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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날 함정을 파훼하고 짧고 좁은 통로를 지나자 작은 방이 나왔다.
던전의 첫 번째 방은 불로 가득했다.
화르륵- 뚝.
화르륵- 뚝.
여기저기 설치된 화염 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멈췄다 하며 빨리 들어와 보라며 유혹한다.
도진은 화염이 뿜어지는 타이밍을 보고 안전지대가 열리는 순서를 외운 뒤 달렸다.
화염이 분사되는 간격은 꽤 여유로워서, 잘만 뛰면 불에 닿지 않고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근데 또 그거 믿고 뛰면 죽거든.’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표표푝.
막 뛰면 독침에 맞기 때문이다.
이미 당해 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도진은 아주 아슬아슬할 때까지 불을 견뎌 가며 천천히 트랩을 통과했다.
화르륵- 착, 화르륵- 착, 화르륵- 착.
마지막 구간은 화염 분사 간격이 훨씬 짧았다.
한번 뛰기 시작하면 앞으로 쭉 달려야 겨우 통과가 가능할 거 같은 속도.
그러나 도진은 한 번 앞으로 뛰었다가 뒤로 다시 뛰었다.
카가각.
그러기 무섭게 목 높이에 딱 맞춘 커다란 칼날이 지나갔다.
도진은 속으로 욕을 하며 다시 달렸다.
출구를 지날 때는 아래쪽으로 슬라이딩 했다.
저기도 가슴 높이에 안 보이는 와이어가 걸려 있어서 그냥 뛰면 중상을 입게 된다.
"후아!"
열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빠져나온 도진은 참았던 숨을 훅 뱉었다.
그런 그를, 통로 벽이 팍 하고 열리며 튀어나온 가시 강철 골렘이 반겼다.
온몸이 강철로 되어 있고,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덮여 있는 놈은 저돌적으로 도진에게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보네, 개복치."
《염동》
도진은 놈을 향해 충격파를 날렸다.
레벨 100을 넘기는 적에겐 기스도 못 낼 공격이다.
그럼에도 이런 공격을 한 이유는, 말 그대로 저놈이 개복치라서였다.
펑.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약한 충격에 노출된 가시 강철 골렘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
이어 놈의 몸이 폭발했다.
던전을 지키는 몬스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격 받자마자 자폭하게 만들어진 놈인 것이다.
자폭과 동시에 가득 박혀 있던 강철 가시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지근거리에서 인간 크기의 세열수류탄이 터진 셈.
‘원래는 저놈이 튀어나온 저 벽 뒤 공간으로 숨어야 하지만.’
도진은 그러지 않았다.
《영체화》
아카데미 학생들을 구하고서 얻은 S급 랜덤 아이템 상자에서 얻은 장비 ‘차원 잠영 망토’의 스킬 「영체화(靈體化)」가 있기 때문이다.
번쩍이는 눈을 보고 타이밍을 맞춰 스킬을 발동한 도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반투명하게 변했다.
지속시간은 단 1초지만, 소리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투사체가 도진을 지나 통로 벽에 처박히기에는 충분히 길고 긴 시간이었다.
파파파파파팍.
찰나를 잠식한 폭풍이 지나가고, 도진의 투명함을 잃었다.
"효과 끝내주네."
도진은 로브자락을 펄럭이며 감탄했다.
적의 공격이 ‘물리’에 한정되어 있다면 완전한 무적이 될 수 있는 이 스킬은 한참 나중에야 배울 수 있는 마법사의 생존기였다.
공격 마법 원툴이었던 도진은 전생에 배워 보지도 못했었기에 써 보는 거 자체가 지금이 처음이었다.
"쿨타임이 15분이라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 효과면 인정이지."
S급 장비빨로 위험을 넘긴 도진은 계속해서 던전을 진행했다.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던전은 점점 더 악랄한 패턴을 내보였으나 도진을 막진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마지막 장소.
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곳에 도착한 도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 깼네."
이상할 정도로 특이한 이 던전에는 보스란 게 없다.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함정도 마지막 방에는 하나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도진은 상자를 향해 걸어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푸른색 식물과 쪽지가 들어 있었다.
