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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새하얀 색 세상이 어디까지고 연결된, 지평선이랄 게 없는 무한한 어딘가.
그곳에서 도진이 찾을 수 있는 유채색은 자신이 유일했다.
‘여기가 10층이라고?’
말로 뱉을 생각이었으나 생각에 그쳤다.
그렇게 도진이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런, 여기에 ‘소리’를 만드는 걸 잊었잖아? 미안. 이 공간은 급하게 만드느라 채워 넣지 못한 게 좀 있어.】
그 말과 함께 새하얗기만 하던 세상에 수많은 색으로 일렁이는 빛이 나타났다.
“이제 말할 수 있을 거야. 자, 그럼 인사나 나눠 볼까, 무모한 도전자 양반?”
처음과 달리 ‘소리’로 말하는 빛의 아래쪽이 갈라지며 웃는 입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런 빛을 보며 도진은 마법회로를 활성화했다.
적이란 확신은 없지만, 적이 아니란 보장도 없었기에 전투 준비를 해 두려는 것이었다.
그걸 본 빛이 유쾌하게 일렁이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도전의 탑 10층은 시험을 위한 공간이 아니니까. 뭐, 그렇게 날을 세워야 안심이 된다면 그래도 좋지만. 난 상관없으니 편한 대로 하라고.”
빛은 자신은 무해하다는 걸 어필하고 싶은지 어울리지도 않는 팔 모양을 만들어 위로 들어 보였다.
그걸 본 도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넌 누구지? 10층이 시험을 위한 공간이 아니란 건 무슨 소리고?”
“말 그대로야. 10층은 시험을 위한 장소가 아니거든. 무모하고 용감한 도전자에게 시상을 하기 위한 시상식장이지. 이러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빛이 온화하게 일렁였다.
[도전의 탑 히든 플로어(1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도전의 탑 10층 클리어 보상 정산을 시작합니다.]
주르륵- 뜨는 시스템 메시지를 본 도진이 놀랐다.
커진 도진의 동공을 본 빛이 입을 씰룩이며 웃었다.
“봤지? 이번에 주어진 시험은 끝났어. 원래는 9층까지만 열려 있는 시험이었지만, 넌 걸려 있던 수많은 조건을 통과한 끝에 여기 숨겨진 층에 도달했어.”
“…그 조건이란 게 8층부터 시작된 보상 베팅이겠군.”
큭큭큭, 하고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는 빛.
빛 주제에 손이며 입을 만들어 저러는 게 이상했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맞아. ‘시험’을 통과하는 건 당연한 거고.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챌린지 플로어를 최초로 클리어한 자가 모든 보상을 도박판에 올려 두는 선택을 해야 하지.”
그런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도진이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조건은 그렇다 치고.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될까?”
“물론. 물론이지.”
처음부터 느껴졌던 건데, 빛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다만 이러다 홱 돌변하는 경우를 많이 겪은 도진으로서는 완전히 안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클리어 메시지까지 뜬 마당에 갑자기 뒤통수치진 않겠지.’
그러면 궁금한 거, 아니 정보부터 좀 모아 보자.
이거 분위기를 봐서 여기서, 이 이벤트 한정으로 끝날 분위기가 아니다.
큰 떡밥 냄새를 맡은 도진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넌 뭐지?”
“나? 음, 여길 만든 존재? 이건 좀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이겠네. 으음…….”
잠깐 망설임 가득한 일렁임을 뿜어내던 빛이 고민 끝에 다시 소리를 냈다.
“그냥 탑지기이자 도우미 정도라고 표현하는 게 알맞은 표현일 거 같아. 지금은 말이야. 어차피 이 이상 알려 주려고 해 봐야 지금은 ■■■■■■■■■■■■-”
갑작스레 파고드는 노이즈에 도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럽고 괴롭고를 떠나 견딜 수 있는 종류의 소음이 아니었다.
도진의 표정을 읽은 빛이 매우 시무룩하게 일렁이며 고개를 젓는다.
“봤지? 알려 주고 싶어도 알려 줄 수가 없는 입장이라.”
연기일 수도 있겠으나 빛의 표정이 너무 시무룩해서 더 묻기가 뭐 했다.
‘애초에 빛 덩어리 주제에 표정이 읽히는 게 말이 안 되는 거긴 한데…….’
어쨌든 이건 넘어가고. 다음 질문.
“그래, 좋아.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른 질문을 하는 건 괜찮겠지?”
“물론. 어서 물어봐 줘.”
