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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96화 (9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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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인사를 나눈 도진과 주강희는 서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게 됐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서로 얼굴 보기가 많이 힘드네요.”

“도진 씨가 많이 바빠서 그렇죠.”

“실장님도 만만치 않게 바쁘셨잖아요? 이번에 콜라보도 전부 실장님이 직접 진행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주강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피로함 반, 뿌듯함 반이 뒤섞인 미소였다.

“바쁘게 살아야죠. 그래야 할 이유가 있거든요.”

사연 있어 보이는 말에 도진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저런 표정으로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어설픈 말 한마디보다 차라리 이게 낫다.

적어도 도진이 경험한 바로는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서프라이즈 이벤트도 충분히 놀라운데 직접 깜짝 방문까지 하시고.”

“서프라이즈 이벤트 만족도를 직접 들어보려고 왔죠. 얼굴 보고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싶고.”

“고마운 건 제 쪽 아닌가요?”

주강희가 고개를 저었다.

“라엘 엔터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건 다른 회사도 해 줄 수 있는 거예요. 도진 씨라면 어딜 가도 이 정도 대우는 받았을 사람이고.”

주강희의 얼굴엔 생색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주강희는 이번 콜라보는 이 정도 해내는 게 당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향기 회장에게 칭찬을 받아 뿌듯한 감정과 별개로, 이런 조건과 재료가 주어진 상황에서 실패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철저한 능력주의에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김향기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강희가 당연한 일을 했다고 여기는 것과 별개로, 도진은 정말 회사가 일을 잘해 주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걸 못 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리고 제 기준에서 실장님이나 라엘은 ‘당연히’보다 좀 많이 잘해 주는 걸로 느껴지기도 하고. 평소에 제가 게임하기 편하게 배려해 주는 부분도 마음에 들고.”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이사하기 귀찮아서 그냥 살겠다는데 돈 써 가면서 더 좋은 숙소로 옮겨 주는 기획사가 몇이나 되겠어.

전생에 왜 라엘 엔터테인먼트가 호구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조건이 좋다고 소문이 났었는지 도진은 요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평소 느꼈던 점을 솔직하게 말하는 도진을 보는 주강희의 눈이 빛났다.

“그럼 우리 회사가 정말 많이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네요?”

도진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주강희가 꺼내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른 사람 같으면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어떻게 파고들지 고민했겠지만, 도진 씨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우리랑 계속 같이 가는 게 어때요?”

도진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계약 기간이 대충 6개월 남았나? 그 정도면 내 몸값이 더 올라가기엔 충분한 시간인데…….’

도진은 확신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가치가 쭉쭉 올라갈 거란 확신이.

조금 더 시간을 보낸 뒤 계약이 종료되기 직전에 재계약을 결정하면 훨씬 좋은 조건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회사에서도 오퍼가 들어올 테니, 그들과 라엘 엔터테인먼트가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끔 하면 거기서 더 좋아질 여지도 있겠지.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네.’

도진은 지난 6개월간 라엘 엔터테인먼트가, 주강희가, 천지현이 자신에게 해 준 것들을 떠올렸다.

라엘 엔터 그리고 주강희는 지금까지 도진을 귀찮게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정말 필수적인 일을 제외하면 도진이 완벽하게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상황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게 그대로 드러날 정도였다.

‘지현이 누나는 말할 것도 없지.’

천지현은 천성이 착하고 성실했다.

최고 나이 35살을 찍어 본 입장에서 22살인 천지현을 누나라고 부르는 게 어색했던 것도 옛 일이 됐고, 이젠 그녀는 정말 누나 같은 존재가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계약 때 어떻게 할지 고민하긴 했지만…….’

이젠 결론을 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좋아요. 계약하죠. 음, 이 경우에는 계약 연장이라고 하나요? 사회생활을 안 해 봐서 잘 모르겠네요.”

도진이 담백하게 말하자 주강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요?”

“재계약하자면서요. 뭘 그렇게 놀라요?”

“아니, 그렇게 쉽게 정할 줄은 몰랐죠. 미리미리 조건 조율하는 거부터 시작하자는 의미로 꺼낸 말인데 그렇게 쉽게 오케이 해 버리면 어떻게 해요?”