「그대의 정력에 도움이 되기를. 다만 이 푸른 기적도 탈모는 고칠 수 없다오. -실버문」
다시 봐도 자기 유산을 대륙 곳곳에 흩뿌려 두고 사람들 농락하는 미친놈다운 쪽지다.
도진은 쪽지를 구겨서 바닥에 버리고는 푸른색 빛을 내는 풀을 집어 들었다.
[‘청성초(靑星草)’를 획득했습니다.]
청성초.
푸른 별 벨라의 빛이 강하게 내리는 곳에서 자란 풀이다.
그냥 먹어도 능력치 상승을 갖고 올 만큼 자체적인 효능도 뛰어나지만, 도진은 이걸 다른 방법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가공해서 영약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역시 각인 재료로 쓰는 게 조금 더 효율적이다.’
마법진을 새겨 넣어 특정 효과를 끌어내는 강화 수단 ‘각인’.
실패 시의 리스크, 성공 확률, 지속 시간, 소모되는 재화 등을 고려해 통상적으로 장비에 적당한 각인을 새겨 쓰다가 버리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실패로 인한 리스크와 재화 문제를 해결하면, 장비처럼 교체할 필요가 없는 곳에 새길 수도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몸뚱이에 말이다.
‘각종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주는 청성초를 재료로 쓰면 영구 각인 하나쯤은 새길 수 있어.’
그것도 아주 고급으로.
"챙길 건 챙겼으니, 이제 뒷길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도진은 들어온 곳과 반대편에 있는 통로를 향해 걸어가려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져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 방엔 아무것도 없어.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생에도 보스도 없고, 던전 클리어 메시지도 안 뜨는 게 하도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하루 종일 샅샅이 뒤지고 뒤졌으나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뭘까."
말하며, 도진은 천천히 돌며 방 전체를 눈에 담았다.
그러다 어느 지점을 지나칠 때 아주 잠시 비치는 굴절을 찾아냈다.
‘착각이 아냐.’
분명 뭔가가 공간을 왜곡시켰다.
전에 내가 여기 몇 레벨 때 왔었지?
200 직전이었다.
그때 발견 못 한 게 지금 왜 보여? 그때랑 달라진 게 뭐지?
보는 것에 차이를 가져올 만한 건.
‘눈.’
《적야》
도진은 마안을 극한까지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보이는 세상이 달라졌다.
"이건……."
방 안이 선과 선으로 가득했다.
마치 첩보 영화에 나오는, 적외선 레이저로 가득한 방 같았다.
* * *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함정으로 가득한 던전이라 간과했었다.
이런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은.
‘레이저 자체는 마법이랑 연관이 없어. 그야말로 가시영역 밖에 있는 빛이라 못 본 거지.’
하지만 광선의 용도는 마법과 연관이 깊었다.
‘이거 마법진 같은데?’
도진은 벽에 다가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쏘아지는 광선.
도진은 그걸 가려봤다.
그러자 가린 광선이 지워지며 어지럽던 광선의 조합이 조금 단순해졌다.
‘근데 계속 가리고 있을 수가 없잖아.’
손을 치우면 다시 레이저가 나올 거고.
‘후려치면 꺼지나?’
도진은 퍽 하고 벽을 후려쳤다.
그러자 정말 나오던 광선이 완전히 꺼졌다.
"오."
비밀을 푼 도진은 다음으로 꺼야 할 선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다 좋은데 마안을 계속 한계까지 발동하고 있으려니 눈이 아프다.
빨리 끝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무조건 꺼야 돼.’
마법진의 맥을 끊는 놈을 끄고.
‘이건… 다시 켜야겠네.’
잘못 끈 건 다시 쳐서 켜고.
그러한 작업이 이어진 끝에.
"됐다!"
드디어 제대로 된 마법진이 완성됐다.
‘자, 그래서 뭐냐. 얼마나 대단한 게 있길래 이렇게 꽁꽁 숨겨 놨는지 한번 보자.’
도진은 여차하면 튈 준비를 했다.
궁금해서 일단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살 궁리는 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도진을 위협하는 무언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재밌네. 후보자가 이쪽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즐거운 듯 웃음기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도진은 목소리에 집중하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다른 수작은 없으니 긴장하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겠지? 그냥 긴장한 상태로 들어. 음, 일단 자기소개부터. 반가워, 후배님. 난 낭만꾼 실버문이라고 해.】
도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굴 놀리나?
