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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04화 (10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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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누미네 계곡에서의 싸움을 마친 뒤로 2주가 지났다.

그간 도진은 낭비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승급 퀘스트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7급 모험가가 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을 들였음에도 겨우 8급 모험가까지만 달성한 것.

‘긴 송곳니 오크로 시작해서 상단 호위 임무에 그다음은 대왕벌 퇴치에다 산적 소탕 임무라니. 어떻게 이렇게 최악 중에서도 최악만 골라서 퀘스트가 뜰 수 있지?’

이는 전부 운이 나쁜 탓이었다.

최악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종류의 퀘스트만 배정받는 바람에 다른 유저가 들이는 시간의 배 이상이 소모됐다.

“축하드립니다, 모험가님! 여기 8급 모험가임을 증명하는 새로운 모험가 펜던트입니다. 모험가님의 헌신에 감사드리며, 이제부터도 모험가로서 이 세계를 위해 더 큰 활약을 해 주시길. 도진 모험가님의 앞날에 벨라의 빛이 비추길 기원하겠습니다!”

밝고 명랑한 모험가 길드 창구 직원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내미는 펜던트를 힘없이 받아드는 도진.

8급 모험가가 됐다는 뿌듯함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 않았다.

‘혈왕 그 새끼랑 엮이고 나서 재수가 없어졌어.’

모진 놈 옆에 있으면 벼락을 맞는다던데.

괜히 재수 없는 놈이랑 투닥거려서 재수 없음이 옮은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펜던트를 갈무리하는데.

유저 둘이 모험가 길드로 들어서면서 나누는 대화가 도진의 귀를 간질였다.

“야, 아직도 걘 잠적 중이냐?”

“누구? 아, 그 유혈 길마?”

“어. 가진 거 다 걸고 싸웠다가 져 놓고는 그냥 튀었잖아.”

2주 전 결투에서 패배한 혈왕은 그대로 잠적했다.

승자에게 가진 걸 모두 넘기겠다는 결투 조건은 당연히 지키지 않았다.

‘끝이 구질구질하니 계속 욕을 먹지.’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해서 그런지 혈왕은 여전히 여기저기서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하고 있었다.

‘그럴 놈이란 걸 알아서 아쉽지도 않지만.’

애초에 도진은 혈왕이 곱게 결과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조차 안 했다.

혈왕이 먹을 욕의 총량을 넉넉하게 늘리기 위한 계략이었지.

“병신한테 뭘 바라냐?”

“그래도 캐삭빵 먼저 걸었으면 남자답게 결과는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냐?”

“결과만 놓고 보면 캐삭은 한 걸로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쪽이란 쪽은 다 팔고, 판돈도 들고 튄 주제에 게임 계속할 수 있겠어?”

“그건 그래.”

듣기 좋은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재수 옴 붙은 퀘스트 운이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창구 직원에게 7급 모험가 승급 퀘스트를 받은 도진은 잠시 벗었던 가면을 썼다.

그런 뒤 여전히 혈왕을 씹는 데 열중하고 있는 유저 둘을 지나쳐 모험가 길드를 나섰다.

“근데 그건 봤냐? 결투 영상 말고 요즘 올라오는 하이라이트 영상.”

“다누미네 계곡 미공개 영상 차례차례 공개되는 거? 당연히 봤지. 진짜 미쳤더라.”

두 유저는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 도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 * *

7급 모험가 승급을 위해 거치는 사냥 퀘스트는 매우 무난했다.

이동을 포함해도 걸린 시간이 12시간이 조금 넘었으니, 지금까지 겪은 ‘억까’에 비하면 정말 선녀였다.

하지만 이것만 무난해선 곤란했다. 7급 모험가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개의 퀘스트를 더 깨야 했다.

“7급 모험가 승급을 위해선 최종적으로 그에 준하는 의뢰 하나를 완수하셔야 합니다.”

그래, 안다.

9급 때는 상단 호위를 하느라, 8급 때는 산적 소탕을 하느라 며칠씩 허비해야 했었다.

특히 ‘산적 소탕’ 때 산적 놈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숨어 버리는 바람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도진이었다.

‘이번엔 제발 빨리 끝낼 수 있는 걸로. 제발요, 제발!’

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도진.

“모험가님께서 해결하셔야 할 의뢰는…….”

그 기도가 통한 것일까.

“리히트 백작 가문에서 의뢰한 호위 임무가 배정됐네요. 호위 일정은 내일 하루. 아카데미에서 실시하는 야외 실습 과정 동안 리히트 백작 가문의 차남, 빌 리히트 영식을 호위해 주시면 됩니다.”

하루면 끝낼 수 있는 퀘스트가 뽑혔다.

‘좋았어.’

속으로 좋아하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도진.

그런 그를 보며 여직원도 방긋 웃었다.

“축하드려요. 다행히 호위 임무 중에선 가장 안전한 임무가 배정됐네요. 호위 장소가 아카데미에서 관리하는 실습 장소인데 별일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여직원 말대로 아카데미 학생 호위면 날로 먹는 퀘스트가 맞았다.

‘안전 관리는 아카데미에서 알아서 할 거고. 가서 시간만 죽이면 알아서 퀘스트 완료되겠네.’

그래, 오랜만에 좀 쉬자.

