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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등급이란 빛나는 이름을 제쳐두고 봐도 룬 건틀렛은 아름다웠다.
무광 처리된 금색 금속 표면에 세공된 마법이 흐르는 회로와 빈 공간을 메우는 마법 문자 룬.
도진은 룬 건틀렛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천 장갑과 룬 건틀렛의 금속 표면이 닿았다.
차가움과 딱딱함에 이어 전기가 통하는 찌릿한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그 순간 느슨하던 룬 건틀렛이 손에 맞춰 딱 맞게 줄어들었다.
“이게 기본 형태구나.”
손가락 관절이 분리된 형태만 아니면 가죽 장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얇고 심플한 모습.
하지만 매직 건틀렛의 본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 모습은 검으로 치면 검집 안에 납검되어 있는 상태라고 보면 된다.
매직 건틀렛의 본모습은, 마법사가 전투에 임할 준비를 할 때 드러난다.
“그럼 본모습 좀 볼까.”
도진은 마나를 운용했다.
그 순간 룬 건틀렛이 금속 실을 뿜어냈다.
파악, 하고 터져 나온 실은 도진의 팔을 타고 올라, 꽉 그의 팔을 조였다.
순식간에 손목 어림까지만 오던 룬 건틀렛은 도진의 팔을 완벽하게 감싸는 완갑 형태로 변형되어 있었다.
‘…….’
룬 건틀렛의 극적인 변화에 이런 변형 기능에 나름 익숙한 도진도 깜짝 놀랐다.
‘엄청 얇아서 팔뚝 중간 부분까지 감싸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봉인이 다 안 풀렸어도 유물은 유물이다, 이건가.’
매직 건틀렛은 전장에 서는 마법사를 위해 고안된 실용성에 무게를 둔 병종이다.
마법사의 무기로서의 기능인 마법의 증폭, 속도 향상, 부하 감소를 챙기면서 양손은 자유롭게.
비교적 넓은 금속 표면에 각인 세공 등을 통해 추가적인 기능을 부여하고, 최악의 경우 접근전에서 소형 방패 정도의 방어력까지 챙기는 게 매직 건틀렛의 목적이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무기에 비해서 마력 증폭 효율이 떨어져서 비인기 장비긴 했었지.’
하지만 장점만 있는 물건은 없는 법.
매직 건틀렛은 다른 병종에 비해 붙은 마법 공격력이 낮은 편이었다.
방어에 써먹을 수 있다는 장점도, 공격 몇 번 막으면 매직 건틀렛이 파손되어 성능 저하가 발생하는지라 그리 큰 메리트가 되지 못했었다.
‘그런데 또 유물 등급 매직 건틀렛이면 얘기가 다르지.’
그렇다. 매직 건틀렛이 갖는 단점은 어설픈 S등급 장비 아이템까지만 적용되는 것.
규격 외로 분류된 유물 등급부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필살 룬」의 효과인 크리티컬 100퍼센트만 따져도 웬만한 S급 장비로는 비비지도 못할 공격 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깨알 같은 공/방 스탯 100도 부가적인 옵션임을 감한다면 무시 못 할 정도고.
심지어 봉인이 일부만 풀려서 능력이 억제된 게 이 정도다.
나중에 추가로 봉인을 풀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도진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함께 성장하는 무기. 캬, 이게 로망이지.’
뿌듯한 눈으로 자신의 팔을 완전히 감싼 룬 건틀렛을 보며 도진은 레벨업 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최대한 빠르게 봉인 벗겨 줄 테니까.”
그래, 일단 레벨업. 레벨업부터 하자.
다음 목표인 <영원을 노래하는 숲>은 혼자서는 최소한 90레벨은 찍어야 발이라도 들여 볼 엄두를 낼 곳이니.
“아, 맞다. 장비 세팅도 새로 해야겠네.”
당장 몬스터 면상에 마법을 날리고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도진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무기를 얻었는데…….”
장비 세팅이 그냥 되는 대로 주워 입은 누더기 세팅이라니.
지금까지는 성장하는 길목이라 생각해서 적당한 걸 적당한 값에 사서 끼고 있었다.
하지만 유물 장비를 얻었으니 제대로 된 세팅을 할 때가 된 것이다.
‘마법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치명타 세팅이 가능해졌으니 그에 맞는 세팅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마법사는 치명타, 그러니까 크리티컬 옵션에 있어 매우 손해를 보는 클래스였다.
마법 자체가 위력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치명타가 쉽게 터지면 정말 공격력이 미쳐 날뛰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치명타가 거의 뜨지 않게 만들어졌기 때문.
모든 장비 부위에서 치명타 확률 옵션을 끌어당겨도 기껏 10퍼센트 언저리가 한계이니, 치명타 세팅은 마법사에겐 거의 불가능한 세팅이었다.
