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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03화 (104/271)

103

마법사는 가깝게 느끼고, 전사에겐 멀게 느껴질 애매한 간격에서 결투는 시작됐다.

혈왕은 결투 시작과 동시에 저돌적으로 돌격했다.

평소 주로 사용하는 대검 대신 착용한 타워 실드를 앞세운 전형적인 거리 좁히기.

도진은 침착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견제와 공격을 겸하는 전격 마법이 빠르게 캐스팅되어 혈왕을 노린다.

파지직!

하지만 아주 잠깐 몸이 굳을 뿐 감전 효과 같은 건 없었다.

‘나한테 맞춰서 장비 세팅을 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

혈왕은 마법 방어와 속성 저항 장비 위주로 세팅을 해 놓은 상태.

도진의 화력이 워낙 세기에 딜은 무시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버티며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둘 사이에 놓인 공간이 순식간에 좁아진다.

이에 도진은 아네모네를 동원했다.

‘아네모네!’

도진의 의지에 반응하여 아네모네가 혈왕을 향해 쏘아지듯 달려든다.

“흥, 어림없지!”

혈왕은 예상했다는 듯 달려드는 아네모네를 향해 타워 실드를 휘둘렀다.

거의 혈왕의 전신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방패는 아네모네의 앞발 공격과 물어 뜯기를 완벽하게 방어해 냈다.

아네모네의 공격을 한차례 막아 낸 혈왕은 온몸의 체중을 방패에 실어 아네모네의 머리에 충격을 가했다.

한 동작처럼 보이지만, 혈왕의 공격은 「방패 치기」와 「방패 충격」의 연계기였다.

【윽……!】

이에 아네모네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뇌진탕에 걸린 것.

《화염창》

그사이 새로운 마법이 혈왕을 향해 날아왔으나.

“으아아!”

혈왕은 그것마저도 방패에 몸을 숨긴 채 뚫어 버렸다.

그러면서.

《혈기 속박》

아네모네에게 직업 전용 스킬도 넣었다.

이미 무력화된 적에게만 쓸 수 있다는 제한도 있고, HP가 지속적으로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꽤 길게 하나의 적을 묶어 둘 수 있었다.

‘이걸로 저 늑대는 잠시 동안 못 움직인다! 저놈만 빠르게 처리하면 이 싸움, 내가 이긴다.’

도진은 분명 엄청난 개새끼다.

하지만 그렇다고 극복 불가능한 존재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괴물 같은 새끼라고 해도 결국 마법사는 마법사. 가까이서 제대로 한 방만 먹이면 죽을 때까지 패는 건 일도 아냐!’

제대로 된 콤보 한 방이면 골로 가는 게 마법사다.

길드원 중 아무도 그걸 못 해서 이 지경이 됐지만, 지금 해내면 될 일.

《방패 치기》

‘닿는다!’

그간 쌓인 원념을 담아,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스킬을 시전하는 혈왕.

그는 방패에 닿은 손과 어깨의 감각에 집중했다.

적에게 방패가 닿는 순간 연계할 스킬을 준비하며.

하지만.

퉁.

느껴진 건 타격이 주는 통쾌한 손맛이 아니었다.

《염동》

도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방패를 향해 염동파를 날려 그 반동으로 타격 범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것이었다.

‘방패 스킬 연계는 너무 올드한 콤보거든.’

방패 드는 클래스는 다 쓸 수 있는 이 연계기는 수많은 유저를 골로 보낸 기술이다.

쓰기 쉽고, 효과는 확실하고.

안 쓰면 바보인 그런 기술.

그런데 그런 기술에 대한 대처법이 연구가 안 됐을까?

‘고인물 상대로 정직하게 방패 내밀었으면 맞아야지.’

정직하게 맞붙는 PVP는 턴제 싸움이다.

하나의 턴을 소모하면 상대에게 하나의 턴이 넘어가는 식.

혈왕이 헛방을 쳤으니, 이젠 도진 차례였다.

《얼음창》

대각선 각도에서 빗겨 들어간 「얼음창」이 혈왕의 어깨에 적중했다.

그러자 혈왕이 잠깐 몸을 움찔했다.

“이딴 공격은 나한테 소용없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동작이 조금이나마 느려진 게 눈에 띄었다.

‘이쪽은 투자를 덜했군.’

장비 전부는 S급으로 맞춘다 해도 올릴 수 있는 스탯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덜 투자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감전에 대한 대처는 열심히 한 모양이지만, 냉기 쪽은 충분히 뚫어 낼 만해 보였다.

“죽어!”

하지만 취약점 하나를 알아냈다 해도 당장은 혈왕의 공격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바짝 달라붙으며 검을 들어 올리는 혈왕.

‘이렇게 아예 딱 달라붙을 때 혈왕이 주로 노리는 건…….’

「자루치기」에서 이어지는 「혈검술」.

도진은 머리를 틀었다.

퍽.

머리에 적중됐어야 할 혈왕의 폼멜 찍기가 도진의 어깨를 강타했다.

통증과 피해가 동시에 일어났으나, 「자루치기」는 뇌진탕을 노리는 공격.

머리에 맞지 않으면 큰 피해는 없는 스킬이다.

“이익!”

스킬 연계를 시작부터 실패했으면 깔끔하게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혈왕은 그러지 못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혈검술-찌르기」를 시도한다.

‘멍청한 놈. 실수는 한 번만 해도 치명적인데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서 더 큰 실수를 질러?’

