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94화 (9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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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선 게임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보니 세상사 도진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로그아웃을 한 뒤에도 해야 할 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도진아, 너 게임 시작하기 전에 이것 좀 봐줄 수 있어? 이번에 나온 영상 데모 버전이래.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어서 꼭 오늘 봐줬으면 한다고 콘텐츠 팀장님이 그러셔서.”

대표적으로 영상 제작 방향에 대한 피드백이 그러했다.

먹을 것과 일감을 함께 내미는 천지현의 모습은 이젠 도진에겐 꽤 익숙한 것이었다.

라엘 엔터는 회사 차원에서 도진의 시간을 빼앗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작업물에 대한 컨펌만큼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려 했다.

일정을 딜레이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도진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고 일을 진행하거나 영상 공개를 하는 식.

도진도 이런 점을 알고 있기에 천지현이 가지고 오는 일감은 최대한 빠르게 확인하고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데모라고?”

“응. 아직 완성본은 아니래. 네가 OK하면 추가 작업에 들어갈 거라더라.”

도진은 그런가 보다 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무려 12편으로 나뉘어 제작되는 <영원을 노래하는 숲> 시리즈의 1화가 재생된다.

시작은 검은 화면이었다.

전조도 없이 소리가 끼어든다.

풀벌레 우는 소리.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 개울이 흐르는 소리.

산이나 숲에서 들릴 법한 소리가 음산하게 그리고 두서없이 흘러나온다.

이어서 깔리는 음울한 음악.

검은 화면이 물결친다. 들리는 소리에 발소리가 추가됐다.

그러면서 카메라 시점이 점차 멀어졌다.

검은 화면이 물결친 이유는, 그것이 도진의 로브였기 때문이었다.

뒤로 물러나고 물러나며 어두운 숲으로 걸어가는 도진의 뒷모습을 담는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

그 위로 깔리는 숲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영상 제목이기도 할 글자가 떠오른다.

거기까지 본 도진은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웠다.

12편으로 나눠서 영상을 만든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게임 플레이 영상을 잘라서 만드는 하이라이트 영상.

전투 장면을 더 극적으로 연출하거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란 게 시작부터 느껴진다.

‘…인트로부터 이렇게 힘을 준다고?’

드라마도 아니다. 이 정도 분위기면 영화라도 시작할 기세였다.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영상에 빠져들었다.

이번 영상은 연출과 편집만 훌륭한 게 아니었다.

원본 영상에는 없는 장면도 엄청나게 많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데모 영상을 전부 본 도진이 말했다.

“영상 하나에 돈을 얼마나 쓴 거야? 절반 정도는 원본에도 없는 걸 만들어서 넣었잖아.”

그런데 대답을 해야 할 천지현이 조용했다.

뭔 일인가 싶어 옆을 보았더니.

저기 멀리 떨어져서 궁금한 눈빛만 보내는 게 아닌가.

“뭐 해?”

“난 그거 보면 안 돼. 너한테만 보여 주라고 했거든.”

“뭐야 그게?”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도진은 생각했다.

데모 버전이 이 정도면 완성본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다고.

“내용 문제없다고 전해 줘. 내용 건드리는 것만 아니면 다른 부분은 전부 맡긴다고도.”

전문 분야가 아닌 영역은 전문가에게.

이 정도 퀄리티의 영상을 뽑아내는 전문가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둘 정도로 도진은 어리석지 않았다.

* * *

시일은 흐르고 흘러 도진이 <영원을 노래하는 숲> 히든 퀘스트를 마무리한 지도 벌써 한 달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도진 채널에 영상이 업로드된 건 그것보다도 더 전이었기에 사람들은 도진의 근황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하는 중이었다.

-도진 채널 벌써 한 달 넘게 영상 안 올라오는데 무슨 일 있나?

-부담돼서 그런 거 아닌가? 지금까지 계속 대박만 쳐 왔는데 시시한 영상 올리기엔 좀 그러니까 그러는 거지.

-난 그냥 사냥 브이로그만 올려줘도 재밌게 볼 자신 있는데. 제발 영상 좀 자주 올려줬으면…….

팬들은 특히 더 그랬다.

그들은 뭐라도 좋으니 영상 좀 올려달라고 아우성치며 도진을 기다렸다.

그때쯤, 도진 채널에 영상이 올라왔다.

검은 화면.

음산하고 음울한 숲의 소리와 음악.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로브자락.

회색 숲으로 걸어가는 도진의 뒷모습을 비추다가 뚝 끊어지는, 기대감을 증폭하기 위한 티저 영상이었다.

10초짜리 짧은 영상이었으나 이것이 불러온 반응은 엄청났다.

-왔다!!!!!!!!!!

-왔냐???????

-왔어! 왔다고!

-영상 분위기 뭔데? 도대체 편집자 영혼을 얼마나 갈아 넣은 거임?

-영화 인트로 보는 거 같네 ㅋㅋ

-아니, 한 달을 넘게 쳐놀고는 티저? 이 새끼들이 미쳤나. 바로바로 본편으로 올리란 말이야! 나 목 빠져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러한 광란의 하루가 지나고.

[영원을 노래하는 숲 EP.1]

20분 길이의 1화가 도진 채널에 등장했다.

1화에선 도진이 <라브르 호수 수중동굴>에서 알을 얻었고, 그걸 부화시키기 위해 숲에 왔다는 정보가 담겼다.

