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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그란은 정보를 쏟아 냈다.
하나의 질문을 하면, 연관된 정보까지 계속해서, 계속해서 뱉어 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기억 속엔 <영원을 노래하는 숲>의 비밀이 전부 담겨 있었다.
그것을 듣는 과정에서 도진은 호크세스 왕국이 하려던 일이 단순히 신록 누아를 사냥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들이 원한 것은 인공적으로 정령왕에 버금가는 강력한 정령을 만들고, 지배하는 것이었다.
【정령왕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배하고 있는 정령을 왕으로 만들 수 있다면?】
테그란은 호기심을 품었고, 왕은 욕심을 품었다.
둘의 이해관계가 성립되자 국가 단위의 계획이 진행됐다.
그 시작점은 강력한 정령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왕께서는 완벽한 구속과 지배를 원하셨다. 하지만 하급 정령은 몰라도, 정령왕의 가능성이 있는 강력한 정령을 완전히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만든 것이 바로 병렬형 정령 구속체였다.】
정령 친화력이 극도로 높은 아이들을 갓난아기 때부터 오직 정령을 구속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는 용도로만 사육하는 계획.
【서로가 서로의 부담을 나눠질 수 있게끔 하는 동조 회로는 매우 불안정하여 실험체의 생존율은 낮았으나 이는 더 많은 실험체를 투입하여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침내 대정령 다그네를 완전히 구속, 지배하게 되었다.】
강력한 정령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손에 넣었으니, 남은 것은 이 정령을 정령왕의 반열에 올리는 것뿐.
【정령왕의 탄생을 위해서는 정령으로서의 한계를 깨고 한 차원 높은 존재가 될 필요성이 있었다. 정령이 더 강력한 정령으로 진화하기 위해 차곡차곡 모으는 정령력. 우리는 그것을 ‘열쇠’라 불렀다. 우리는 다그네의 진화를 앞당기기 위해 다른 정령의 열쇠를 강탈하기로 했다.】
그래서 노린 것이 누아였다.
누아 또한 대정령이라 불릴 만큼 강력하고 오래된 정령이었고, 그만큼 진화를 위해 모아 놓은 힘도 막강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누아가 가진 열쇠, 그러니까 거대한 정령력을 다그네에게 먹이면 다그네가 정령왕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거라 믿고 신록 사냥에 나선 것이었다.
【우리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누아를 궁지에 몰아넣은 순간 누아의 숨통을 끊어야 할 다그네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이유는.
【더 이상 힘을 쓰면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는 구속의 중심체, 782번이 파손될 위험이 있어서였다. 이유는 불분명하나 다그네는 782번의 죽음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 누아의 반격이 있었다.
원정대의 전사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다그네도 치명상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원정대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782번을 포함한 병렬형 정령 구속체 113기도 파손되었다. 구속에서 벗어난 다그네는 폭주하였고 그 과정에도 누아도 치명상을 입-】
이 부분에서 테그란은 오류가 난 것처럼 버벅댔다.
테그란도 이쯤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발생한 기억의 공백이었다.
테그란은 숲을 떠도는 신세가 된 이후의 기억으로 넘어가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강력한 정령 누아의 원념은 숲을 타락시켰다. 나는 누아의 저주에 이끌려 숲을 떠돌았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들리는 누아의 원념 어린 울음소리에 고통받았다. 누아는 살아 있다. 아직도 숲의 중심에서 그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다시 테그란이 경련했다.
마치 아주 두려운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자아를 잃은 주제에 두려움을 느끼다니.
그만큼 숲을 떠돌며 들었다는 누아의 울음이 고통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경련하던 테그란은 이제 더 이상 토해 낼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침묵했다.
“…….”
모든 걸 듣고 난 뒤 도진이 느낀 감정은 씁쓸함이었다.
아니, 씁쓸하다 정도로는 지금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부족했다.
입안에 모래가 한가득 들어온 것처럼 거북하고 불편했다.
‘그냥 평범하고 착안 앤데…….’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던 파수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언데드가 되면서 기억의 일부가 사라진 게 맞을까?
오직 정령을 지배하기 위한 용도로, 물건처럼 만들어진 본인의 처지를 잊기 위한 자기방어기제로서 망각을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도진의 이런 생각은 상당 부분 정답에 닿아 있었다.
“782번… 내가 기억하고 있는 호크세스 왕국에 대한 마음이나 충성심 모두 세뇌로 주입된 것…….”
파수꾼은 충격을 받은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모습 위로 대충 만든 스튜를 아주 소중한 듯 끌어안고 떠먹던 모습이 겹쳐졌다.
며칠 말동무를 하며 함께 고생하면서 정이라도 든 건지.
도진은 화가 나서 욕이 나왔다.
‘젠장.’
파수꾼이 낡은 견갑을 떼어 냈다.
오랜 세월 낡은 옷은 이미 삭아 없어져, 그녀의 새하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난다.
파수꾼은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깨 뒤쪽을 도진에게 보였다.
“…….”
0782.
그녀의 분류 번호가 적혀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그것도 뜨거운 인두로 찍어 놓은 화상 자국으로.
“있구나.”
도진의 반응을 보고 파수꾼이 힘없이 웃었다.
