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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도진에게 황금색으로 빛나는 실을 주었다.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지닌 운명으로 인도하는 ‘운명의 실’이야.”
“어떻게 쓰는 건데? 이거 아이템이 아니잖아?”
인벤토리에도 안 들어가는 물건이 보상이라니.
이거 아이템이 아니라 오브젝트 취급을 받는 무언가다.
그렇다는 건.
“이거 당장 써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니야. 그건 네 손에서 떨어지기 전까지는 존재할 예정이거든.”
“…손에서 놓으면?”
“한번 떠난 운명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야.”
“사라진다는 거잖아!”
“기회든 운명이든 다 그런 법이지.”
꼰대 같은 말을 끄덕끄덕 몸 전체를 주억거리며 뱉은 빛이 갑자기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여기가 유지될 수 있는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모양이네. 마지막으로 만든 소리가 사라진 걸 보니.】
‘어?’
옅어진다 싶더니, 빛의 말대로 아까처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너에게 많은 걸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럼 언젠가 다시 볼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 안녕, 무모한 인간. 아, 이 말을 잊을 뻔했네. 나에게 다음 기회를 줘서 고마워. 네 덕에 다시 찾아올 수 있게 될 거 같아. 그럼 정말 안녕.】
그게 무슨 소리야? 묻고 싶었지만,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빛이 사라지고, 새하얗던 공간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시 밝아졌을 때는 도전의 탑 바깥이었다.
“이게 무슨…….”
꿈이라도 꾼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꿈은 아니었다.
손에 아직도 황금색 실이 나풀거리는 걸 보면.
“생각할 게 산더미긴 한데… 그 전에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아이템이 아닌 오브젝트이고, 손에서 놓으면 사라진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지금 당장 써야 한다는 뜻.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지닌 운명으로 인도하는 실이라…….’
도대체 어떻게 써먹는 걸까? 써먹을 수 있으니 이런 식으로 줬을 텐데.
정말 인벤토리에 안 들어가는 건가?
다시 실험하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고 실을 가져다 대보는 도진.
하지만 역시나 실은 허공과 인벤토리의 경계에서 딱 멈춰 들어가지 않았다.
“응?”
그런데 들어가지 않는 것과 별개로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수납도 안 되는 주제에 허공에 열린 인벤토리 검은 구멍 쪽으로 일정한 패턴으로 당겨지듯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그쪽 방향에 찾는 게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에 반응하는 건가?’
확인을 위해 도진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 운명의 실이 반응할 만한 물건을 하나씩 꺼내 실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실험은 첫 번째 물건에서 끝나 버렸다.
“이거구나. 하긴 이거 말고는 지금 가진 것 중에 그럴싸한 게 없긴 하지.”
운명의 실은 인벤토리 밖으로 꺼낸 「정령용이 남긴 알」에 격렬히 반응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가진 운명이 커다라면 더 격하게 반응하는 기능이라고 있는 건지.
“에잇, 어떻게든 되겠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대로 계속 손에 쥐고 있다가는 손에 쥐가 날 지경.
도진은 황금색으로 나풀대는 인연의 실을 보석 덩어리처럼 생긴 알에 문질렀다.
그러자.
[「정령용이 남긴 알」에 인연의 실을 사용하였습니다.]
[인연의 실이 「정령용이 남긴 알」이 지닌 운명을 읽어 냅니다.]
촤르륵 하고 운명의 실이 퍼져 나가며 황금색 문자열을 허공에 띄웠다.
하지만 어떤 모양인지 읽어 내기도 전에 황금색 문자들은 순식간에 도진에게 흡수됐다.
[「정령용이 남긴 알」 연관 퀘스트가 완료될 때까지 인연의 실이 운명을 안내합니다.]
‘운명을 안내한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퀘스트]
정령용이 남긴 것
등급: 히든
[죽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나, 육신마저 소멸의 과정에 접어드는 순간에 잠시 이루어졌던 부활은 품고 있던 알을 세상에 내놓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터라 정령용이 남긴 알은 부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마음이 아프다면 알을 잘 보관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자동으로 떠오른, 이미 가지고 있던 히든 퀘스트의 툴팁이 뭉그러지더니.