도진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는 주강희를 보며 생각했다.

‘…왜 화를 내는 거야?’

그런 그를 향해 주강희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요, 도진 씨가 갑이에요. 계약서상 명시하는 명목상으로만 갑인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갑이라고요. 이걸 이용할 줄 알아야죠. 조건부터 들어보겠다고 해야 한다고요.”

“전 지금이랑 똑같아도 괜찮은데요. 어차피 한번 갱신하면서 정산 비율도 좋아졌으니…….”

“계약이란 게 정산 비율이 다가 아니에요. 그게 제일 중요하긴 해도, 기획사가 얼마나 영업을 잘할 건지, 홍보에 얼마나 열심히 해 줄 건지, 그런 부분에서 성과가 안 나올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건지.”

아니,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이런 분야에 빠삭한 변호사를 고용해야죠. 돈 이제 꽤 벌잖아요. 앞으로는 더 벌 확률이 높고. 계약은 말이에요-

도진은 주강희의 일장연설을 정중히 한 귀로 담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이런 거 귀찮아서 그냥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그를 주강희가 뾰족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지금 귀찮다고 생각했죠.”

“…아뇨?”

“거짓말하지 마요. 티 다 나니까.”

…귀신이네. 멋쩍은 얼굴로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는 도진.

주강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저 지금 엄청 억울해요. 일주일을 고생해서 제시할 조건부터 계약서까지 다 준비하고, 협상 전략에 시뮬레이션에… 준비한 건 쓰게 해 줘야죠.”

“쓰면 되겠네요. 실장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더 좋은 조건일 테니까 그걸로 계약하죠. 두고 가면 변호사한테 보여 주든 제가 읽든 하고 연락할게요.”

“…진짜 얄밉다.”

“알았어요, 알았어. 조건이 뭔데요.”

주강희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계약 기간은 3년으로 잡았고, 이 집이 계약금이에요.”

“얼만데요?”

“35억. 세금 문제는 당연히 회사에서 해결.”

“와우.”

“좀 성의 있게 놀라 주면 안 돼요?”

아니, 이건 진짜 놀란 건데요. 도진은 억울함을 담아 말했으나 주강희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미 밉보인 자의 업보였다.

“도진 씨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회사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할 거예요. 아예 도진 씨 전담 팀을 따로 만들 거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들이는 노력 대비 성과가 무섭게 잘 나오는데 안 할 이유가 없는 거죠.”

주강희는 계속해서 제시하려 했던 조건을 늘어놨다.

도진이 듣기에도 하나하나 다 좋은 조건들이었다.

“어때요?”

말을 마친 주강희가 물었다.

도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나만 추가하죠.”

“얼마든지요. 적당히 무리한 거면 맞춰 줄게요.”

“저에 관한 거 말고, 지현이 누나한테 뭐가 좀 돌아갔으면 하는데요.”

주강희가 놀란 눈으로 도진을 보다, 곧 피식 웃었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인 걸 먼저 생각했어야 했는데.

주강희는 도진을 붙잡지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던 게 매우 억울해졌다.

“일단 천지현 씨는 이미 며칠 전에 회사에서 준비한 새 집으로 옮겼어요. 이 근처예요. 가까운 데 있어야 도진 씨 서포트하기가 더 편할 테니까. 월세는 전액 회사에서 지원할 예정이고요.”

뭐야, 이 누나. 이사했다는 말도 안 한 거야?

“승진은 적당한 시기에 처리할 거예요. 사원에서 대리로 쭉 올렸는데 또 올리면 본인도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연봉은 이미 조정했고.”

이 정도면 됐죠? 눈으로 묻는 주강희를 보며 도진은 ‘네.’ 하고 대답했다.

이래서 주강희 같은 사람이랑 일하는 게 좋다.

요구하기 전에 미리 처리해서 할 말 없게 만드는 저런 디테일.

라엘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도진은 새삼 생각했다.

* * *

바쁘고 바빴던 일들이 대부분 마무리됐다.

게임에서도 딱히 당장 급하게 달리거나 처리해야 할 일이 없는 시기.

