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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바빴다.
게임만 하기도 바쁜 인생 현실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져서 너무 바빴다.
지금도 도진은 로그아웃을 하자마자 천지현에게 잡혀서 일을 하고 있었다.
ZIN
전문가가 만든 심플하면서도 디테일이 묻어나는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두 장.
이번에 도진 채널과 라엘 패션의 콜라보로 제작된 티셔츠였다.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 색상이 나왔고, 가격은 189,000원이었다.
요즘 물가 감안하고 고급 원단 감안하고 라엘 패션이 꽤 고급화 전략을 쓰는 브랜드임을 감안하… 아니, 그래도 비싼 거 같았다.
‘색상별로 2,500장씩 판다고 했었나?’
한정판이 어쩌고 하던데 찍어 낸 것도 안 팔리면 좀 그런데.
약간 걱정을 하면서도 도진은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고, 이를 알아들은 천지현은 샘플을 정리했다.
“이번엔 이거.”
“또?”
“저번에 얘기했잖아. 티셔츠 말고 반지랑 목걸이도 제작하기로 했다고. 이번에 샘플 나와서 같이 왔어.”
천지현이 반지 하나와 목걸이 하나를 꺼내서 도진 앞에 내려놨다.
티셔츠와 마찬가지로 도진의 이름을 딴 로고 ‘Z’가 음각된 심플한 디자인.
도진은 손으로 집어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이건 얼마야?”
“어… 반지가 389,000원이고, 목걸이는 489,000원.”
“뭐?”
그냥 반지구나, 하고 대충 살피던 도진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렇게 비싸냐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천지현이 웃었다.
“도진이 넌 게임 아이템에 억 단위 돈도 쓰는 애가 뭘 그렇게 놀라? 그냥 라엘에서 나오는 기존 제품이랑 엇비슷하게 맞춘 가격이야.”
게임 아이템이랑 비교해 버리니까 할 말이 없네.
“이건 몇 개 판다고 했지?”
“반지는 1,000개, 목걸이는 500개.”
이건 무조건 안 팔리겠네. 게임하는 놈들이 무슨 금반지에 금목걸이야.
그 돈이면 좀 더 보태서 좋은 악세 맞추는 게 낫지.
“알아서 하라고 해.”
“네, 네.”
안 팔리면 녹여서 다른 데 쓰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도진이었으나.
“아직 안 돼요, 안 돼.”
그런 도진의 어깨를 천지현이 잡아 눌렀다.
“왜 또?”
“이번엔 OST 확인해야 하거든. 특별편에 삽입할 노래 말야.”
일이 어쩌다 여기까지 커진 건지.
이게 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 시리즈가 지나치게 성공한 탓이었다.
1~6화만 해도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이후 추가로 공개된, 영상 자체를 새로 만들어 내다시피 한 ‘아네모네 시점으로 다시 보기’가 추가타를 제대로 날렸다.
도진 시점에서 6편, 아네모네 시점으로 다시 6편.
총 12개의 영상은 지금도 조회수를 가파르게 올리며 총합 조회수 1억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라엘 엔터테인먼트, 좀 더 정확히는 주강희는 물 들어온 김에 노를 젓다 못해 니트로 엔진 부스터를 달고 치고 나가려는 기세로 몰아치고 있었다.
OST로 쓰기 위해 사 온 곡 ‘숲’까지 확인을 마친 도진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차라리 사냥하는 게 더 편한 거 같아.”
“어련하시겠어요. 그래도 오늘 할 일은 끝났어.”
“앞으로는?”
“그건 나도 모르지. 원래는 티셔츠 정도만 확정됐었는데 반지에 목걸이에 OST까지 왔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건 그렇지.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회귀한 지 얼마 안 됐지만, 그 시간 동안 꽤나 충실하게 산 보람이 있었다.
도진은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건 안 팔려.’
그리고 이런 도진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도진의 굿즈 티셔츠, 반지, 목걸이는 판매 시작 5분 만에 모두 팔려 나갔다.
* * *
김향기 회장의 부름을 받고 정말 오랜만에 본사에 들어온 주강희는 마음이 편했다.
회장실에서, 향기 이모가 아닌 회장님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이토록 편했던 적이 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그래서 주강희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았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김향기가 주강희를 향해 말했다.
“이번 콜라보, 매출 자체는 크지 않아도 라엘의 이름을 알리는 데는 아주 큰 효과가 있었어. 다른 것보다 구매자 비중이 국내보다 외국인 비율이 높은 것, 남성 구매자 비중이 늘어난 것. 이 두 가지가 가장 마음에 들어.”
김향기가 엔터 사업에 손을 대려 한 건 거기서 돈을 벌고자 함이 아니었다.
라엘 그룹을 지금보다 크게 키우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쪽으로 그룹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함이었지.
그런 면에서 이번 콜라보는 김향기 마음에 쏙 들었다.
기존 주 고객층이었던 국내 여성 고객이 아닌 외국인, 남성 비중이 높다는 건 라엘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이름을 알렸다는 이야기니까.
“잘했어.”
담백한 칭찬에 주강희는 씰룩이려는 입꼬리에 힘을 줬다.
“감사합니다.”
주강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거다.
이런 날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일한 거였다.
향기 이모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김향기 회장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아직까지도 여기 올 때마다 겁부터 먹었겠지.’
부름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회장실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었는지.
그걸 해결해 준 도진에게 주강희는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원하는 선물 얘기하라고 한 지가 언젠데…….’
주강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고마운 사람이긴 한데, 정말 특이한 사람이기도 한 게 도진이었다.
천지현을 통해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해도 언제나 필요 없다는 말만 돌아오곤 했다.
숙소도 더 좋은 곳으로 옮겨 주겠다고 해도 이사하는 게 귀찮다며 싫다고 하고.