도진은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퀘스트를 수행하기로 했다.

* * *

엘메 강 유역에 있는 항구 도시 드리스겐.

그곳에서 도진은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강줄기를 타고 커다란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배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엔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무리도 있었다.

[빌 리히트 님]

도진은 커다란 종이에 호위 대상 이름을 적어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년 하나가 도진에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이번에 절 호위해 주실 모험가님이신가요……?”

도진이 품은 소년에 대한 첫인상 이랬다.

‘이거 귀족 맞아?’

지나치게 유약해 보이는 소년은 귀족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호위 대상이 싸가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어차피 오늘 하루 보고 말 NPC.

무난하게 대충 맞춰 주면 될 일.

“네. 리히트 백작님의 의뢰로 오늘 하루 야외 실습이 끌날 때까지 빌 리히트 님을 호위하게 된 도진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빌 리히트라고 합니다.”

도진의 인사에, 빌 리히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이건 이상한데.’

백작 가문 차남이 고개를 숙여?

도진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그건 또 뭐야? 새로 구한 애완견이니?”

싸가지가 결여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황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다.

빌은 소녀를 보더니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 제니아 님…….”

그런 빌을 향해 소녀가 눈을 부라렸다.

“내가 물었잖아? 네 뒤에 있는 그건 뭐냐니까?”

“저, 저희 아버님께서…….”

“흐응… 사생아도 자식은 자식이라는 건가? 대리 결투에 패배해서 입원해 있는 호위 대신 새로운 걸 붙여 준 모양이네?”

소녀의 목소리나 말투는 물론 눈빛과 표정에선 냉기가 풀풀 풍겼다.

도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래, 저게 귀족이지.’

싸가지가 선천적으로 결여된 진짜 귀족.

도진은 신께 감사했다.

호위 대상이 저게 아니라는 사실에 말이다.

‘진짜 저런 걸 지키라고 했으면 그냥 7급 모험가 안 하고 말지.’

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제니아라 불린 소녀 뒤쪽에서 여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아가씨, 제가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책망하는 투로 말하려던 여기사는 빌을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묵례를 했다.

‘저 여자는 좀 정상이네.’

딱히 할 게 없었기에, 도진은 소년, 소녀 그리고 여기사 세 명의 관계도를 상상해 봤다.

일단 자신이 지켜야 하는 이 유약하다 못해 매가리가 없는 놈은 백작 가문 사생아.

저기 싸가지 없는 제니아라는 여자애는 적어도 백작 가문 이상 가는 명문가 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빌은 저 싸가지한테 밉보인 거 같다.

그러다 대리 결투에 휘말려 빌의 호위 기사가 침대 신세가 됐을 거고.

‘그 호위를 박살 낸 게 저 기사 누나. 이러면 딱 아귀가 들어맞긴 하네.’

이거 꽤 흥미진진한 인간관곈데.

도진이 팝콘 들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인간관계를 분석할 때였다.

“마음에 안 들어. 안나, 저것도 부숴 줘.”

제니아가 도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불똥을 튀겼다.

뭐?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전개야.

숨만 쉬다가 퀘스트 완료하고 갈 생각이던 도진은 난데없는 날벼락에 어이가 없었다.

“안 됩니다.”

하나 다행히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진 않았다.

“뭐라고? 지금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야?”

“이번에는 떼쓰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번엔 리히트 영식이 아가씨께 실례를 범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지 않습니까.”

조목조목 맞는 말로 패는 안나.

제니아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아가씨.”

그러나 안나가 엄한 어조로 이름을 부르자 더 이상 싸우라고 강요하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들어! 안나, 10걸음, 아니 20걸음 뒤에서 따라와!”

휙 하고 몸을 돌린 제니아가 쿵쿵 걸음을 옮겼다.

말라깽이 주제에 쿵쿵거린다고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그런 그녀를 보고 한숨을 내쉰 안나는 빌에게 사과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리히트 영식.”

“…아닙니다.”

“당신께도 실례를 범했군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정중하나 비굴하지 않은 사과를 남긴 안나는 제 주인이 앞서가는 걸 잠시 기다리더니 절도 있는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설마 저거 진짜 20걸음 딱 맞춰서 걷는 거야?’

상전이나 부하나 이상한 사람들이네.

생각하며, 도진은 마법회로에 장전했던 마법을 흩어 버렸다.

“…….”

그러고는 우울한 눈으로 바닥만 바라보는 리히트 가문의 사생아에게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넸다.

“하루 보고 말 사이에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아카데미 생활이 앞으로도 순탄하진 않아 보이네요.”

“흐흑…….”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빌이 울기 시작했다.

주변 아카데미 학생들은 그런 빌을 무슨 돌멩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이거 완전 유령 취급이네.’

도진은 빌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중요한 건 당장 궁금한 걸 해결하는 거였다.

“그런데 방금 그 싸가… 음, 그분은 누구예요?”

하마터면 본심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들 널려 있는 곳에서 귀족보고 싸가지니 미친년이니 하면 부작용이 생길 여지가 있다.

“…제니아 본드레이 님이십니다. 본드레이 공작 가문의 영애시죠.”

“예?”

뭐라고? 공작 영애?

그것도 미친 개또라이 뮤이 본드레이 딸?

“너 진짜 좆 됐구나?”

아, 나왔다. 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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