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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통로를 지나는 사이 시작된 붕괴 때문에 미친 듯이 달려야 했던 도진은 던전을 빠져나오자마자 허공에 소리쳤다.
"미친 새끼가!"
처음에는 그냥 흔들리는 정도였다.
여기서 이미 도진은 달리기 시작했다.
지하 통로가 ‘조금’ 흔들린다고 안심할 수 있겠나?
냅다 달리고 봐야지.
아니나 다를까 진동은 갈수록 커졌고, 붕괴는 가속됐다.
쿠르르릉.
그 결과 도진이 빠져나온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통로를 포함해 저 멀리, 입구가 있던 폐허까지 지반이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히든 던전 <버려진 땅의 비밀 거점>을 클리어했습니다.]
전생에는 본 적 없는 던전 클리어 메시지가 떴다.
다른 보상은 없이 경험치만 들어왔다.
추가로 얻은 청성초 2개와 실버문이 남긴 지도, 불완전한 각인 도면으로 이미 보상을 지급했다는 뜻일 거다.
어쨌든 생각했던 것 이상의 수확을 거둔 셈이다.
그러니 기뻐야 했지만…….
"……."
흙먼지 흩날리는 붕괴 현장을 보니 기쁜 마음보다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더 짜증 나는 건 그놈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거 같다고 포기할 수가 없다는 거지.’
실버문은 100년도 훨씬 전에 활동했던 트레져헌터다.
가치 있는 거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집했고, 그걸 위한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특이한 건 활동 중일 때부터 자기가 훔친 물건을 ‘반납’하는 기행을 벌였다는 점이다.
거기다 훔친 물건을 훔친 곳에 돌려놓지 않고, 물건의 원주인에게 반납하는 게 실버문의 방식이었다.
가문의 빚 때문에 정략결혼으로 팔려 간 아세핀 르미네 남작 영애를 결혼식 현장에서 납치해서는 그녀의 옛 연인 집에 반납한 사건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었다.
‘정작 남작 영애가 실버문한테 반해서는 수녀가 된 게 더 레전드지만.’
어쨌든 실버문이란 인간은 정말 ‘제멋대로’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일화를 전부 뒤져도 쾌활함과 유쾌함은 있을지언정 진지함은 없다.
‘모든 행동의 우선순위가 자기 흥미 위주인 인간.’
그런 인간이 짠 판에 놀아나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한다.
하지만 하긴 해야 했다.
‘뭔 바람이 불어서 마지막으로 남기고자 한 게 마법이랑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시간 투자할 가치는 있다.’
실버문이다. 이유를 찾아봐야 그놈의 변덕, 흥미, 장난기 정도가 이유겠지.
"일단 지도부터 보자."
먼지를 털어 내고 주저앉은 도진은 지도부터 펼쳐봤다.
그런데 지도가 이상했다.
"이 새끼 이거… 시작부터 장난질이네."
지도가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중앙대륙 동부, 서부, 북부, 그러다 바다.
가리키는 장소가 초 단위로 여기저기로 옮겨 다닌다.
「지금 가 봤자 잔해밖에 남아 있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지 않겠나? 그대를 위한 단서가 남아 있을지. 돌덩이라도 열심히 치워 보라고. 하하하. -실버문」
밑에 적어 놓은 걸 보니 알겠다.
지도가 계속해서 옮겨 다니며 찍는 장소는 실버문이 말한 ‘테스트를 위해 준비한 다른 장소’일 터였다.
어느 한곳에서 테스트를 통과한 자가 나오면 다 붕괴되게 만들었다더니, 거길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단서를 모으게 만들 셈인 모양이다.
"죽이고 싶네."
도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죽이고 싶었다.
‘후우, 진정하자.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만 하는 거야. 그 새끼 농간에 놀아나면 나만 손해다.’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머리를 식히고 지도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처음엔 못 보고 지나쳤던 게 눈에 띄었다.
‘글자 아래쪽에 뭔가 덧씌워져 있는데?’
실버문이 개소리를 적어서 교묘하게 가려 놨지만, 음각과 양각을 동시에 사용해서 적어 놓은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잔재주는 보통… 마법 쪽이지."