그런데 유물 장비로 치명 100퍼센트라는, 물공캐도 도달하기 힘든 영역에 도달했다.
‘이거 부위별로 옵션 잘 분배해서 제대로 세팅하면… 진짜 개사기캐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는데……?’
도진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능력치 조합을 이리저리 가져가 붙여 봤다.
뭘 해도 멋질 거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 * *
장비 세팅은 어려울 게 없었다.
예전에는 세팅 짜는 것도, 필요한 장비와 옵션을 정리하는 것도, 그걸 또 거래소니 로트라넷 거래 페이지니 돌아다니며 찾는 것도 다 혼자 해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도진아, 여기 아이템 목록 정리한 거. 로트라넷에 올라온 70레벨대 마법사 장비는 싹 다 훑어서 네가 원하는 옵션별로 정리한 거래. 70레벨 장비에서 못 찾은 옵션은 아래쪽에 60레벨대 장비로 대체했으니까 참고하라고 하더라.”
LOST는 엄청난 인기 게임이다.
가상현실 MMORPG를 한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LOST를 플레이하고 있을 정도.
그러니 라엘 엔터에서 일하는 직원 중에도 LOST 유저가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도진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장비를 스스로 발품을 팔아 찾는 대신, 회사에 맡겨 버린 것이다.
그 결과가 천지현이 이틀 만에 가져온 어마어마한 분량의 아이템 목록이었다.
“엄청 많네.”
거래소에 등록된 장비 전체를 그냥 옮겨 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많은 장비가 떴다.
그래도 이게 압축하고 압축한 거다.
[붉은 산도마뱀 비늘 로브]
등급: A
착용 레벨: 75
요구 능력치: 지능 200
옵션
마법 공격력 +15
물리/마법 방어력 +100
캐스팅 속도 +5%
[판매처: 로트라넷]
[가격: 13,000달러]
가장 위에 있는 장비의 재원을 확인한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원한 대로 꼭 필요한 정보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적혀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옵션은 딱 내가 원한 게 모여 있는데… 가격이 아쉽네. 아닌가? 하긴 지금은 70레벨대 장비도 귀한 시절이니.’
도진은 신중하게 장비 목록을 살피며 장비를 조합했다.
‘상의랑 하의 쪽에서는 공격 스탯은 포기하고 대신 방어 스탯을 꽉 채우는 쪽으로 하는 게 좋겠어. 마공은 로브에 붙이는 걸로 하고. 나머지 부위랑 장신구 쪽은 전부 캐스팅 속도로 챙기자.’
도진이 잡은 콘셉트는 속도였다.
지금까지는 「진리의 서」로 인해 캐스팅 속도가 평범한 마법사보다 월등히 빠르니, 공격 쪽에 더 투자를 했었다.
그러나 이젠 유물 무기의 존재로 인해 공격 쪽은 최소한만 투자해도 충분히 강력해지게 되었으니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 「마나지체」를 얻어서 마나 관리도 수월해졌으니까 진짜 속도만 미친 듯이 끌어올려 봐야지.’
이미 1성 마법은 즉시 시전에 가까운 속도가 나온다.
여기서 장비 세팅을 캐스팅 쪽으로 밀고, 해석을 통해 자주 쓰는 마법의 숙련도 작업을 병행하면 2성은 물론이고 3성 마법까지는 진짜 빠르게 시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적당히 빨리 나가던 대포가 이젠 더럽게 빨리 나가는 대포가 되는 거지.’
이를테면 보병용 유탄발사기가 장갑차에 달고 다니는 다연발 유탄발사기가 되는 셈.
“음, 대충 이 정도면 되겠다. 어차피 레벨 더 올리면 팔고 다시 사야 하니까 지금은 이 정도로 해야지.”
워낙 잘 정리된 목록이라 대충 골라도 다 좋은 장비였다.
“누나, 이걸로 구입해 줘. 돈은 내 정산금에서 까는 걸로 하고.”
“응? 네가 장비 필요하다고 했다는 보고 들으시고 실장님이…….”
“아니, 그냥 내 돈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고 하고 처리해 줘. 계속 받으면 미안하잖아.”
“그래도 실장님이…….”
“이번 건은 내 돈으로.”
도진의 단호한 말에 천지현이 말을 흐렸다.
“응… 네 생각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회사엔 그렇게 보고할게. 그럼 더 시킬 거 없어?”
도진이 고른 장비 목록을 체크하며 묻는 천지현에게 도진이 말했다.
“내가 끼던 무기 있거든? 그거 팔아서 장비 사는 데 보태 줘. S급이긴 한데 53레벨 아이템이라 그렇게 비싸진 않겠지만.”