[퀘스트]
정령용이 남긴 것
등급: 히든
[쓸쓸한 주검으로 남아 있던 정령용의 이름은 ‘다스칸다르’.
다스칸다르가 남긴 알을 부화시킬 방법을 알 만한 자가 있다.
전설적인 정령사 ‘테그란 베그리프’를 찾아가 보자.]
새로운 툴팁이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 히든 퀘스트 진행 방법을 알려 주는, 단서를 넘어 해답지에 가까운 툴팁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구나.”
실이 사라진 손을 보며 중얼거린 도진은 방치하고 있던 히든 퀘스트의 진행 방법이 적힌 홀로그램 창을 보며 생각했다.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된 거 같은데.’
도진이 이렇게 생각한 건 다른 게 아니었다.
테그란 베그리프.
그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테그란 베그리프가…….
‘나보고 던전 보스를 만나러 가라고? 잡으라는 것도 아니고?’
던전, <영원을 노래하는 숲>의 보스 몬스터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미 죽은 지 한참 지난 언데드 몬스터 말이다.
“이거 참… 골 때리네.”
도진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가가 비틀리는 건 왜일까.
그래, 솔직히 흥미로웠다.
아는 문제가 나와서 척척 해결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모르는 문제를 온몸을 뒤틀면서 푸는 재미도 무시 못 하는 재미거든.
“어쩔 수 없지. 궁금한 걸 참으면 병 생길지도 모르니까. 다음은 이걸로 해야겠네.”
알을 다시 인벤토리에 던져 넣는 도진.
검게 열린 구멍 안으로 보석 닮은 알이 쏙 사라졌다.
* * *
LOST 최초의 대규모 이벤트 도전의 탑.
최초로 진행되는 대규모 이벤트인 것만으로도 관심이 집중되기 딱 좋은데, 이건 창세성과 멸망성의 빛이 경쟁하는 시스템으로 유저 전체를 운명 공동체로 만들어 버렸다.
당장 도전의 탑 공략 진도가 나가질 않으면 내 경험치, 내 아이템이 위태롭게 생겼으니, 최상위권 유저의 공략 현황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상위 공략팀 전부가 8층 공략에 지속적으로 실패하면서 멸망성 디버프가 쫙 깔렸을 때는 그야말로 광기에 젖은 좀비 떼가 따로 없을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었다.
-실력, 실력 하면서 잘난 척만 했지, 뚜껑 열어 보니까 다 병신 새끼들밖에 없네.
-그저 과금 원툴. 돈 때려 박아서 힘 좀 세졌다고 목 빳빳하게 세우고 다니더니 꼴좋다.
-너네 과금하는 것도 시청자 돈 빨아서 하는 거잖아? 이번에 유명 길드는 기업 후원 받아 가면서 방송하는 거라며? 돈 벌기 참 쉽네~
호기롭게 도전의 탑 완전 공략을 외치며 방송을 하고 있던 길드, 방송인 등은 조롱과 비난으로 점철된 여론 속에서 위장에 구멍이 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 8층을 솔로 플레이로 공략을 해 버린 것이다. 도진이.
멸망성 디버프는 해결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략에 실패한 쪽이 편해진 건 절대 아니었다.
-와… 혼자서도 깰 수 있는 걸 여럿이서 몰려가서 아무도 못 깬 거야?
-방송을 접든 게임을 접든 인생을 접든 너흰 제발 뭐라도 하나 접어라.
졸지에 ‘혼자서도 깰 수 있는 걸 못 깬’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그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음에도, 무지성 억까들은 욕과 조롱을 양산했다.
자연히 조롱의 대상이 된 자들은 이를 악물고, 독기가 바짝 오른 상태로 9층 공략에 집중했다.