지는 기분이 들어서, 도진은 상대에게 말을 걸어 봤다.
"당신이 실버문이라고?"
【실버문은 실버문이지만, 정확히는 훌륭한 후배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남긴 정보 집합체쯤 되지.】
"일단… 이유부터 들어보고 싶은데. 이런 던전을 만든 거야 악취미 때문이라고 치더라도 굳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사념체를 남겨 둔 이유 말이야."
【축하하려고. 축하해, 방금 후배님은 내 진짜 유산을 찾는 보물찾기를 할 자격을 얻었거든. 테스트를 위해 대륙 곳곳에 준비한 다른 장소는 후보자가 나타나면 붕괴되는 구조라서, 무려 단독 후보지.】
"…보물찾기라고?"
【응. 그렇다고 막 대단한 건 아니야. 내가 모은 예술품과 보물, 훔친 지식과 기록 같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든 거거든. 수집했던 건 대부분 반납을 한 처지라. 그래도 내 오리지널이니 ‘진짜 유산’이라고 해도 좋지 않겠어?】
공간이 흔들- 하고 왜곡됐다.
원래 상자가 있던 곳에 투명한 관이 생겨났다.
안에는 청성초 2개와 지도와 책자가 보였다.
그걸 보고 놀라는데, 실버문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설렜지? 하지만 어쩌나. 저 관을 열려면 생체 인증이 필요해요. 그것도 용의 생체 조직이 필요하답니다. 자, 주어진 시간은 단 30초! 그 안에 관을 열지 못하면 눈앞의 청성초는 물론이고, 지도도 함께 불탈 거랍니다!】
떠벌거리는 실버문의 목소리는 짜증날 정도로 신나 있었다.
뭐? 용의 신체 조직이라고?
그딴 걸 들고 다니는 놈이 어디 있어!
하고 욕을 하려는데… 있었다.
하베르칸을 잡고 얻은 「키메라의 독낭」의 이 업그레이드된 「독을 품은 용족의 심장」.
도진은 조용히 그걸 꺼내서 관에 가져다 댔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냥 건드리면 열리… 어?】
도진의 당황한 모습을 구경하려던 실버문은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너, 너 뭔데 그딴 걸 들고 다녀!】
나름 유머랍시고 장난을 친 모양이지만, 도진은 철저히 무시했다.
대꾸도 안 하고 열린 관 안에 있는 걸 챙겼다.
청성초는 인벤토리에 넣고, 지도는 다음 목적지를 가리키는 걸 테고, 나머지 책자는…….
"이거… 각인이네?"
각인의 일부였다.
일부라서 정확히 무슨 각인인지 알 수 없으나 엄청난 복잡함만 봐도 보통 각인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 눈에 익지 않은 각인이면 보통 각인일 수가 없지.’
그런데 일부만 이렇게 있다는 건 보물찾기로 완성해야 하는 게 이 각인이란 건가?
도둑놈 유산이 왜 각인이야?
반쪽짜리 각인 도면까지 인벤토리에 갈무리한 도진이 물었다.
"당신, 마법사였나?"
장난이 안 통한 심통으로 씩씩대던 실버문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심각하게 자아도취에 빠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후후, 그저 재능 많은 남자라 생각해 줘. 낭만을 좇느라 버린 길이었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기는 게 나를 증명한다면, 그래. 내게도 마법사의 피가 남아 있었던 거겠지.】
뭐, 말년에 괜찮은 각인 하나 만들었나 보네.
얻을 정보는 대충 다 얻은 거 같으니 가자.
미친놈 상대하는 것도 지친다.
도진은 툭툭 로브 자락을 털고는 말했다.
"더 할 말 없지? 그럼 간다. 아, 그리고 너 그냥 계속 도둑놈 해라. 같은 마법사라고 하기 쪽팔리니까."
【하핫, 유쾌한 후배님이시군. 낭만을 좇던 시절의 나를 보는 거 같아 재미있어. 그럼 잘 부탁해, 후배님.】
실버문의 작별 인사를 뒤로한 도진이 빠져나가는 걸음에 맞춰 <버려진 땅의 비밀 거점>이 조금씩 붕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