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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바닥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작전을 짰다.
적의 숫자와 위치, 폐허의 구조와 그에 따른 동선 등 고려해야 할 것도 많고 계산해야 할 건 더 많았다.
플랜을 하나만 짜서는 그대로 진행될 리가 없으니, 플랜 B, C, D 등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그에 맞는 대응도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면 됐어.’
시뮬레이션을 열심히 돌리고, 그것을 머릿속에 정리한 도진은 작전을 개시했다.
시작은 포복이었다.
‘아오, 웬 돌이 이렇게 많아?’
매복용으로 뜯어온 갈색 풀을 앞세워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는 도진.
오크들은 모닥불 주변에서 정체 모를 고기를 뜯느라 도진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살다 보니 경계의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는 모양.
‘아무리 그래도 이거보다 가까이 가긴 좀 그렇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어둡고, 적이 무방비하다 해서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건 잘못하면 자살 행위가 될 수 있었다.
도진은 적당히 가까워졌다 싶은 곳에 멈춰 다음 행동에 착수했다.
《악령 소환》
5성 마법사가 된 것도 있고, 해석률이 오른 영향도 있어 「악령 소환」은 3개체까지 소환이 가능해졌다.
여러 마리를 소환하면 그만큼 유지 시간이 줄긴 하지만, 어차피 미끼로나 쓸 악령이 오래 살아 있을 필요는 없다.
‘가라.’
도진은 정해 둔 지점을 향해 악령들을 질주시켰다.
-크륵?
괴성까지 지르며 달려가는 악령들은 폐허 안에 있는 오크들의 어그로를 쓸어 담았다.
‘좋았어.’
먹던 것을 집어던지고, 바닥에 내팽개쳐 뒀던 무기를 집어 들고 일제히 일어나는 오크들을 보며 도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아악!
오크들은 괴성을 지르며 악령들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마주 달려갔다.
그 순간.
《화염포탄》
마나를 꽉꽉 눌러 담아 위력을 키운 「화염포탄」을 발사하는 도진.
목표물은 몬스터가 아닌 오크들이 필연적으로 지나가야 하는 곳에 있는 위태로운 벽이었다.
멀쩡할 때는 3층 건물의 외벽쯤을 담당했을 벽.
퍼엉.
벽과 만난 화염포탄은 굉음을 내며 폭발력을 과시했다.
-크륵?
그 소리에 놀란 오크가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늦었다.
퍼엉- 콰르릉!
폭발음과 붕괴음 사이의 간격은 한없이 짧았다.
고개를 돌렸던 오크는 폭발에 담긴 열과 압력에 바닥을 구르다가 무너지는 벽에 깔렸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죽은 놈과 부상당한 놈이 뒤섞여 구른다.
모든 오크의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된 순간.
‘지금이다!’
도진은 미친 듯이 달려서 폐허와의 거리를 좁혔다.
《화염구》
그러면서 마법을 난사했다.
노리는 건 적이 아닌 주변 환경.
-크어?
뒤늦게 오크들이 공격을 인지하고는 회피나 방어를 해 보려 들었지만 소용없었다.
퍼퍼펑.
난사된 화염구는 놈들 근처에 있는 기둥과 구조물들을 두드렸다.
이미 내구도의 한계까지 내몰린 커다란 기둥과 건물 잔해는 난사된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고 무너졌다.
-쿠오오!
오크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도망치려 했다.
"어딜!"
하지만 악령을 미끼로 좁은 길목으로 유도한 상태였기에 도망칠 곳은 많지 않았다.
《기어 다니는 불》
《불기둥》
공간을 장악하는 종류의 주문이 연속으로 퍼부어졌다.
정면으로 붙었으면 골치 아팠을, 원거리 공격 수단을 지닌 오크들은 공격은커녕 살기 위해 저 멀리 반대쪽으로 뛰어 도망치느라 바빴다.
그러나 도진도 마냥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살아남은 놈들이 생각보다 많아.’
좁은 곳으로 잘 몰아서 구조물을 무너뜨려 요리를 했음에도 살아남은 오크들이 반 이상이었던 것.
