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02화 (10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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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를 위해선 정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같은 세부적인 조건이 그것이다.

이 중 ‘누가’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낭인 길드가 다누미네 계곡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상황이다.

유혈 길드 쪽에서 나올 대표는 혈왕 말고는 없었다.

도진 쪽은 애초에 도진 혼자밖에 없고.

그럼 ‘언제, 어디서, 어떻게’가 남는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당연히 불리한 싸움을 해 왔고, 혼자라는 페널티를 안고 있는 도진이 나머지 조건을 제시할 거라고.

하지만 도진은 그러지 않았다.

[시간, 장소, 방식은 그쪽에서 정해.]

자신의 채널에 올린 짤막한 글.

막말로 유혈에서 작정하고 결투를 뒤집고 단체로 달려들면 죽음이 확정될 상황이 아닌가.

일기토를 위해 적 진영 한가운데로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도진의 태도는 안 그래도 주인공 포지션을 잡은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

하나 언뜻 무모해 보이는 도진의 행동에는 다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안전하게 가고 싶어서 이것저것 조건 따지면 모양이 안 살지.’

멋지기로 했으면 끝까지 멋져야 하는 법이다.

거기다 아무리 병신인 혈왕이라지만, 이 정도로 어그로가 잔뜩 끌린 판에서 대놓고 길드원을 동원해서 공격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할 것이었다.

‘해도 상관없고.’

물론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원래 미친놈이 더 미쳐서 막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돌아가도 도진이 잃는 게 크진 않았다.

어차피 유물 장비는 죽는다고 해서 잃어버리지 않는다.

나머지는 잃어버리면 돈으로 사면 되는 것들이고.

반면 그런 짓을 했다간 혈왕은 완전 끝장이다.

‘그렇게까지 사회적 자살이 하고 싶다면 한 번쯤 죽어 주지, 뭐.’

쿨하고 멋진 척은 혼자 다 하고.

적한테는 가불기 걸어 버리고.

이런 게 바로 훌륭한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 *

결투는 사흘 뒤로 정해졌다.

장소는 다누미네 계곡 상류의 어느 지점.

방식은 물을 것도 없이 누군가 죽는 순간까지 싸우는 것으로.

결투를 기다리며 도진은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마지막은 메타기어라는 회사입니다. 여기도 가상현실 기기를 제작하는 회사예요. 급으로 따지면 하이엔드를 표방하긴 하는데 업력 자체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여기는 이번에는 물론이고 지속적으로 장비 협찬 등을 하고 싶다는 입장이에요.”

결투 당일 켜질 방송에 협찬과 광고를 하고 싶다는 곳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특히 가상현실 접속에 필수적인 캡슐 회사가 가장 공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캡슐 관련된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회사 입장에선 겜돌이 수십만, 어쩌면 백만 단위로 몰릴 방송이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

“광고비가 얼마라고요?”

“그 부분은 광고 방식이나 협찬 기간 등을 고려해 조정을 해야겠지만, 30억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간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직접 찾아온 마케팅 팀장의 말에 도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화면 구석에 회사 로고 좀 박는 비용이 30억이라고?’

얼떨떨함이 드러나는 도진의 표정을 본 마케팅 팀장이 하하 웃었다.

“도진 씨 구독자가 벌써 1,500만을 넘긴 것도 있고, 이번에 판이 너무 커진 것도 영향이 커서 그렇습니다. 아니, 커진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자극적인 맛이 엄청나게 판을 잘 짰다고 해야 하나? 광고란 게 그렇거든요.”

주 타깃의 관심사와 구매력이 광고하려는 상품과 딱 매치 될 때 가격이 뛰는데.

“이번이 딱 그런 경우죠. 게다가 도진 씨 이미지가 워낙 게임을 잘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가상현실 게이밍 기어 회사 입장에선 침을 흘릴 수밖에요.”

아마 이 광고 성사시키는 회사 담당자는 승진 확정일 겁니다. 말을 마치고는 빙긋 웃는 마케팅 팀장.

그러면서 손으로는 얼른 골라 보라는 듯이 앞에 놓인 서류를 가리켰다.

청궁, 스즈메, 블루스미스, 루비아이, 메타기어.

최종 후보에 오른 다섯 곳 중 도진은 메타기어를 골랐다.

“여기로 할게요.”

왜냐면, 나머지 회사 4개는 나중에 다 망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블루스미스와 스즈메는 기기 성능을 속인 게 들통 나서 망했고, 루비아이는 경영진의 비리로 망했다.

청궁은 캡슐이 폭발해서 망했고.

반면 메타기어는 성장을 거듭해 15년 후에는 하이엔드 캡슐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회사였다.

‘단점은 비싼 가격뿐이다, 가 메타기어 캡슐 평가였었지.’

이는 곧 광고를 해도 이미지에 금이 가거나 할 일이 없다는 뜻.

마케팅 팀장은 군말 없이 도진이 고른 서류를 받아들었다.

“약속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속이요?”

“예전에 콘텐츠 활동 하나, 광고 하나 하겠다고 하셨던 약속이요.”

아.

유물 상자 까기 전에 좋은 일 해 둔다고 질렀던 약속.

솔직히 잊고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약속을 훌륭히 지킨 셈이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요?”

도진의 물음에 마케팅 팀장 김영희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더할 나위 없이요.”