실버문이 말년에 마법에 심취하긴 한 모양이다. 온갖 곳에 이런 장난질을 부려 놓은 걸 보면.
그런데 어쩌나.
《진리의 서》
나한텐 이게 있는데.
도진은 진리의 서를 전개했다.
그런 뒤 지도의 비밀을 풀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암호화된 마법 코드를 발견했습니다.]
[코드 수집 및 해석 작업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주인의 의지를 읽은 진리의 서가 바로 반응했다.
"해."
[코드 수집 및 해석 작업을 시작합니다.]
진리의 서의 황금빛 마력이 지도를 감쌌다.
지도는 반항이라도 하려는 듯이 스파크를 몇 번 튀겼으나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일부라고는 해도 유물의 봉인마저 해제한 게 진리의 서다.
‘자아도취에 빠진 머저리가 만든 암호를 못 풀 리가 없지.’
[코드 수집 및 해석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역시 진리의 서 앞에서 실버문의 마법적 암호 따위는 어설픈 종잇장에 불과했다.
[퀘스트]
낭만이 있는 보물찾기
등급: 히든
[실버문이 남긴 지도를 찾았다.
지도가 가리키는 장소로 가 보자.]
목표: 실버문이 준비한 보물찾기 즐기기
보상: 실버문의 유산
어지럽게 움직이던 지도가 고정되고, 히든 퀘스트 창이 떴다.
‘개수작 부리면 어쩔 건데. 그냥 답안지 펼쳐 버리면 그만인걸.’
도진은 정상적으로 변한 지도를 봤다.
‘여긴 제도잖아.’
실버문의 지도가 가리키고 있는 건 제국의 심장부 알테루스 캐슬의 한 지점이었다.
* * *
제도 알테루스 캐슬은 위압적인 도시였다.
외성벽부터가 엄청나게 높고, 견고하며, 화려했다.
제도답게 알테루스 캐슬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 하나하나가 철저한 검문을 받았기에 도진은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제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기다리는 데는 오래 걸렸지만, 검문 자체는 쉽게 통과했다.
7급 모험가인 데다 엘토마기아의 증표가 있으니 신분 증명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제도는 진짜 오랜만이네.’
알테루스 캐슬은 뭐가 됐든 다 웅장하고 커다랬다.
‘이러다 길 잃겠다.’
워낙 넓은 도시인 데다 도진도 제도에는 자주 올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실버문이 그려 놓은 지도가 조악했다.
차라리 약도를 그려 놓는 게 더 보기 편할 정도로.
어쩔 수 없이, 도진은 큰길에서 그냥 마력으로 움직이는 마차(魔車)를 탔다.
"여기로 가 주세요."
"아, 산업지구 쪽이군요. 바로 모시겠습니다."
역시 길 모를 땐 택시를 타는 게 제일이다.
그렇게 이동을 돈으로 해결하고 도착한 목적지.
<키다리 대장간>
허름한 간판이 걸린 대장간이었다.
간판 밑으로 보이는 현수막이 인상적이다.
[45년 전통! 드워프 제일의 키다리가 두드리는 리드미컬한 망치질의 품질을 느껴 보세요!]
"어이쿠, 귀한 손님이 오셨네. 그래요, 그래. 뭘 찾으십니까? 무기나 방어구는 물론이고 생활 도구나 농기구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요. 주문 제작도 다른 가게랑은 차원이 다른 품질에 속도까지 자랑한다니까요."
밖에서 간판이랑 현수막을 보며 ‘이게 뭔가’ 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으려니 대장간 안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현수막에 적힌 대로 드워프였다.
드워프 대장장이가 있는 건 놀랍지 않았다.
대도시에서 다른 종족을 보는 게 그렇게까지 드문 일은 아니니.
‘근데 지금 상황에 대장간에 드워프? 여기 지하에 던전이라도 파 놓은 거야 뭐야.’
너무 오래 지나서 이 근처가 재개발이라고 된 건가? 이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손을 싹싹 비비며 다가오던 드워프의 눈이 험악하게 변했다.