골목 반대쪽으로 헐레벌떡 도망친 놈들도 우회해서 포위를 하려 들고 있고, 몇 놈은 뿔피리를 열심히 불고 있었다.
저걸 불고 있다는 건 머지않아 보기 싫은 초록색 근육 덩어리들이 추가로 몰려올 거란 소리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도 니들이랑 오래 싸울 생각이 없거든!"
작전은 이미 성공했다.
도진의 목표는 오크 섬멸이 아니라 히든 던전 진입이니까!
"아쉽지만 오늘의 불꽃놀이는 여기까지. 그럼 잘들 있어라, 초록 돼지들아!"
유쾌하게 웃으며 도진은 아네모네를 소환했다.
이미 우물 주변에 몰려 있던 오크들은 저쪽에서 돌에 깔리고 불에 가로막혀 이쪽으로는 못 온다.
"아네모네, 물어!"
남아 있는 놈이 한두 놈 있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재낄 수 있었다.
도진을 태우고 우물을 향해 달리던 아네모네가 조악한 창을 내미는 오크 놈의 목을 물어뜯었다.
-쿠오옥!
오크는 죽지 않고 아네모네의 목을 부여잡으며 저항했으나.
"곱게 좀 죽어라."
《얼음 화살》
아네모네는 혼자가 아니었다.
지근거리에서 눈동자에 대고 쏜 얼음 화살이 오크를 저승으로 보냈다.
푸푸푹.
‘더럽게들 빠르네.’
그런 도진과 아네모네 근처로 창이 박힌다.
꾸역꾸역 무너진 잔해를 넘고 불길을 탈출한 오크들이 던진 것이었다.
도진은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오크들에게 말했다.
"앵콜 요청이 좀 과격한데?"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아네모네를 소환 해제한 도진은 폴짝 뛰어서 우물 위로 올라섰다.
그런 뒤 미리 만들어 둔 올가미를 바닥에 던지고, 「대지의 창」을 쐐기 삼아 밧줄을 고정했다.
"그럼 이만."
그리고 미련 없이 우물로 뛰어들었다.
* * *
히든 던전 입구인 우물은 매우 깊었다.
급하다고 만유인력에 몸을 맡겼다간 죽기 딱 좋을 정도로.
하지만 밧줄이란 문명의 이기의 도움으로 도진은 낙사를 면할 수 있었다.
‘역시 유비무환. 뭐든 준비를 해 두면 쓸 일이 있다니까.’
인벤토리에 온갖 잡동사니를 준비해 두는 버릇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다. 지금은 철저한 준비와 그로 인해 올라가는 생존 확률에 대한 고찰을 할 때가 아니었다.
오크들이 줄을 끊기 전에 빨리 내려가야 했다.
도진은 우물 벽에 발을 대고 빠르게 우물 밑으로 내려갔다.
-크오? 크오우어!
잠시 후 오크들이 우물 안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질을 한다.
‘젠장, 생각보다 빠르네.’
그래도 이쯤 내려왔으면 떨어져도 크게 다치진 않을 거다.
「염동」을 활용하면 충격을 좀 줄일 수 있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낙하 충격에 대비하려는데…….
-쿠오우, 크오!
오크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선택을 했다.
도진을 쫓기 위해, 설치된 밧줄을 타고 우물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잡히면 찢어 죽인다!’로 들리는 게 착각 같지가 않았다.
"진짜 미친놈들이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성이 마비된 걸까.
"뭐, 나야 고맙지."
도진은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리고, 우물 바닥을 향해 계속해서 내려갔다.
먼저 내려오기 시작해서 먼저 바닥에 도착한 도진은 우물 벽을 두드렸다.
쿵쿵, 쿵쿵, 쿵쿵, 퉁퉁.
‘이쪽이네.’
나아갈 방향을 찾은 도진은 여유롭게 시선을 올렸다.
‘좋은 것만 보고 살고 싶었는데…….’
오크 궁뎅이를 보고 있으려니 눈이 따갑다.
빨리 마무리해야지.
《얼음 화살》
-꾸어어어어!