빛은 이 대화가 몹시 즐거운지 흥분해서 일렁였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빛 주제에 정말 감정이 바로바로 읽히는 게 신기했다.
“챌린지 플로어, 그러니까 8층부터 보상으로 다음 층 보상을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으로 리스크를 짊어지게 했잖아? 그런데 그 끝에서 갑자기 아무런 조건 없이 입장과 동시에 클리어라는 게 이해가 안 돼. 도전의 탑은 우릴 고생… 아니, 시험하려는 거 아니었나?”
“조건이 없다니? 넌 이미 도전의 탑 10층 시험을 통과했어.”
“……?”
내가? 언제? 하는 도진의 표정에 빛이 깔깔 웃었다.
“숨겨진 히든 플로어인 이곳에 들어온 것 자체가 시험을 통과한 거야! 네가 8층과 9층의 시험을 치른 뒤에 보여 준 용기를 넘어 무모함으로 가득한 모습. 그걸 보여 주는 게 10층 입장 조건이자 10층의 시험이었던 거야.”
그게 조건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기운이 풀풀 풍기는 도진의 표정에 빛이 씨익 웃는다.
“의심하는구나? 그래, 의심 좋지. 그런 면모도 중요해. 넌 앞으로도 모든 걸 의심하고, 탐구하고, 샅샅이 살피며 나아가. 그러면서도 무모하게 최선을 추구해. 그게 이번 도전의 탑이 너에게 가르치려고 한 가치거든.”
탐구는 그렇다 치자. 이건 긍정적인 거니까.
그런데 의심?
용기를 넘은 무모함?
이런 걸 가치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걸 굳이 가르치려 드는 이유가 뭔가 하는 생각도.
“그런 걸 나한테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도진의 질문에, 빛이 어느 때보다도 밝게 일렁였다.
“의미가 있어. 아주 큰 의미가. 너는, 너희는 도도히 흐르는 운명의 흐름을 바꾸어야 해. 그런데 그게 쉽겠어? 아주 어려워. 너무 어려워.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최선이라 생각한 길로 걸어도 힘들어. 그러니까.”
일렁임이 완전히 멈췄다. 그 찰나의 순간 빛 안에서 알아보기 힘든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았다.
“너는. 너희는. 무모하게 도전해야 해. 작은 성공과 성장에 안주하지 마. 그걸로 충분할 거라 안도하지 마. 언제나 더 가지려고, 더 나아가려고, 더 무모하게 선택해. 그래야만 해.”
어떻게 들으면 무모한 선택을 종용해 남의 인생을 망치려 드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빛이 내뿜는 모든 것이 간절하여, 그게 느껴져서 도진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모함은 곧 위험함이지. 조금 더 얻기 위해 리스크를 짊어지면, 동시에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해야 할 때도 있어. 그런데도 그래야 한다고?”
빛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마치 고개를 끄덕이듯.
“그 정도는 해야 네가 말한 운명인지 뭔지 하는 걸 바꿀 수 있다고?”
이번에도 빛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걸 보며 도진은 생각했다.
‘맞는 말이야.’
도진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LOST에, 아니… 이 로스타니아라는 세계에 얼마나 많은 재앙이 찾아오는지 알고 있고, 실제로 겪었었다.
‘틀어막는 데까지 틀어막았지만, 결국 얼마나 덜 악화되느냐에 그쳤었지. 나아진 건 없었어.’
언제나 오늘이 최선이었고, 제일 좋은 때였다.
사건 하나가 발생할 때마다 조금씩 악화일로를 걸으며 천천히 죽어가는 세계였다.
결국 도진의 회귀 지점쯤에 도달했을 때는…….
‘인류 존속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까지 망가졌었지.’
도진은 이번에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새로 얻은 인생도 멋지고 행복하게 꾸며 나가겠지만.
전생의 망가진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낙이었고, 도피처였고, 안식처였던 곳이 여기다.
그런 곳이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생각은 거듭 강조하지만 애초에 없다.
‘이 빛이 하는 말이 맞아.’
적당히 성장해서, 남들보다 위에 서는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
무모하게. 하지만 안전하게.
그게 가능하겠냐고? 가능하다. 가능하게 만들면.
“걱정 마. 네가 그렇게 강조할 것도 없이, 난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거든.”
“응, 그래 보여. 그렇지 않으면 소중한 보상들을 위험천만한 도박 테이블 위에 올려 둘 리가 없잖아. 욕심도 많고, 무모하고, 과한 호기심도 잔뜩 가지고 있는 거 같아.”