‘설마 재계약 안 하려고 거리 두는 건 아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강희는 결심했다.
‘필요 없다고 해도 강제로 줘야겠어.’
라엘 엔터테인먼트엔 도진이란 크리에이터가 필요했다.
* * *
도진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게임을 끝내고 나오자마자 천지현에게 끌려나온 것이다.
사유는 건강검진이었다.
“나 건강하다니까?”
밴 뒷좌석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도진.
그러나 천지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백미러를 통해 도진을 흘겼다.
“회사에서 예약한 건강검진이지만, 도진이 넌 검사 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해.”
“내가 어때서. 먹는 것도 건강식으로 먹고, 운동도 나름 꾸준히 하고, 영양제도 잘 챙겨 먹는데.”
도진의 반박을 들은 천지현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인정해. 근데 다른 게 더 문제야. 툭 하면 이틀, 사흘씩 캡슐에 누워 있지? 그거 허리랑 목에 엄청 안 좋대.”
도진은 할 말이 없었다. 전생에 허리랑 목 디스크가 나란히 나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먹는 거 건강하게 먹고, 운동하는 거 좋다 이거야.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자기관리 하는 거 솔직히 존경스러워. 근데 그러면 뭐 하니? 햇빛을 안 보는데. 내가 찾아봤는데 아무리 영양제 챙겨 먹어도 자연광을 너무 안 보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대. 특히 눈에 안 좋다고 하더라.”
“…….”
이번에도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집 밖으로 나온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무슨 반박을 하겠나.
도진은 겸허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시트에 몸을 묻었다.
잠시 후 병원에 도착한 도진은 천지현에게 끌려 다니며 종합검진을 받았다.
“으윽… 죽을 거 같아.”
마지막 순서인 수면 내시경에서 깨어난 도진은 죽을 맛이었다.
수면 내시경은 전날부터 금식도 하고 그래야 할 수 있는 거 아냐? 하긴 에너지팩만 꽂아 놓고 게임만 했는데 어차피 안은 텅텅 비었겠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비틀비틀 일어나 이리저리 걷다 보니 다시 밴이었다.
푹신한 시트에 몸이 닿자마자 피로가 몰려온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도진아, 일어나. 도착했어.”
“…벌써?”
천지현의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뜬 도진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
그런데 낯설었다.
지하 주차장은 지하 주차창인데 낯선 주차장이다.
주차된 차종도 다 고급 차들이고 건물 자체가 부내가 풀풀 난다.
“여긴 또 어디야?”
묻는 도진의 등을 천지현이 밀었다.
“가 보면 압니다요.”
어어, 등을 떠밀려 엘리베이터에 타고, 위로 올라가고, 어느새 생전 처음 보는 집 문 앞까지 도착한 도진.
천지현이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지내던 숙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현관이 도진을 맞이했다.
도진은 얼떨떨했다. 이쯤 되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잖아.
“도진이 네가 새 숙소로 옮겨 준다고 해도 귀찮아서 싫다고 했잖아. 그래서 아예 완벽하게 세팅 끝내고 이렇게 몸만 데려오면 되게 만들었지.”
하하, 하고 작위적 소리를 내며 웃는 천지현.
도진보다 더 신이 난 그녀는 착착 실내용 슬리퍼를 두 개 꺼내 내려놓았다.
“자자, 들어가 보셔요.”
“…왜 이렇게 신났어?”
아무리 봐도 담당 크리에이터 숙소 옮기는 걸로 신난 게 아니었다.
“어… 그게. 그냥 기분 좋은데? 생각해 봐. 네 집이지만, 너보다 내가 여기 더 오래 있잖아. 넌 맨날 가상현실에 있으니까.
음, 생각해 보니 그렇긴 했다.
뭐, 이유야 어쨌든 친한 사람이 기분 좋아하는 걸 보는 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다.
도진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천지현 뒤를 따라 새로운 보금자리로 들어갔다.
‘나도 새집 구경 좀 할까.’
여기까지 왔으면 이 상황을 즐겨야지 어쩌겠어.
“저번 숙소보다 여기가 훨씬 넓거든? 그래서 네 운동방이랑 침실이 훨씬 넓어졌어. 여긴 내 휴게실이고, 여기가 게임방. 캡슐도 최신형에 최고급 모델이래.”
혼자 살기엔 과하게 넓은 방 4개짜리 고급 아파트.
그 안에 채워 넣은 모든 게 최고급이었다.
운동 기구, 침대, 보지도 않을 TV를 포함한 전자제품 일체까지 모든 게.
‘이 정도면 협박하는 수준이잖아.’
시간은 흐르고 흘러 1년 계약을 맺었던 계약 기간도 절반 정도가 지나 있었다.
아직 절반이 남았다고는 해도 원래부터 1년으로 짧게 잡은 계약기간을 감안하면 재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만도 한 시기였다.
하물며 도진이 계약 이후 이룬 성과와 성공을 생각하면 회사 측에서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일.
‘나쁘진 않네.’
좁은 임대 원룸에서 깔끔한 오피스텔로, 거기서 다시 고급 아파트로.
도진에게 있어 지금 눈에 비치는 모든 게 자신이 이룬 것을 증명하는 장면이고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잘 살자.’
다시 한번 다짐하며 캡슐을 손으로 쓸고 있을 때였다.
“시, 실장님.”
밖에서 천지현의 당혹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다고 해서 와 봤어요. 도진 씨는요?”
이어서 들리는 건 주강희의 목소리.
도진도 밖으로 나갔다.
“실장님?”
주강희는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편한 사복 차림이었다.
아마도 천지현이 놀란 이유도 평소와 너무 다른 주강희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진은 갑작스런 그녀의 방문 이유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