“얼마에 팔아야 하는데?”
“이거 장비 목록 정리한 직원분한테 맡기면 알아서 시세대로 팔아 주겠지.”
“그런가? 알았어.”
“내가 고른 장비 다 합쳐서 얼마야?”
그러고 보니 가격 확인도 안 했네. 뒤늦게 묻는 도진.
“어… 잠시만. 골드랑 달러랑 원화랑 엔화가 뒤섞여서. 그러니까… 이걸 골드, 아니 원화로 계산하면…….”
천지현은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합계된 금액을 확인하더니, 헉 하고 숨을 삼켰다.
“…1억 4천만 원이 넘는데……?”
도진도 잠시 숨이 멎었다.
‘생각… 보다 비싸네. S는 다 거르고 A랑 B만 골랐는데.’
목구멍으로 다시 고르겠다는 말이 올라왔으나 도진은 다시 집어넣었다.
지금 도진 채널의 구독자 수가 500만을 넘긴 상황이다. 그것도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고.
조회 수도 폭발적이니, 앞으로 돈 걱정을 할 일은 웬만해선 없을 거다. 아마도.
수익 창출 허가가 아직 안 떨어진 게 걸리긴 했으나 그것도 채널 생성 이후 3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나중에 다 해결될 거다.
‘예전엔 이렇게 안 빡빡했다던데. 이래서 독점이 문제야.’
영상 매체 시장에서의 유튜브의 독점적 지위에 대한 불만을 품어 봐야 당장은 아무런 소용없는 일.
도진은 떠오른 생각들을 툭툭 털어 내고 말했다.
“그냥 처리해 줘.”
며칠 뒤. 도진은 모험가 길드에서 자신 앞으로 맡겨진 장비를 수령할 수 있었다.
* * *
장비 세팅을 완전히 갈아엎은 도진은 새로운 장비를 실험하기 위해 사냥터로 향했다.
[붉은 산돼지 - Lv.85]
첫 번째 희생양은 HP가 높기로 소문 난 몬스터 ‘붉은 산돼지’.
75레벨 5인 파티가 한 마리를 잡는 데 1분 이상을 투자해야 하는 몬스터였다.
일반 몬스터 주제에 엘리트 몬스터 취급을 받을 정도로 단단한 녀석.
붉은 산돼지가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고개를 돌렸다.
도진을 발견한 것이다.
-뀌익!
불쾌함을 짧은 울음으로 표현한 녀석은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촤아악, 촤아악. 놈의 발질에 단단한 흙바닥이 움푹움푹 파였다.
그걸 보며, 도진은 여유롭게 마법회로를 열었다.
파앗- 하고 펼쳐진 검은 실이 팔을 감싼다.
완전 전개된 「봉인된 룬 건틀렛」 표면으로 도진의 황금색 마력이 코팅되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와라, 뚱땡이.”
붉은 산돼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달린다기보다 제 몸뚱아리를 발사한 듯한 속도감.
도진이 진리의 서를 펼쳐 임전태세를 갖췄다.
《화염구》
도진이 마법을 쓰겠다고 의식함과 거의 동시에 불꽃이 피어났다.
2성 마법인 「화염구」가 거의 「불화살」급으로 빠르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만들어짐과 동시에 쏜살같이 날아간다.
-뀌익!
퍼엉! 하는 폭음과 붉은 산돼지의 단말마가 겹쳤다.
100퍼센트 치명타 옵션을 극대화하기 위한 적절한 마법 공격력과 치명타 피해 증가 옵션의 조화는 놀라운 위력을 선보였다.
비슷한 레벨 일반 몬스터에 비해 3배나 피통이 커서 피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붉은 산돼지가 한 방에 검게 그을려 배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이게 한 방 컷이라고?”
어이없는 위력에, 붉은 산돼지를 한 방에 골로 보낸 도진조차 놀랐다.
월드 이벤트 버프를 감안해도 두 방은 꽂아야 할 거라 생각했는데 한 방에 죽어 버리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마법 치명타가 미친 대미지를 자랑한다지만… 이건 진짜 미쳤는데.”
붉은 산돼지는 85레벨이지만, 몸빵만큼은 90레벨 몬스터에 버금가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 겨우 2성 마법 한 방에 골로 가다니.
히든 클래스, 유물 무기, 현금술 장비 세팅, 이벤트 버프로 인한 능력치 뻥튀기까지 겹치니 강함이 주체가 안 될 지경.
잠깐 돼지 시체를 보며 인상을 쓰던 도진의 입이 열렸다.
“봉인 다 풀렸으면 1성으로도 됐을 텐데.”
그게 좀 아쉽네. 중얼거리는 도진에겐 양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