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01화 (102/271)

101

혈왕은 급히 로그아웃 했다.

사망 페널티로 접속이 제한된 길드원들로부터 다급한 메시지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LOST 내에선 제한적인 메시지 확인만 가능하기에,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로그아웃 한 것.

캡슐에서 뛰쳐나온 혈왕은 황급히 태블릿 PC부터 찾았다. 그런 뒤 길드원으로부터 온 메시지에 적힌 도메인을 누르자…….

[“크아악!”]

실시간 방송 중인 도진의 채널로 연결됐다.

처음 들린 소리는 누군가가 감전되어 지르는 비명.

문제는 비명 지르는 이의 목소리와 얼굴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혈 길드원이었다.

-ㅋㅋㅋㅋ 진짜 유혈 새끼들 뭐임?

-돈 발라서 장비랑 레벨만 갖추면 뭐 함? 법사 하나 못 잡아서 개발리는데 ㅋ

-낭인은 뭐 하는 듣보잡이냐? 일본 길드라며.

-유혈 길드가 쟤들이랑 편 먹은 듯? 로트라넷 검색해 보니까 쟤들도 비매너랑 PK로 몇 번 구설수 오른 길드임.

-끼리끼리 놀고 자빠졌네 ㅋㅋ 아니지. 끼리끼리 죽어 나자빠지는 건가? ㅎㅎ

채팅창은 유혈 길드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했다.

-근데 마법사 뭐 이렇게 사기냐? 적이 5명인 데도 존나 쉽게 처리하네.

-마법사가 사기인 게 아님. 저 사람이 미친 거지. 거리 조절, 엄폐물 활용, 소환수 활용까지 진짜 말이 안 나오는 수준이잖아.

-그것도 그건데 먼저 발견해서 먼저 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게 예술이야. 전투 시작부터 법사한테 껄끄러운 클래스 하나나 둘은 무조건 자르고 시작하는 거 보셈.

-평균 레벨의 함정도 있긴 해. 도진 저 사람은 최상위권 레벨일 텐데, 저기 픽픽 눕는 애들은 상대적으로 레벨도 좀 낮고 스펙도 딸릴 테니까. 근데 그거 감안해도 물몸 법사로 저런 플레이를 하는 건 말이 안 되긴 함.

유혈 길드에 대한 조롱이 아닌 채팅은 하나같이 도진에 대한 감탄과 칭찬뿐이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레벨 차이, 템 차이, 소환수 차이, 무슨 차이를 갖다 댄다 해도 마법사 혼자서 4~5인 파티를 신나게 격파하고 돌아다니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으니.

“…시발, 시발, 씨바아아아알!”

콰직.

혈왕은 태블릿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산 지 한 달 된 혈왕의 태블릿의 액정이 쫙 갈라지며 화면이 모자이크처럼 변했다.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주먹을 꽉 쥐며 혈왕은 현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도진에게 복수함은 물론 이번 일을 계기로 유혈 길드의 이미지를 재고하여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복수도 완성하지 못했고, 길드의 이미지는 더 나빠질 구석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병신들 ㅋ

모자이크 조각처럼 변한 화면에 비친 채팅 하나.

그것이 비수가 되어 혈왕의 가슴에 꽂혔다.

‘병신 새끼들……! 저 새끼 하날 못 잡아서 이 사달을 내?’

암담한 상황에 혈왕은 모든 게 원망스러워졌다.

이런 상황을 만든 주범인 도진은 말할 것도 없이, 낭인 길드는 물론 자신의 길드원들까지.

‘내가 지들한테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그래도 일단 다시 접속하자.

이제라도 저 빌어먹을 새끼를 잡아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니.

‘방송을 켰다는 건 여러 정보가 노출된다는 얘기다. 오히려 추적하는 건 더 쉬워진다는 소리지.’

그렇게 생각하며 캡슐에 드러눕는 혈왕.

그때였다.

[“오늘은 방송 여기까지만 할게요. 짧은 간격으로 두 번이나 싸웠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이쯤 됐으면 유혈이랑 낭인 쪽에서 방송 보고 눈 뒤집혀서 달려들 타이밍인 거 같으니까.”]

뭐라고?

캡슐에 눕다 말고 벌떡 일어난 혈왕은 노이즈 섞인 소리를 뱉는 부서진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뭐라고 해도 전 방송 끄고 쉬러 갈 겁니다. 지금 상태로 계속 방송하라는 건 저한테 죽으란 얘기잖아요.”]

계속 방송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시청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도진이 작별 인사를 고했다.

[“전 저녁 먹으러 갑니다. 여러분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도진은 정말 방송을 껐다.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방플을 통해 도진이 부리는 수작을 간파하고, 그를 잡아 죽이려던 혈왕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크아아아!”

격분한 혈왕은 태블릿으로 벽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콰직!