도진이 쏜 아주 차갑고 굵은 것이 엉덩이에 박힌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낙하했다.
한 걸음 옆으로 걸어 충돌을 피한 도진은 쿠웅- 하고 만유인력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낀 오크의 면상에 마찬가지로 차갑고 굵은 것을 박아 줬다.
"아직 살아 있네? 튼튼하다, 야."
중상을 입고 버둥대는 놈을 방치하고는 다시 위를 보는 도진.
오크들이 그런 도진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열심히 올라가 봐. 혹시 아냐? 몇 놈은 탈출 가능할지."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오크들은 다급하게 밧줄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음 화살》
도진은 그런 놈들을 밑에서부터 공략했다.
오크들은 서로 빨리 올라가라며 꽥꽥댔다.
‘그래, 머리라도 나빠야지. 그 피지컬에 머리까지 좋으면 반칙이긴 해.’
일단 몸부터 밀어 넣고 보는 저돌적 저지능에 감탄하며 오크들을 적당히 응징한 도진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럼 가 볼까.’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 이젠 본 게임을 시작할 때였다.
쿵.
염동파로 충격을 주자 우물 벽이 조금 밀렸다.
쿵. 쿵. 쿵.
몇 번을 반복하자 중간 크기의 돌 하나를 시작으로 우르릉- 하고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히든 던전 <버려진 땅의 비밀 거점>을 발견했습니다.]
* * *
히든 던전을 발견했음에도 추가적인 보너스에 대한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이 던전은 그야말로 1회 공략으로 끝나는, 단어 그대로 숨겨진 던전이기 때문이다.
공략된 뒤 인스턴스 던전으로 바뀌는 게 아니기에 공략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보너스인 셈이었다.
해서, 이 던전은 전생에도 단 한 명만 공략했던 던전이었다. 그리고 그 단 한 명이 도진이었다.
‘그땐 지금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상태였지만.’
우물을 벗어나 히든 던전에 발을 들인 도진을 반긴 건 긴 복도였다.
평범한 입구처럼 보이지만, 이 던전은 그냥 걸어도 되는 길 따위 없었다.
여긴 함정으로 가득한 아주 악랄한 던전이었다.
‘그때 여기서 한 번 죽었었지.’
도진은 여기서 높은 레벨만 믿고 방심했다가 비명횡사를 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일은 없다.
‘함정이 메인인 던전이 설계도 털렸으면 끝난 거지, 뭐.’
전생에 몸으로 그린 설계도거든. 내가 가진 설계도가.
도진은 마법회로에 마법을 장전하며 발을 내디뎠다.
탁.
걷기 위해서가 아니라 던전이 방문자를 위해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다.
차자자작.
사방에서 요란한 금속음이 울린다.
이때, 이미 도진은 뒤로 물러나 우물 쪽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다시 봐도 살벌하네.’
발을 디딘 장소는 물론이고, 눈에 밟히는 통로 전체가 날카로운 쇳조각에 난자당한다.
저것만 봐도 과하다 싶은 환영 인사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끼긱.
수백 개가 넘는 작은 날붙이가 일제히 꿈틀- 하고 움직였다.
그러더니.
기이잉.
기이한 소리를 내며 날을 회전시키며 떠올랐다.
저것 하나하나가 소형 금속 골렘이고, 심지어 드론처럼 비행까지 하는 몬스터다.
함정을 피하거나 막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남았다고 안도하는 찰나를 노리는 악랄한 수법.
《돌풍》
그러나 이미 당해 본 도진에겐 통하지 않는 짓이었다.
비행을 위해 가볍게 만들어진 놈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미리 장전해 둔 「돌풍」이 통로를 바람으로 가득 채웠다.
도진을 향해 쏘아지기도 전에 회전날 골렘들은 강풍에 휩쓸려 비행 능력이 잠시 마비됐다.
《회오리바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진은 추가적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더욱 강렬한 바람에 회전날 골렘들은 저들끼리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회전날 파편이 더 많은 회전날과 충돌해 연쇄적인 파괴가 일어났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돼.’
작고 가볍고 빠르고 튼튼한 데다 일격필살의 공격력까지.
적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전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