“…칭찬 맞지?”
“물론이지.”
…찜찜한데. 떨떠름한 얼굴을 하는 도진을 보며 꺄르르 웃음소리를 낸 빛은 기분이 좋은지 도진의 머리 위로 한 바퀴 비행을 한 뒤 외쳤다.
“자, 질문과 답변 시간은 끝이야! 이젠 커질 대로 커진 보상을 정산할 시간이 왔어!”
보상이란 말에 도진은 가슴이 뛰었다.
이것저것 묻고 대답하면서 딱히 얻은 게 없다는 건 아쉽긴 해도, 일단 도전의 탑을 만들고 유저. 즉, 리제니안에게 시험을 부여한 존재 혹은 존재들이 리제니안의 성장을 바라는 건 확실했다.
그럼 히든 요소로 숨겨 둔 걸 다 충족시키면서 꾸역꾸역 올라온 자신에게는 그만큼 커다란 보상을 줄 터!
‘무모함, 무모함 노래를 불렀으니 무모한 선택에 대한 대가는 제대로 주겠지.’
부푼 기대를 안고 도진은 빛에 집중했다.
“너희 리제니안에게 주어지는 8층 기본 보상은 ‘모험에 도움이 될 물건’이야. 이곳에 도달한 너에겐 ‘운명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될 물건’을 줄게.”
[도전의 탑 8층 기본 보상 「S급 아이템 랜덤 상자」가 업그레이드됩니다.]
[「유물 아이템 랜덤 상자」를 획득했습니다.]
현존하는 최고 등급 아이템인 S급 아이템을 넘는 등급 ‘유물’의 등장에 도진의 심장이 덜컹했다.
이건 정말 웬만해서는 얻을 수가 없는 수준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유물 등급부터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말단이라고는 해도 랭커에 발을 걸치고 있던 도진조차 유물 아이템은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었으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진이 해야 할 경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9층에서 주어지는 기본 보상은 ‘성장에 도움이 되는 포인트’이야. 나를 만난 너에겐 ‘성장을 넘은 진화’를 선물할게.”
[도전의 탑 9층 기본 보상 ‘보너스 포인트 50포인트’가 업그레이드됩니다.]
[보유한 모든 특성이 진화합니다.]
이번엔 ‘진화’라는 거창한 말에 어울리는 보상이 시작됐다.
[마나와 관련된 모든 특성이 삭제됩니다.]
[마나 관련 특성이 하나의 특성으로 통합됩니다.]
[히든 특성 「마나지체」를 획득했습니다.]
도진은 「마나 하트」를 비롯해 마나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특성을 다수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이 진화하고, 합쳐지며 마나로 만들어진 심장을 넘어 도진의 육체 전체가 마나로 빚어진 상태가 됐다.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가 더 많은 마나를 품게 됐고, 이는 최대 마나 보유량의 상승을 가져왔다.
마나가 개입하는 모든 행위의 처리 속도와 효율이 좋아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는 마법을 다루는 도진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소득이었다.
한데,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이질적인 마안이 조금 더 완벽하게 녹아듭니다.]
[좌안(左眼)과 동화되어 우안(右眼) 또한 마안으로 거듭납니다.]
왼쪽 눈만 적용되었던 마안 「적야」가 오른쪽까지 생착됐다.
항상 따라다니던 이질적인 시야가 깨끗하게 정리된다.
동시에, 마법회로가 새롭게 추가된 마안과 연동되며 기능이 향상됐다.
적야는 대마법사인 대공이 직접 만들어 낸 마안.
마법회로 기능도 지니고 있었으나 불완전한 생착으로 완전히 발휘되지 못하다가, 지금 이 순간 도진에게 완벽하게 녹아들며 본래 지닌 기능을 완벽하게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새로운 마법회로를 발견하였습니다.]
[기존 마법회로와 연결이 완료되었습니다.]
[회로의 연산 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마법사치고 튼튼한 몸빵을 지니게 해 주었던 특성들이 진화를 했다.
관련된 메시지가 워낙 빠르게 올라가서 하나하나 눈에 담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걸 다 퍼 준다고……?’
보상을 받는 입장인 도진 본인이 어안이 벙벙할 지경인 파격… 아니, 폭력적인 보상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야. 가장 중요한 10층 보상은… ‘개척할 새로운 운명의 실’이야.”
또 있어? 놀라는 것도 지친 도진은 빛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9층에서 보상 다 걸고 도박하길 잘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도 도전, 오직 도전만 생각하며 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