그것 외에는 숲을 헤매며 몇 마리의 몬스터를 마주치고, 전투를 치르고, 밤이 깊어져 나무 위에 올라 선잠을 자는 게 1화의 전부였다.

지금까지 도진의 영상은 전개 속도가 빨랐다.

상황은 언제나 긴박하게 흘렀고, 쉬지 않고 몰아치는 도진의 전투 장면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상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시작부터 숨도 안 쉬고 몰아칠 줄 알았더니 너무 조용한데?

-싸우는 것도 일반 몬스터만 잡으니까 싱거운 느낌임.

-뭐 이런 걸로 시간을 20분이나 끌어?

-난 이번 영상 개좋은데? 숲속 분위기도 좋고 계속 도진이 얼굴 클로즈업돼서 넘 좋음.

└진짜 ㅠㅠㅠ 모닥불 바라보는 얼굴 클로즈업될 때 숨이 안 쉬어지더라.

└숨이 안 쉬어지면 사람이 죽어, 미친년아.

잔잔한 분위기의 영상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 EP.2]

그러나 반응은 2화부터 확연히 달라졌다.

2화 초반부에 등장한 숲의 파수꾼으로 인한 변화였다.

-숲의 파수꾼 뚝 떨어질 때 내 심장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나무가면 쓴 좀비 뭔가 비밀이 있을 거 같지 않아? 좀 구린 냄새 나는 느낌임.

-나도 글케 느꼈음. 왕이 그랬다고 하지만 사실 저 좀비가 벌인 일일지도 모름.

-다른 사람은 뼈만 남아서 몬스터 됐는데 혼자 비교적 멀쩡한 것도 의심스러워.

기존 매체의 반전에 절여진 동심 없는 사람들은 2화에 등장한 숲의 파수꾼을 의심했다.

영상 분위기가 음산하다 보니 더욱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 EP.3]

그러나 그러한 여론은 3화가 공개됨에 따라 사라졌다.

함께 숲을 수색하고, 같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밤을 보내고.

음식을 나눠 먹고.

그런 와중에 오가는 도진과 파수꾼의 대화.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파수꾼의 모습이 선사하는 궁금증까지.

-미쳤다. 스튜 나눠 먹는 장면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이번 영상 시리즈는 진짜 분위기가 다 하네.

-저 좀비 진짜 꿍꿍이 있는 악당이어야 됨. 아니면 안 됨. 진짜 500년 넘게 숲에서 혼자 지낸 거면 너무 불쌍하잖아…….

시청자로 하여금 숲의 파수꾼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든 3화를 기점으로 전개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 EP.4]

보스 몬스터 테그란이 등장했다.

파수꾼의 비밀이 밝혀졌다.

불행한 과거와 더욱 불행한 현재의 처지가 겹치면서, 파수꾼의 인기는 수직상승했다.

-얘들아, 나도 살아 있는 시체가 된 거 같아. 도진이가 진실 밝혀지는 순간 파수꾼한테 “듣지 마” 하는 장면에서 잠깐 심장이 멈췄어…….

└그거 부정맥이에요. 병원 가 보세요.

도진의 인기가 더해 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 EP.5]

5화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전투 장면으로 채워졌다.

누아와 조우하고, 화려한 마법으로 세상을 물들이며 다그네와 합공을 펼치는 도진의 모습이 끝내주는 연출로 그려졌다.

돈을 엄청나게 발라 특수효과까지 아낌없이 추가된 장면 장면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평소라면 도진의 캐스팅 속도와 마법사로서의 센스, 전장의 흐름을 읽는 능력 등에 대해 토론으로 빼곡해야 할 댓글창은 다른 이야기로 가득했다.

-우리 나무가면 죽으면 구독 취소함 ㅅㄱ

-시발 이게 말이 되냐고. 사슴 새끼 가려면 곱게 갈 것이지 왜 거기서 하…….

-진짜 먹먹한 게 뭔 줄 앎? 파수꾼도 다그네도 누아도 전부 피해자라는 거임. 나쁜 새끼들은 이미 다 뒤져서 책임질 놈도 없고. 상황이 진짜 좆 같네.

5화 마지막 장면이 도진을 구한 파수꾼이 흩어져 사라지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파수꾼을 추모하는 글이 도배됐다.

흉터 없이 밝게 웃고 있는 파수꾼의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가 수십 장씩 올라왔다.

-이미 언데드가 돼 버린 마당에 해피엔딩은 어렵긴 했지. 그래도 이젠 편안한 곳에서 외롭지 않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슬픔의 여운을 느끼며 애써 파수꾼을 보내준 다음 날.

[영원을 노래하는 숲 EP.6]

대망의 6화가 업로드됐다.

누아와 다그네가 소멸하고, 도진이 홀로 남아 무덤을 만드는 장면이 길게 이어졌다.

보는 이로 하여금 먹먹함을 자아내는 엔딩… 인 줄 알았으나.

은빛 늑대가 태어난다.

782번, 파수꾼이었다.

정령으로 태어난 그녀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무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어지는 계약.

[“아네모네.”]

인간일 때도, 언데드일 때도 이름을 갖지 못했던 소녀가 이름을 받았다.

화면이 전환되고, 모닥불 옆에 잡든 늑대 소녀 곁에 피어 있는 바람꽃 한 송이를 비추며 영상을 끝이 났다.

1화가 공개될 때 800만을 조금 넘겼던 도진 채널의 구독자는 6화 업로드로부터 약 12시간이 지난 시점에 1,000만 구독자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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