸른 섬광과 함께 설인이 마법에 적중당했다.
순간 설인이 뻣뻣하게 굳으며 뒤로 넘어간다.
‘대인 공격력만 따지면 5성 마법 중 순위권을 다투는 마법이다. 거기다 크리티컬까지.’
한 방에 즉사 아니면 그로기는 확정이라고 봐야 했다.
이번엔 속성 상성까지 더해졌기에 설인은 단 한 방에 죽어 버렸다.
-그어?
아네모네를 쫓던 나머지 하나가 죽은 친구를 돌아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무슨 일인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
그때.
바닥에서 솟은 얼음송곳이 설인의 무릎 관절을 부쉈다.
쓰러지며 바닥을 짚는 설인의 목을 아네모네가 물어뜯고 물러난다.
이어, 도진의 마법 세례가 이어졌고, 남은 설인도 순식간에 친구를 따라갔다.
‘역시 5성 마법을 쓰면 마나 소모가 장난이 아니구나.’
마나 소모도 마나 소모지만, 회로 과열이 좀 심한 편이다.
도진은 혹시 모를 추가 전투를 대비해 마법사용 연초를 태웠다.
“설인을 둘이나 순식간에 처치하다니! 7급 모험가는 다 너처럼 엄청나냐?”
뒤늦게 달려온 마글로가 감탄사를 뱉었다.
“다 이렇진 않을 거예요.”
마글로는 대답도 듣지 않고 열심히 뛰어서 설인들의 시체를 구경하러 갔다.
도진은 그런 그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여기서 설인이 나왔다는 건 이 근처가 놈들이 사는 곳이란 소리예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놈들을 또 마주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마글로의 상태가 이상했다.
설인 시체가 아니라 다른 방향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
도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가 보는 게 뭔지 확인했다.
‘저건…….’
움푹 파인 구덩이 같은 곳.
덮인 눈 위로 사람의 손이 드러나 있었다.
짧고 굵은 손가락뼈를 볼 때 아마도 드워프다.
마글로는 허겁지겁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진도 그를 도왔다.
완전히 얼어붙은 손의 주인이 살아 있을 리는 없지만, 못 본 척 지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그런데 눈을 파내면 파낼수록 문제가 심각해졌다.
구덩이 안쪽에서 나온 시체가 한두 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온전하지 못한 시체도 많아서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수십 명 이상이 묻혀 있는 건 확실했다.
“…….”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구덩이에 묻혀 있던 수십 구의 드워프 유해를 보는 마글로.
강추위에도 떠는 일 없던 그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저씨…….”
도진의 부름에도 한동안 대답도 않고 유해만 바라보던 마글로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빨리 가자.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어.”
도진은 별말 없이 마글로를 따라 걸었다.
【…….】
아네모네는 불러들였다.
무거워진 공기에 힘들어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고, 설신이 부서진 바람에 평범하게 걸으면 발이 빠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나 문제도 있고.’
이후 도진과 마글로는 별다른 대화 없이 묵묵하게 걷고 걸었다.
산 능선을 타고 봉우리를 넘고, 낭떠러지에 있는 좁은 길을 타고 움직이고 움직인 지 사흘째에 접어들었을 때.
커다랗게 뚫려 있는 얼음 구멍이 나왔다.
“여길 타고 내려가면 우리 마을이 나올 거야.”
“타고 내려가요? 떨어지는 게 아니라?”
“어쩌겠냐. 내가 말했잖아. 그 굴을 지나는 게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그래도 기어 올라오는 거보다는 내려가는 게 쉽지 않겠어?”
내려가다 한 번만 엎어지면 그대로 수백 미터를 굴러 다진 고기가 될 것만 같은 가파른 구멍.
하나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반대편은 신이 칼로 자른 듯 잘려 있는 까마득한 절벽이니.
‘레벨 좀 더 올린 다음에 왔으면 편했을걸.’
7성 마법사쯤 되면 이런 지형 정도는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은 몸으로 때워야 할 게 많은 도진이었다.
그래도 이게 마지막 고비다. 힘내 보자.
생각하며, 도진은 일단 자세를 낮췄다.
그냥 걸어 내려가기엔 무리가 있는 경사였다.
* * *
얼음 구멍과 이어져 있는 곳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동공이었다.
내려올 때는 뭐 이런 데다 터를 잡았나 싶었는데 내려와 보니 알겠다.
만년설 쌓인 바깥과 달리 지하 동공은 따뜻했고, 스스로 빛을 내는 광물이 조명을 대신하고 있어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밝았다.
“여긴 지열 때문에 엄청 따뜻하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온천수가 솟아서 꽤 살 만해.”
도진에게 설명을 해 주며 걷던 마글로는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자마자 냅다 뛰었다.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바위를 지나치자 시야가 탁 트이며 강철 봉우리 드워프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야. 왜 다들 그러고 있는 거야?”
오면서 드워프 시체를 봤을 때부터 짐작은 했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그런 짐작은 슬프게도 빗나가지 않았다.
마글로의 고향. 강철 봉우리 드워프의 터전은 반쯤 죽은 것처럼 보였다.
유령처럼 기운 없이 무언가 노동을 반복하고 있는, 야윈 드워프들의 모습.
그건 마을보다는 포로수용소에 가까운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