혈왕을 제외하면,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 * *

[18:59:52]

시간을 띄워 두고 있던 도진은 19시가 되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이제 시작인가.”

19시는 방송 시작 예약을 걸어 둔 시간이다.

집중을 위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해 뒀으나, 밖에서 어련히 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는 자신의 모든 게 수많은 사람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할 필요가 있었다.

‘방송 시작하고 30초 정도는 내 얼굴부터 보여 준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뭐 어떻게 각도라도 잡아야 하나? 생각하던 도진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하자. 안 하던 짓 하면 오히려 더 바보처럼 보여.’

편하게. 편하게 하면 돼.

속으로 읊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래쪽으로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중앙에 모여 있는 험악한 놈들은 유혈 길드원들.

거기서도 가운데서 무게 잡고 있는 혈왕이 눈에 띈다.

멀찍이서 여기저기 기웃대는 무리는 결투를 직관하겠다고 몰려든 유저들일 터였다.

【진.】

아네모네가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부른다.

적만 수백 명인 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자신이 걱정되는 거겠지.

도진은 옆으로 다가온 아네모네의 목을 쓸었다.

전혀 겁을 먹지 않은 도진의 상태가 그녀에게 전해졌다.

이에 안심하는 아네모네.

“가자.”

【응.】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아네모네는 도진을 등에 태우고 가파른 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도진을 발견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정면에 위치한 유혈 길드 쪽에선 노골적인 적의가 확 풍겨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춘 아네모네는 도진을 노려보는 것들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런 아네모네의 등에서 내려서며 도진이 혈왕에게 말했다.

“피차 얼굴 맞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만들 사이도 아니니 바로 시작할까?”

이에 혈왕이 이를 갈았다.

“너에게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이제 와서?”

“그래. 물론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네 자유다.”

또 무슨 수작이지? 도진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말해 봐.”

일단 들어나 보자. 네가 생각해 낸 탈출구, 아니 쥐구멍이 뭔지.

“이런 결투 한 번으로 시시하게 마무리하기엔 나와 네놈 사이에 쌓인 게 많잖아? 그러니 화끈하게 가자고. 이번에 패배한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걸로. 어때?”

그런데 도진의 예상과 달리 혈왕은 도망칠 구석을 마련한 게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뒤를 생각 않고, 배수의 진을 쳤다.

유구한 전통을 지닌 그것. ‘캐삭빵’을 제안한 것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이건가? 하긴 여기서 지면 쪽팔려서라도 게임 못 하지.’

실제로 혈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지면 자신은 끝장이다.

그런데 도진은 지더라도 조금 타격을 입을 뿐이다.

억울해서라도 도진을 완전히 끝장내고 싶었던 혈왕은 아예 뒤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저 새낀 내가 죽어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결의를 다지는 혈왕.

그를 보며 도진은 잠시 생각했다.

‘혈왕이 병신 같긴 해도 세긴 했어.’

지금이야 저렇게 빌빌대지만, 전생의 혈왕은 랭킹 100위권에서 놀던 하이랭커였다.

PVP 쪽에서도 꽤 이름을 날렸던 유저였다.

무엇보다 일대일 대인전에서 놈의 직업 ‘혈기사’는 사기적인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

하지만.

‘저 새끼가 어떻게 싸울지 나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걸.’

전생에도 악연으로 얽혀 있던 사이가 아닌가.

도진은 언젠가 복수의 때가 오길 갈망하며 혈왕에 대해 열심히 분석했었다.

그래서 혈왕이 마법사를 상대로, 소환수를 다루는 적을 상대로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엔 전투 스타일을 아무리 분석해도 널 넘어설 길이 안 보였지. 그만큼 격차가 벌어져 있었고, 난 결함으로 가득한 불량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근데 이젠 아냐. 난 결함 가득한 마법사가 아니고, 모든 면에서 너보다 위에 서 있다.

‘넌 여전히 비겁하겠지만.’

그런 비겁함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이 너와 나 사이에 있거든.

도진은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걸로 되겠어?”

이왕 하는 거.

“꼬리 말고 도망가는 놈이 가진 거 전부 토해 내고 가는 걸로 하자고. 지는 놈은 장비 다 벗고 알몸으로 꺼지는 거야. 어때?”

혈왕의 얼굴이 굳었다.

도진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은 그도 몰랐던 것이다.

‘좆 같은 새끼가 날 아주 호구로 보고 있구나.’

하나 혈왕도 나름 자신이 있었다.

도진에게 당한 건 병신 같은 길드원들이지 자신이 아니다.

자신도 나름 히든 클래스를 가졌고, 고레벨 유저다.

장비 세팅도 억 소리가 나오는 장비를 온몸에 두르고 있고, 이는 대마법사전을 상정하여 세팅한 장비였다.

‘이길 수 있다. 아니, 무조건 이겨서 저 새끼가 가진 걸 전부 빼앗고 만다.’

지금까지 공개된, 도진이 해결한 히든 퀘스트만 생각해도 그가 걸친 장비는 돈 주고도 못 구할 게 많을 터.

혈왕의 마음속에서 물욕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그가 가진 도진에 대한 복수심과 맞물려 아주 흉악하게 변해 갔다.

“좋다. 이기는 쪽은 모든 걸 갖고, 지는 쪽은 모든 걸 잃는 싸움. 화끈해서 좋아.”

도진과 혈왕이 서로의 제안을 서로가 받아들였다.

말 그대로 모든 게 걸린 결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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