아네모네와 호흡을 맞추는 거야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도 했고, 앞으로 꾸준히 함께 싸우다 보면 알아서 해결될 일.

해서, 도진은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었던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모험가 승급 퀘스트 좀 해야겠다.’

도진의 레벨은 이제 97이 됐다.

그런데 모험가 등급은 아직도 10급이었다.

이는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모험가 승급 퀘스트를 하나도 안 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몬스터를 많이 잡아 죽였고, 모험가 펜던트에 기록된 토벌 기록으로 보상도 열심히 받아먹은 덕에 기여도는 충분히 달성했지만.

게임이란 세계에선 ‘필수 퀘스트’를 해결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없는 벽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모험가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모험가 길드에 들어서자마자 10급 모험가 창구로 향한 도진은 펜던트를 내밀며 말했다.

“모험가 승급 임무를 받고 싶은데요.”

창구 직원이 친절한 눈웃음을 지으며 펜던트를 받아 들었다.

“네, 모험가 승급 퀘스트 말씀이시죠? 그런데 승급 퀘스트는 일정량 이상의 몬스터 토벌로 모험가 기여도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진행이 가능합니다. 일단 제가 그 부분부터 확인을 도와드릴게요.”

말을 하면서 손으로는 도진의 모험가 펜던트를 전용 단말기 위에 올렸다.

그러자 펜던트와 단말기가 반응하며 펜던트에 저장된 정보가 시각적으로 떠올랐다.

‘뭐, 뭐지? 10급 모험가 기여도 점수가 왜 이래?’

7급 모험가까지 다이렉트로 올라가도 될 만큼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기여도를 보며 직원은 속으로 경악했다.

혹시 오류라도 난 건가 싶어 단말기에 펜던트를 몇 번이나 다시 올려 보며 확인을 했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아무리 리제니안이라고 해도 이런 속도로 기여도를 쌓는 게 가능한가……?’

리제니안의 성장이 빠른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험가 길드에 등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이런 속도로?

직원은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놀랐다고 해서 일을 허투루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이런 뛰어난 모험가 앞에서는 더더욱.

‘이런 분이 계셔서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안전해질 수 있는 거야.’

평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던 직원은 한층 더 친절한 태도로 도진에게 펜던트를 돌려줬다.

“모험가님, 기여도를 보니 정말 많은 몬스터를 사냥하신 거 같네요. 승급 퀘스트 조건이 충분히 충족되셨습니다. 모험가님이라면 7급까지 승급이 가능하십니다.”

거기까지 말한 직원은 정말 죄송하다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험가 길드 규정상 중간 단계를 건너뛰는 승급은 불가능해서요. 9급 승급 퀘스트부터 차례대로 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직원은 매우 죄송한 표정이었으나 도진은 애초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모험가 승급은 총 3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는 기여도를 채워서 승급 조건을 갖추는 것이고, 2단계는 모험가 길드에서 지정하는 몬스터를 일정 마릿수 처치하는 퀘스트를 하는 것.

마지막 3단계는 모험가 길드에서 주는 승급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 승급 퀘스트가 어떤 게 될지는 랜덤으로, 그때그때 모험가가 필요한데다 파견을 보내는 식이었다.

‘벌써부터 귀찮네.’

미루고 미루던 일이라 그런지 막상 하게 되니 더더더 귀찮음이 느껴진다.

그러나 모험가 등급은 올려 둬야 했다.

게임에선 아무리 세고 강하고 쩔어도 이런 등급이 기준을 충족 못 하면 대우를 못 받는다.

하긴 이건 현실도 비슷하긴 했다.

“모험가님, 9급 모험가 승급을 위한 토벌 임무를 지정해 드리겠습니다. 모험가님께서 토벌해 주셔야 할 몬스터는 ‘긴 송곳니 오크’ 500마리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다 직원을 말을 들은 도진의 얼굴이 굳었다.

“네?”

왜냐면, 긴 이빨 오크는 개체수가 더럽게 없어서 500마리를 채우려면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9급 모험가 승급 퀘스트 중 최악에 해당하는 쓰레기 몬스터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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