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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90화 (9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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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가 몸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됐다.

부러진 뿔을 하늘로 치켜들고, 상처 입은 신록이 울부짖는다.

우우우우우-!

피 흘리는 짐승의 포효에 엄청난 힘이 실려 주변을 휩쓸었다.

포효라기보다 차라리 힘의 파동이라 불러야 할 공격.

그것을 본 순간적으로 도진은 회로에 마나를 주입했다.

강력한 힘의 압력에 파열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크윽.”

재빠르게 대처를 했음에도 마법회로는 물론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충격이 덮쳐 왔다.

‘역시 내가 상대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군.’

애초에 도진은 신록 누아를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야기의 흐름과 전개상 현재 레벨로는 엄두도 못 낼 괴물일 건 확실했으니.

정령용의 알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근데 이대론 실마리가 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죽겠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힘의 파동이 전신을 옭아맸다.

「마나지체」 덕에 버티고는 있으나 몇 초만 더 노출돼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상황.

그런 위기에서 도진을 구한 건 다름 아닌 782번이었다.

“으아아!”

검을 뽑아 들고 도진 앞을 막아선 782번은 혼신의 힘을 다해 누아의 힘에 저항했다.

“끄으윽……!”

그러나 782번의 능력으로도 폭주하는 누아의 힘을 완전히 견딜 수는 없었다.

새하얗고 빛바랜 머리카락이 거칠게 나부낀다.

낡은 그녀의 갑옷은 이미 잘게 부서지는 중이었다.

검마저도 금이 가며 782번에게 한계가 찾아왔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겠어…….’

782번은 아득해지려는 의식의 끈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자신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나 도진만은 구해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그녀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정령의 기운이 늑대의 형상을 이루었다.

【누아!】

영혼을 울리는 듯한 포효.

782번은 갑작스레 나타난 늑대를 보며 외쳤다.

“다그네!”

782번의 부름에 늑대가 고개를 돌렸다.

【기어코 너는 나를 이곳까지 인도했구나. 잘해 주었다, 아이야.】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혼란스러워하는 782번이었으나 다그네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다그네는 자신의 힘으로 누아에게 저항하는 한편 도진을 바라봤다.

【다스칸다르의 의지에 이끌려 온 자여. 먼저 이 아이에게 따뜻한 정을 나누어 준 것에 감사하마.】

다그네는 782번 안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782번을 누아의 저주에서 지켜 주는 동시에, 불쌍한 아이들을 해방시켜 줄 기회를 노리며.

그런 다그네에게 있어 782번은 가장 가슴 아픈 아이였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욕심 때문에 혼자서 숲을 떠돌게 된 아이였으니.

그렇기에 도진은 매우 고마운 존재였다.

사태를 해결할 희망인 다스칸다르의 의지와 힘이 깃든 알을 가져온 것도 그렇고, 782번에게 인간적인 정을 준 것도 그렇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얘 안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거 같네.”

【그렇다. 나를 구속하는 데 이용된 아이들은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었지. 그런 아이들이 이런 일에 휘말려 누아의 원념에 고통 받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누아와 함께 소멸할 각오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상황이 상황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겠어?”

【지금의 누아를 보니… 어려웠을 거 같구나. 누아는 자신의 육체가 남아 있지만, 나는 육체를 잃고 서서히 소멸해 가는 중인 처지이니. 하지만 네 덕에 희망이 생겼다.】

“내 덕이 아니라 이것 덕분이겠지.”

말하며, 도진은 아까부터 조금씩 더 강하게 점멸하는 정령용, 다스칸다르의 알을 내밀었다.

다그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나의 형제와도 같은 다스칸다르의 힘이 깃든 알. 잠시나마 내게 완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거다.】

도진은 생각했다.

진짜로 <라브르 호수 수중동굴>에서 최후를 맞이한 정령용 다스칸다르가 자신을 조종한 게 아닐까 하고.

결국 알을 들고 여기까지 와서 이 푸닥거리를 하고 있으니, 다 그놈 뜻대로 돌아간 셈이지 않은가.

뭐, 지나간 일이야 어쨌든.

“나한테도 속삭이네. 당신과 힘을 합쳐서 저 사슴 좀 어떻게 해 보라고.”

【너에게도 다스칸다르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냐?】

“이걸 들린다고 해야 할지 보인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라는군.”

【좋다. 그럼 내가 다스칸다르의 힘과 의지를 해방하겠다!】

반투명한 늑대 형상을 한 다그네가 도진이 들고 있는 알을 물었다.

알에 깃든 정령용의 힘이 일시에 해방된다.

작은 알에 이만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정령력.

누아의 힘과 달리 한없이 호의적인 기운은 다그네에게 깃들고, 도진에게 깃들고, 782번에게 깃들었다.

[퀘스트]

정령용이 남긴 것

등급: 히든

[다스칸다르의 힘이 깃들었다.

일시적이나마 정순한 정령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것을 이용해 원념에 지배당해 타락한 누아를 정화하자.]

※이제부터 당신의 공격은 ‘신록 누아’의 타락 수치를 정화할 수 있습니다.

늑대한테만 맡기고 쉴 생각 말라는 거네.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도진은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주저앉아 멍하니 있는 782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가 돌아본다.

“…혼란스러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울먹이듯 말하는 그녀에게 도진이 조용히 읊조렸다.

“금방 끝낼게. 다 끝나면… 한결 편해질 거야.”

