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93화 (94/271)

93

휴식을 취한 뒤 LOST에 접속한 도진은 가장 먼저 아네모네를 불렀다.

“아네모네.”

도진 안에 잠들어 있던 아네모네는 새롭게 얻은 이름을 듣자마자 깨어났다.

【응!】

오른손을 뻗고 소환하겠다는 의지를 품는 것만으로 섬광과 함께 은빛 늑대가 소환됐다.

소환되자마자 도진에게 다가간 아네모네는 약간 걱정 섞인 눈으로 물었다.

【괜찮아? 내가 밖에 있으면 힘들잖아.】

계약자이자 소환자인 도진의 마나가 자신에게 흘러드는 걸 느끼기에 하는 질문.

“걱정 마. 널 소환하는 데 들어가는 마나는 별거 아니니까. 너한테도 느껴질 거 아냐?”

도전의 탑에서 얻은 「마나지체」 특성으로 인해 도진은 총량, 속도, 효율, 강도, 안정성 등 마나와 관련된 모든 능력이 급상승했다.

아네모네 정도 되는 정령을 소환하는 게 다른 마법사에게는 부담될지 몰라도, 도진에게는 그리 큰 부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약간이나마 부담을 주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코를 찡긋찡긋 하는 아네모네.

도진 아네모네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의 갈기를 쓸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리는 꼬리가 그녀의 기분이 좋아졌음을 알린다.

아네모네

레벨: 83

종족: 정령

근력: 395

민첩: 395

체력: 395

정령력: 395

스킬: (0) [열기]

특성: (2) [열기]

손은 아네모네의 목덜미를 쓸어 주고 있지만, 눈은 눈앞에 뜬 상태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도진도 아네모네의 상태창을 보는 건 이게 처음이었다.

히든 퀘스트를 마무리한 뒤에는 너무 피곤해서 할 수가 없었다.

아네모네의 상태창은 매우 심플했다.

정령력 수치가 1:1 비율로 각 능력치에 적용되는 완벽한 밸런스형 정령.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자신의 힘을 다루는 기술은 스킬은 하나도 없었으나 타고난 특성은 있었다.

「강한 공격」

「저항 증가」

심플한 스탯과 마찬가지로 심플하기 그지없는 특성 이름.

「강한 공격」은 말 그대로 공격력을 1.5배로 만드는 특성이고, 「저항 증가」는 물방, 마방과 속성 및 상태이상 저항 등을 정령력 수치에 비례해 올려주는 특성이었다.

한마디로 아네모네는 특수한 능력을 쓸 줄은 모르지만, 물리력과 탱킹에는 특화된 정령이란 뜻이었다.

이를 확인한 도진은 매우 만족했다.

‘나한테는 이런 쪽이 훨씬 도움이 되긴 하지.’

도진은 마법사다.

마법사치고 튼튼하고 날래다고 해도 결국 상대적으로 가장 부족한 부분은 물리력과 방어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도진에게 물리적인 공격과 탱킹 능력을 갖춘 아네모네는 최고의 사이드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

허공을 바라보는 도진이 이상했던 건지 아네모네가 고개를 갸웃하며 부른다.

상태창을 없앤 도진은 그런 아네모네에게 말했다.

“아네모네, 놀러 갈래?”

【놀러 간다고?】

신이 난 건지 놀란 건지 아네모네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생각했다.

‘숫자랑 글자로 대충 파악했으면 다음은 실전해서 확인하는 게 순서니까.’

이날 도진은 신이 난 아네모네와 함께 다섯 군데의 사냥터를 순회했다.

그 사냥터들을 돌며 여러 가지 상황에 스스로를 던져 넣으며 전투를 치러 본 결과.

‘사기네.’

도진은 자신이 또 하나의 치트키를 얻었음을 확신했다.

* * *

도진은 새롭게 얻은 힘을 체화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였다.

저번에야 원래 갖고 있던 능력이 업그레이드된 거였으니 적응하고 말고 할 게 없었지만, 이번에는 결이 달랐다.

도진 혼자서 휘두르는 힘이 아니라 아네모네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만큼 충분히 시간을 들여 서로에게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여러 사냥터를 돌며 호흡을 맞추는 동안 도진과 아네모네는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눴다.

도진은 아네모네를, 아네모네는 도진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런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이 가고, 열흘이 지나고, 보름째가 되는 날.

“어?”

현실에서 도진은 물 마시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도진이 네 새로운 영상 일주일 정도면 완성될 예정이라고. 결과물이 엄청날 테니까 기대하라고 하더라. 근데 콘텐츠 팀 사람들 상태가… 진짜 그쪽 팀 전원이 야근에 재택까지 하면서 일한다는 게 정말인가 봐.”

물 말고 이거 마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맛이 정말 없어 보이는 녹즙을 내밀며 천지현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도진은 당황했다.

“무슨 영상 말하는 거야?”

“그거. 너 이번에 히든 퀘스트 하면서 찍은 영상. 너무 길어서 난 아직 못 봤는데 팀장님은 엄청 좋아하시는 거 같더라고.”

영상이 긴 건 당연한 일이다.