태블릿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수리하는 것보다는 새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은 몰골이 되었다.

잠시 후 게임에 접속한 혈왕은 분노 가득 담긴 외침으로 지시했다.

“무조건 찾아! 어떻게든 찾아서 잡아 족쳐!”

“기, 길드장님, 어차피 지금 수색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밖에 있는 길드원이 타깃이 방송 종료하고 밥 먹으러 갔다고-”

콱.

말하는 길드원의 멱살을 낚아챈 혈왕이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나도 보고 왔어. 실시간으로 그 새끼가 개소리 지껄이는 거 보고 왔다고. 근데 그게 뭐? 방송 끄고 밥 먹으러 갔다고? 그걸 믿냐, 지금?”

그 새끼를 믿냐고! 하고 일갈하는 혈왕.

결과적으로 혈왕의 생각은 적중했다.

방송 종료하고 쉬러 간다던 도진은 추가로 유혈 파티 하나, 낭인 파티 하나를 더 찾아내 격파했다.

그런 뒤 도진은 정말로 쉬러 갔지만.

“어딘가 숨어 있어. 파티 간의 간격 더 좁혀서 그물망처럼 철저하게 훑으면서 지역 장악해. 무조건 잡는다. 무조건.”

도진이 접속을 끊었는지,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은 쉬지 못했다.

* * *

도진은 정말 집요하게 적을 괴롭혔다.

몰래 접속해서 파티 하나를 전멸시키고 그대로 접속을 종료한다든지.

습격 직전 방송을 켜서 조롱거리를 만든 뒤 홀연히 잠적한다든지.

3시간 간격으로 툭툭 건드려서 쫓는 입장에서 신경만 날카로워지게 만든다든지.

아니, 유혈 길드와 낭인 길드는 이제 자신들이 도진을 쫓고 있는 건지조차 헷갈렸다.

“…길드원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길드장님, 이제라도 작전을 중지하는 게…….”

슬슬 길드원들 사이에서 작전 중지에 대한 말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상실한 혈왕은 듣지 않았다.

“개소리하지 마! 이렇게까지 하고 꼬리 말고 도망가면? 그러면 진짜 이미지고 뭐고 다 끝장이라고!”

‘더 망가질 이미지가 있는 거 같냐, 이 새끼야!’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름에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건 이번 작전을 수행하면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작전 중에 사망해서 잃어버리는 장비나 경험치, 이외에 기타 부수적 피해는 길드장인 내가 책임지고 보상하겠다. 그러니 걱정 말고 적을 척살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솔직히 이렇게까지 피해가 커진 마당에 저놈이 약속을 지킬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공유하고 있는 길드원 사이에서 기댈 곳이라곤 혈왕이 한 약속뿐이었다.

반대로, 운 좋게 도진을 마주치지 않았거나 계곡 내부로 투입되지 않은 인원 중에서 길드를 탈퇴하는 인원이 발생했다.

“우린 여기까지 하겠소. 아무래도 이 이상 길드원들에게 피해를 강요하긴 힘들 것 같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낭인 길드도 손절을 선언했다.

“지금 여기서 당신들이 빠지면? 계곡을 틀어막는 건 어떻게 하고, 안에 수색하는 인원은 또 어떻게 하란 말이오!”

활왕은 거칠게 항의했으나.

“그건 우리 알 바가 아니지.”

낭인 길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장 낭인 길드 인원이 빠지면 계곡 봉쇄부터 삐걱댈 게 자명하기에, 혈왕은 돈을 써서라도 붙잡고 싶었으나.

‘계획이 완전히 어긋났다. 일만 잘 풀렸으면 자금 융통이야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젠 이번에 발생한 피해 보상을 해 주는 것도 힘들 지경이야.’

돈이 없었다.

“그럼 건투를 빌지.”

결국 낭인 길드는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도진이 실시간 방송을 시작한 뒤로 낭인 길드 또한 욕을 엄청나게 먹고 있었다.

-저렇게 무능하다니. 재일이 분명하다!

-일본의 수치. 할복이나 해.

-일본 무사 컨셉을 잡았다고 해서 저들이 일본인이라는 보장은 없다.

-죽어.

이런 상황이니 낭인 길드도 존속을 유지할 수 없을 확률이 높았다.

이렇게, 도진을 적대하던 유혈 길드와 낭인 길드가 제풀에 지쳐 비틀거릴 때쯤.

[“내 생각엔 그쪽도 많이 지쳤을 거 같은데. 우리 이제 이 지겨운 싸움을 좀 끝내는 게 서로한테 좋지 않을까?”]

도진이 자신의 방송을 통해 하나의 제안을 해 왔다.

그건 바로.

[“그쪽에서 대표로 한 명, 이쪽에서 대표로 한 명. 대표로 나서서 일대일 결투로 승부를 내자.”]

전문용어로는 막고라라 불리는 일기토 제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