“이젠 기억이 나. 허무하네. 숲을 혼자 떠돌면서 호크세스와 숲에서 함께 싸운 동료에 대한 마음으로 버텼는데… 그게 다 허상이었다니.”
파수꾼은 제 어깨를 꽉 쥐었다.
“그래도 괜찮아. 모든 게 거짓은 아니니까. 나와 같은 처지였던 아이들. 나와 함께 자란 아이들은 진짜였어.”
파수꾼, 아니 782번은 스스로 외면했던 기억을 마주했다.
비참한 현실을 잊기 위해, 고독한 처지를 스스로에게 변호하기 위해 정령 구속체 782번이 아니라, 호크세스의 왕명을 수행하는 왕의 전사였다는 자기최면을 걸었던 나약한 자신.
‘미안해, 얘들아.’
782번은 사과했다.
함께 자라고, 함께 고생하고, 함께 죽었던 진짜 동료를 잊고 있던 것을.
‘미안해, 다그네.’
다그네에게도 사과했다.
그러면서 782번은 분노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 언니를, 오빠를, 동생들을.
그리고 인간에게 구속되고 지배당하면서도 끝까지 우리를 동정하고 사랑해 줬던 다그네를.
‘내가… 내가 다 해결할게.’
782번은 이를 악물었다.
호크세스의 당당한 전사였다는, 구역질 나는 가짜 역할은 끝났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바뀐 건 아니다.
애들을, 다그네를 위해서라도 모든 걸 끝맺어야 했다.
이 순간에도 억울하게 숲을 떠돌고 있을지 모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782번은 다시 견갑을 착용했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전사 흉내를 내기 위해 누군가의 것을 주워 입은 거지.
782번은 도진을 보며 말했다.
“다행이다. 아까 실컷 때려 둬서.”
“…그러게.”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대신 도진은 툭툭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힘세고 강한 녀석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어깨가 많이 왜소했다.
“그래도 할 일이 바뀐 건 아니야. 난 숲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어. 나와 같은 처지였던 아이들도 숲을 떠돌고 있을지 모르니까.”
도진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이젠 알을 부화시키니 뭐니 하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퀘스트 보상?
시스템이 알아서 정산하겠지.
이제부터는 그냥 이 불쌍한 먹보의 한을 풀어 주는 게 제일 중요한 목표다.
그렇게 마음먹은 도진은 침묵하고 있는 테그란을 보며 말했다.
“아직 누아가 살아 있다고 했지? 원한에 사무쳐 계속해서 울고 있다고.”
테그란이 긍정했다.
“누아가 있는 곳으로 가는 방법이 있나? 숲의 중심으로 가는 방법 말이야.”
【숲을 떠도는 우리에겐 누아의 소리가 들린다. 우린 그 소리에서 멀어지기 위해 계속해서 숲 밖으로 도망치고 있다. 하지만 누아는 우릴 놓아줄 생각이 없어. 계속해서 숲의 모습이 바뀌어 우리를 영원히 헤매게 만들고 있다.】
“소리에서 도망친다고? 그렇다는 건 너희가 듣는다는 소리를 따라가면 누아가 있는 숲의 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군.”
【…그렇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이 미궁인 이유는 밖에서 들어온 자들을 헤매게 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숲의 주인인 누아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영원히 가둬 두기 위해서 숲을 시시각각 변화하는 미궁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릴 안내해. 누아가 있는 곳으로.”
도진이 그것을 요구한 순간.
알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테그란을 휘감았다.
마치 그를 지배해 명령을 듣게 만드는 듯한 모습.
[퀘스트]
정령용이 남긴 것
등급: 히든
[영원을 노래하는 숲의 비극을 알게 되었다.
이 비극에 종지부를 찍어 보자.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정령용이 남긴 알도 그것을 원하는 것 같다.]
퀘스트 내용도 갱신됐다.
그러나 도진은 바로 퀘스트 창을 치워 버렸다.
‘이젠 퀘스트고 뭐고 상관없어.’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도진은 여전히 누아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려 하며 버둥대는 테그란에게 명령했다.
“누아가 있는 곳으로 우릴 안내해.”
그거라도 해. 이 빌어먹을 미친 노인네야.
* * *
도진과 782번은 테그란을 앞세워 누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의 몬스터는 전부 누아의 원념 어린 울음을 피해 도망치려는 것들.
그런 놈들이 누아의 소리가 강해지는 안쪽을 향해 다가갈 리가 없으니 가는 길목은 텅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으그그그극……!】
중간중간 테그란의 영혼도 경련하며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그때마다 도진이 들고 있는 정령용의 알이 힘을 발휘했다.
그렇게 나아가고 나아간 끝에, 도진과 782번은 마침내 모든 게 메마른 나무도 풀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엔 오직 하나의 짐승만이 있었다.
목뼈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채 엎드려 있는 사슴.
“…누아.”
신록 누아였다.
누아는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피를 핥으며 포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도진에겐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괴롭힌 죄인들에게만 들려주기 위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
그러나 그것도 딱 여기까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던 누아가 도진을 바라봤다.
-그르르르륵……!
피 끓는 소리를 내며 누아가 눈을 붉게 물들였다.
상처 입은 짐승은 겁이 많아지고 경계심도 강해지기 마련이다.
누아는 자신의 보금자리이자 은신처에 다가온 생소한 인간을 적으로 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