"으잉? 너 이 자식, 그거! 그거 어디서 났어?"
드워프는 도진이 들고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실버문의 자필 서명이 되어 있는 부분을.
"네?"
당황하여 반문하는 도진에게 드워프가 달려들었다.
‘뭐, 뭐야?’
도진은 물러서려 했으나 드워프의 움직임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아니, 빠르다기보다는 간절하고 집요했다.
도진은 결국 흙바닥을 구르며 접근한 드워프에게 바짓가랑이를 잡혔다.
"이 자식! 바른대로 말해! 그 놈팽이 자식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거냐!"
뭔가가 잘못됐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 * *
"그러니까… 실버문 그 빌어먹을 자식이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그걸 발견했다는 거냐?"
벌써 3번째 설명을 했음에도 드워프 대장장이 마글로 로이드는 미련 가득한 눈으로 같은 질문을 했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실버문이 마글로 로이드의 부족 강철 봉우리 드워프에게 지급해야 할 공사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튀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150년도 더 전에.’
알면 알수록 어이없는 새끼였다. 실버문은.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간단했다. 술을 먹여서 알아냈다.
"그 빌어먹을 바람둥이 자식! 내가 돈 받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엉!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대장간 하고 있는 게 벌써 148년이야!"
"현수막엔 45년 전통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중간에 폐업이 몇 번 끼어 있어서… 사실은 업종도 몇 번 바꿔서 대장간만 한 건 아니기도 하고……."
"……."
벌컥벌컥벌컥. 쌓인 울분이 상당한지 마글로는 상당한 독주를 쉼 없이 들이켰다.
"공사대금을 못 받았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무슨 공사였어요?"
"…그 새끼가 비밀이랬는데."
하찮은 저항에, 도진은 점원을 불러 안주와 술을 추가시켰다.
"어차피 돈도 안 냈다면서요."
"하긴 그래. 나만 의리 지키면 뭐 해?"
딸꾹. 술에 취해 마른안주를 한 움큼 쥐어 입에 털어 넣는 마글로.
추가로 나온 독주는 드워프를 더욱더 수다쟁이로 만들었다.
"그 재수 없는 난봉꾼 자식이 그러더라고. 아주 튼튼하고 안전한 금고를 만들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우리 부족을 소개해 줬지. 그땐 그 자식이 내 친구라고 생각했거든. 돈은 걱정 말고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 보라고 하니까 우리 부족도 엄청 좋아했어."
안 봐도 보인다. 돈 걱정 없이 마음대로 날뛰어 보라고 했으니 드워프들은 신나서 오버 스펙으로 설계한 뒤에 거침없이 뚝딱거렸겠지.
"난 모험을 하고 다니느라 공사에 참여는 안 했어. 그래도 끝내주게 만들어진 건 확실해. 근데 이 사기꾼 같은 놈이 잔금을 마저 내질 않고 튀어 버렸다는 거야. 거지 같은 쪽지 한 장 남겨 두고."
"쪽지요?"
"어. 금고 안에 나머지 공사대금을 뒀다나? 근데 열어 봤더니 아무것도 없었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 거지.
‘<버려진 땅의 비밀 거점>처럼 말이야.’
마글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친구라고 부족에게 소개한 내 입장이 얼마나 난처했겠어? 그래서 놈이랑 처음 만났던 제도로 찾아왔다가 이렇게 됐어. 모험도 접고, 차라리 내가 돈을 벌어서 돌아가자, 했는데… 장사가 잘 안 되더라고."
"그래도 100년 넘게 이러고 있는 건 너무 길잖아요."
"그게… 사실 나도 가 보려고는 했거든? 근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내 고향으로 가는 길이 끊어졌더라고. 혹시 티그렉 산이라고 알아? 거기 어디에 큰 굴이 있어. 거길 통과해야 하는데 몬스터 서식지가 되는 바람에……."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외국인 노동자 드워프의 모습은 매우 처량했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네.’
불쌍한 드워프에게 도진이 말했다.
"같이 가 볼래요? 아저씨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