《화염구》

퍼엉!

공격을 하기 위해 몸을 노출한 혈왕의 가슴팍에서 폭발이 일었다.

혈왕의 자세가 무너지며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아네모네, 물어!”

도진이 외쳤다.

이에 혈왕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뒤쪽을 향한다.

‘설마 이 정도 공격을 당했다고 「혈기 속박」이 풀릴 리가-’

없었다.

여전히 아네모네는 붉은 기운에 휩싸여 버둥대고 있었다.

그녀의 저항이 워낙 거칠어 HP가 적잖이 소모되는 중이긴 해도 속박은 견고했다.

“이 씹-”

새끼가 날 속여?

분노에 찬 혈왕이 다시 도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얼음 구체》

그보다는 도진의 마법이 완성되는 게 빨랐다.

혈왕 앞에 지속적으로 냉기를 분출하는 구체가 생성됐다.

강한 추위가 느껴지는 동시에 냉기에 노출된 몸뚱이가 느릿느릿해졌다.

이에, 열왕은 뇌가 익는 것 같은 열감을 느꼈다.

“이 비겁한 새끼!”

추워 죽겠는데 머리통은 열이 뻗쳐서 미칠 거 같은 기분.

혈왕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전진하려 했다.

하지만 도진은 「얼음 구체」를 조작해 계속해서 혈왕을 따라다니게끔 만들었다.

누적되는 냉기의 양에 따라 혈왕은 더욱 느려졌다.

“이런 시발!”

욕설을 뱉으며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혈검술-베기」를 시전하는 혈왕.

구체부터 파괴하려는 시도는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다만 도진도 그가 구체에 대응하는 사이 새로운 마법을 시전하는, 더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는 게 문제였다.

《착취의 쐐기》

대공의 고유 마법이 혈왕에게 꽂혔다.

“이게 무슨……!”

혈왕은 빠져나가는 피가 확 늘어난 것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거칠게 저항하는 아네모네를 묶어 두는 데 소모되는 생명력과 「착취의 쐐기」에 강탈당하는 생명력까지 더해지니 무시할 수 없는 피가 초 단위로 새어 나간다.

‘저 새낀 어떻게 마공이 저렇게 높은 거지? 마방을 이렇게 올려놨는데도 피가 이것밖에 안 남다니…….’

탱커 스탠스인 「혈기 응축」을 켰음에도 혈왕의 생명력은 벌써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태였다.

‘더 끌리면 안 된다. 여기서 시간이 더 지체되면…….’

무조건 진다.

조급해진 혈왕은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기로 했다.

‘CC기도 필요 없다. 한 방에 보내 버리면 그만이야!’

거리를 좁힌 뒤 딜러 스탠스로 전환해서 딜로 찍어 누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혈왕의 생각을, 도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이쯤 몰아붙였으면 나올 때 됐지.’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도진은 「바람 화살」을 쐈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혈왕을 스쳐 지나갔다.

“이젠 대놓고 달려드는 적도 못 맞추는구나!”

도진을 조롱하며 혈왕이 스탠스를 전환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혈왕은 불길함을 느꼈다.

‘왜 웃고 있지?’

도진이 위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여서였다.

콱-!

“커어-”

불길함의 이유는 최악의 형태로 밝혀졌다.

도진을 향해 검을 내지르려던 혈왕의 목덜미를 커다란 늑대가 물어 버린 것이었다.

‘어, 어떻게?’

시전자의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갉아먹는다는 페널티를 안고 있기에 「혈기 속박」은 웬만해선 풀리지 않는다.

묶어 놓은 대상을 공격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혈왕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실수란 걸 한 적 없는 도진이 처음으로 조준을 제대로 못 했던 마법이 떠오른 것이었다.

자신의 옆으로 휙 스쳐 지나갔던 바람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괴물 같은 놈!’

그것마저 노린 거였나.

도진의 노림수를 깨달은 혈왕은 재빠르게 검을 뒤쪽으로 찔렀다.

아네모네라도 떨쳐 내려는 발버둥.

【흥! 그런 느려 터진 공격에 당해 줄 거 같아?】

하지만 아네모네는 여유롭게 몸을 빼냈다.

대신 그녀가 비운 자리를 도진의 공격이 채웠다.

퍼퍼펑.

연속으로 꽂힌 「화염구」 세례에 혈왕이 이리저리 비틀대다가 바닥을 굴렀다.

“끄으윽…….”

마법 방어력을 올릴 수 있는 만큼 끌어올렸지만, 그만큼 도진의 마법 공격력도 엄청났다.

지금까지 쌓인 피해는 그를 빈사 상태로 몰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지금은 탱커가 아닌 딜러 스탠스.

혈기사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클래스라지만,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진 못했다.

“아직 안 죽었지?”

멀게 들리는 도진의 목소리에, 혈왕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다 바닥에 쿵- 하고 다시 쓰러졌다.

“으윽.”

아네모네가 앞발로 그를 바닥에 찍어 버린 것.

혈왕은 억지로 고개를 돌려 도진을 노려보려 했다.

그러나 도진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봐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이쪽이야.”

발로 걷어차듯 밟아 시선을 교정해 주는 도진.

그렇게 혈왕이 바라본 건 자신이 흘린 피와 침으로 더러워진 땅바닥이었다.

하베르칸 레이드 당시 했던 약속이 지켜지는 순간이었다.

“시발……!”

앙다문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욕설을 마지막으로.

“약속은 지켰다.”

결투의 막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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