플레이 타임이 곧 영상 길이인데 도진은 일주일 내내 그곳에서 굴렀으니.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난 영상을 보낸 적이 없는데?

몸으로는 천지현이 내미는 녹즙을 받아 들며 도진은 당혹감을 섞어 물었다.

“그게 왜 만들어져? 난 영상을 보낸 적이 없는데?”

그러자 천지현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말했다.

“저번에 내가 물어봤잖아. 이번 영상 찍은 거 저번처럼 내가 대신 처리하면 되냐고. 그랬더니 네가 그러라고 해서 저번처럼 했는데?”

“그랬… 나?”

“중간에 내가 얘기도 해 줬잖아. 너 그때 듣지도 않고 대답한 거였어?”

“…….”

도진은 히든 퀘스트를 끝내고 나서도 바쁘게 살았다.

캡슐 밖으로 나오는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식사, 수면 같은 필수적인 일을 마치는 즉시 캡슐로 돌아갔었다.

그때 천지현이 무슨 말을 하긴 했는데, 그때마다 대충 “누나가 알아서 해”라고만 대답하고 가상현실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파노라마처럼 그러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친 도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도진을 천지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너 내가 했던 말 듣지도 않았지?”

“…들었지. 잠깐 깜빡한 거야.”

녹즙을 마시며 딴청을 피우는 도진.

오늘따라 녹즙이 더 쓴 거 같았다.

씁쓸한 그 맛을 느끼며 도진은 먼 곳에 시선을 던졌다.

‘아네모네는 당분간 숨길 작정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나…….’

아니지, 마지막 부분만 어떻게 수정해 달라고 할까? 어차피 아직 완성된 거 같지도 않은데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도진에게 천지현이 여전히 가늘게 뜨고 있는 눈으로 재차 추궁했다.

“솔직히 말해. 내가 했던 말 기억나는 거 별로 없지.”

“미안…….”

천지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도진은 영상 수정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게임에서 로그아웃할 때마다 자신을 챙겨 주는 천지현의 흔적을 보았던 도진이다.

낮이면 천지현 본인이 직접 챙겨 줬고, 그녀가 퇴근한 시간대에는 챙겨 먹으라고 차려놓은 식사가 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지현은 도진에게 있어 현실의 나도 혼자는 아니구나 하는 실감을 지속적으로 주는 식구 같은 사람이었다.

‘음, 내가 심하긴 했구나.’

게임에 미쳐 하는 말도 대충 듣고 흘려 버렸으니 천지현 입장에선 매우 서운하지 않을까.

아무리 최근 새롭게 얻은 힘에 익숙해지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고 해도 심한 건 심한 거였다.

그러나 정작 천지현은 그런 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왠지 어디에 정신 팔린 사람처럼 먹는 것도 대충대충 먹고 급하게 캡슐로 간다 했어. 지금이라도 제대로 들어. 이번 영상이랑 관련해서 회사에서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대.”

“프로젝트?”

뭐가 그렇게 거창해? 그냥 지금까지처럼 영상 편집해서 채널에 올리면 그만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 천지현이 하는 말을 듣던 도진은.

“쿨럭, 쿨럭!”

먹던 녹즙이 역류하고 말았다.

그나마 기침을 필사적으로 억제한 덕에 전방으로 뿜는 것만은 면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

하지만 그렇다고 놀란 가슴이 진정되는 건 아니었다.

“…누나, 지금 뭐라고 했어?”

“콘텐츠 팀장님이 이번에 드라마 수준으로 영상 뽑아 내겠다고 이를 갈더니, 12부작으로 올리기로 했다고.”

이것도 놀랍다. 무슨 유튜브에 12부작으로 영상을 올려. 그런데 도진이 놀란 포인트는 여기가 아니었다.

“아니, 그다음에.”

“영상 업로드 기간에 굿즈 제작은 무조건이고, 굿즈 제작을 라엘 패션이랑 콜라보 형식으로 하는 데까지는 확정. 이후에 반응에 따라서 추가적인 사업 진행하면서 프로젝트 규모를 결정할 거래. 이거 다 얘기해 준 건데.”

다 네가 듣고 하라고 했어. 넌 기억 안 나는 거 같지만.

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규모로 일이 커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게임만 했다니.

‘…뭐 하나에 눈 돌아가면 주변 못 보는 건 여전하네.’

여러 면이 달라졌으나 인간 자체가 변한 게 아니니 변함없는 점도 있었다.

남다른 집중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른 것을 챙기지 못하는 부작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쓰게 웃으며 도진이 말했다.

“그런데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거 아냐?”

“네 인기가 얼만데. 넌 게임만 하느라 실감이 안 날지 몰라도 매번 통계치 뽑고 체크하는 회사 입장에선 다르지.”

인기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오니 도진은 괜히 민망하고 머쓱했다.

그런 그에게 천지현이 말했다.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린 업보니까 순순히 받아들여. 여기서 네가 태클이라도 걸었다간 난 이거란 말야.”

손날로 자신의 목을 치는 시늉을 하는 천지현을 보며 도진은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냥 가상현실로 돌아가자.

가서 아네모네랑 소풍이나 가야지.

물론 소풍 장소는 사냥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