꽉…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부여잡아 준 도진이 앞으로 나섰다.

도진은 다그네와 누아의 힘이 맞부딪치는 지점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씩 밀리던 다그네의 기운은 이제 누아의 기운과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밀리지만 않을 뿐 압도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폭주를 거듭하며 점차 검게 물들어 가는, 한마디로 더 강해지는 거 같은 누아와 달리 다그네는 유통기한이 확실한 처지.

시간을 끌면 어느 쪽이 패배할지 명확한 싸움이었다.

“힘이 돌아오는 건 잠시라고 했지? 아무리 봐도 저쪽은 계속 더 세지는 거 같고, 이쪽은 유통기한이 확실한 처지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자고.”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군.】

“난 연좌제 싫어해. 형제 대신 사과할 거 없어.”

【‘형제 같은’이다. 실제 형제는 아니지.】

은근히 선을 긋는 다그네를 보며 도진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유머 감각이 있는 늑대 아저씨였다.

【간다.】

다그네가 도약했다.

칠흑같이 검은 늑대는 한 번에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누아가 쏘아 대는 힘의 파동을 그대로 뚫고 몸통박치기를 했다.

누아가 비틀거리는 동시에 주변을 초토화시킬 기세로 뿜어지던 힘이 멎었다. 채널링이 끊긴 것이다.

도진에겐 날뛸 환경이 갖춰진 셈이었다.

‘딜로 정화하라는 건 무지성으로 딜만 넣으면 된단 말이잖아.’

그것만큼 내가 잘하는 것도 드물지.

도진은 모든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황금색 진리의 서를 펼치고, 마법회로를 완전 활성화했다.

도진이 정한 순서대로 마법이 짜이고, 룬 건틀렛이 마나에 반응하여 빛을 뿜어내며 완성된 마법을 발사했다.

화염의 파도가 커다란 덩치를 가진 누아를 타격하고, 불기둥이 솟아오른다.

덧씌워지는 회오리바람은 불길을 그러쥐고 더욱 거칠게 누아를 휩쓸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얼음 구체가 누아에게 지속적으로 냉기 피해를 누적시켰다.

도진은 쉬지 않고 마법회로를 혹사시켰고, 마법은 동급의 어떤 마법사도 따라 할 수 없는 속도로 만들어졌다.

룬 건틀렛은 그 모든 마법을 치명적인 필살의 기술로 탈바꿈시켰고.

누아는 분노와 고통에 젖은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비명에는 원념이 끈적하게 묻은 저주의 힘이 담겨 있었다.

【어딜!】

그러나 그런 공격은 전부 다그네가 막아 주었다.

이미 소멸을 각오한 정령의 헌신적인 보호는 도진을 자동포탑으로 만들었다.

‘얼마나 깎아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든지 깎아 주마.’

생명력이 되었든 타락 수치가 되었든.

그게 무엇이든 공격해서 부숴 버릴 수 있는 거면 다 갈아 버리면 된다.

도진은 그렇게 할 자신 있었다.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땅에 발을 붙이고 화력을 쏟아붓는 데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자신의 화력은 동레벨 5인 파티의 그것마저 뛰어넘는다.

무엇보다.

‘마나까지 무한인데 못 뚫을 게 있겠냐고.’

현재 도진은 마나가 무한인 상태였다.

마법을 사용하면 소모되는 자원이 다스칸다르가 남긴 ‘정령력’으로 대체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전투는 결국 다그네가 힘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 정화 작업을 완료해야 하는 일종의 타임어택.

한정된 시간 안에 얼마나 딜을 넣느냐로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싸움에서 마나 제한이 사라진 마법사보다 유리한 존재는 없다.

【지금이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돼!】

도진과 다그네의 협공에 누아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쿵 쓰러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누아의 목덜미를 강하게 물어 제압하는 다그네.

그러면서 도진을 강렬한 눈으로 바라봤다.

【고맙다.】

다그네를 이루고 있는 정령력이 거칠게 폭주했다.

누아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기운을 찍어 누르려는 듯이.

소멸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그나마 쓸 수 있는 힘이 많이 남아 있을 때 동귀어진을 하려는 다그네의 결의였다.

“나야말로.”

다그네의 의지를 느낀 도진은 누아를 향해 최대한의 화력을 퍼부었다.

뒤섞인 두 정령의 기운이 도진의 마력과 충돌하고 상잔하며 휘몰아쳤다.

‘끝났나.’

정령력도 마나다.

도진은 적야에 비치는 마나의 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고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검붉기만 하던 누아의 정령력이 다그네의 정령력과 섞이며 중화되고 있었다.

분명 그러했다.

【피해!】

누아 안에 잠재되어 있던, 500년을 넘게 쌓인 원념이 드러나며 폭발하기 전까지는.

목덜미를 물고 있던 다그네는 급히 뛰어올라 도진과 782번 앞을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도진의 마법회로는 단숨에 파열됐고, 회로 주변의 모세혈관은 검게 물들었다.

극심하게 오염된 마나에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이런-’

대처할 틈도 없이 덮쳐 온 공격에 도진의 의식이 흐려졌다.

“진!”

그때, 계속해서 닥쳐오는 가혹한 현실에 넋을 놓고 있던 782번이 벌떡 일어나 도진을 향해 달렸다.

퍼억.

거칠게 충돌하다시피 도진을 끌어안으며 감싸는 그녀.

그러기 무섭게 공터 전체를 누아의 원념이 가득 담긴 마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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