하지만 9층은 8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수호자 쿠사는 깨라고 만든 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진짜 현시점에 할 수 있는 세팅은 다 해 봤어요. 이거 지금 못 깹니다. 개발사에서 의도적으로 현재 스펙으로는 깰 수 없는 벽 세운 거라고요.」
「이번 트라이를 마지막으로 저희 길드는 공략 방송 진행을 그만하겠습니다. 공략 파티에 속한 길드원 전원이 너무 지쳐서 더 이상을 힘들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걸 깨라고 만들었다고? 개소리 마세요. 이거 이벤트 기간 내에 깨지면 깬 사람한테 제가 10골드 지급할게요.」
많은 유저가, 공략팀이 포기를 선언했다.
여론의 뭇매를 맞아 가며 희망 없는 트라이를 계속하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멸망성의 빛이 다시 강해졌다.
잠시 잦아들었던 디버프가 야속하게도 찾아왔다.
그럼에도 묵묵히 공략을 진행하는 팀도 있었으나, 그들의 눈에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빛이 사라져 갔다.
그때쯤이었다.
[멸망성 라베스의 빛이 사라집니다.]
[창세성 벨라가 밝은 빛을 뿜어냅니다.]
9층이 공략됐음을 의미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월드 전체에 퍼졌다.
저주가 물러나고, 축복이 내려왔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9]
도진의 채널에 영상이 올라왔다.
중요도가 중요도인 만큼 일주일이란 기간 동안 라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팀 전원이 야근을 해 가며 기획, 구성, 각색, 편집한 필살의 영상이.
그냥 봐도 감탄 나올 도진의 전투씬은 전문가의 피, 땀, 눈물을 먹고 그야말로 영화 뺨치는 멋짐을 장착했고, 당연히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 영상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배치된 이 장면이었다.
[“네가 저 문을 열지 않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멸망의 별을 억제하는 힘이 다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저 문을 연다면, 멸망의 별은 이 탑이 사라질 때까지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선택은 도전이다. 내 도전으로 로스타니아 전체에 재앙이 닥치는 걸 막을 수 있다면, 이 선택도 가치를 갖겠지.”]
지금까지 쌓아 놓은 보상을 걸고, 도전의 탑 10층에 도전하지 않으면 확정적으로 저주가 로스타니아 전체를 휩쓸 거란 수호자의 경고.
이에 망설임 하나 없이 모든 걸 잃을 각오로 도전을 선택하는 도진의 모습.
교묘한 편집의 힘에 의해 망설인 장면은 사라지고 대신 비장함만이 가득 찬 명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뽕’을 치사량으로 흡입하게 만들었다.
-이게 MMO고! 이게 RPG지!
-희생! 도전! 도진!
-9층 공략 절대 불가능하다고 이것저것 공약 건 새끼들 좆 됐쥬?
-도- 멘- 오늘도 도멘, 그를 찬양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진’세음보살.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 결과 도진의 인기는 순간적으로나마 단순한 인기를 넘어 신흥 종교가 탄생한 게 아닌가 싶은 수준까지 올라갔다.
-10층 공략 영상은 언제 올라오죠?
10층 공략 영상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끝까지 올라오지 않는 영상에 아쉬움을 표현했지만, 그것마저도 도진에겐 호재로 작용했다.
-역시 10층 공략에는 실패했구나…….
-현실적으로 9층이 그 모양이었는데 10층을 어떻게 깨겠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을걸? 자기가 하는 선택이 많은 걸 포기하는 선택이라는 걸.
도진이 10층 공략에 결국 실패했으리라 짐작한 자들을 중심으로 동정 여론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정작 도진 본인의 마음은.
‘전투도 없는데 굳이? 특히 탑지기 관련된 떡밥은 독점하는 게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아예 10층 영상은 회사에도 보내지 말아야겠다.’
별생각 없이 10층 분량을 뚝 잘라 버린 것에 불과했지만.
-그런데도 도전한 거잖아. 진짜 멋있다. 나라면 디버프든 뭐든 알게 뭐야 하고 바로 내 보상부터 챙겼을 텐데.
그걸 알 리 없는 대중은 도진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