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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79화 (8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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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죽을 몸.

‘죽기 전에 죽인다’는 마음으로 공격만 하는 도진.

‘9층 최강의 수호자 타이틀을 달고 물러날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공격일변도로 대응하는 쿠사.

자존심 강한 인간과 정령의 대결은 정말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했다.

어디 가서 일개 마법사 유저와 보스 몬스터가 ‘맞다이’를 하는 걸 보겠는가.

심지어 더 놀라운 건 전세가 덩치 큰 불뱀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타 죽어라, 인간!】

중2병에 단단히 걸린 환자 같은 대사를 뱉으며 불을 뱉는 쿠사.

원래대로라면 스치기만 해도 탱커가 빈사 상태에 빠져야 할 공격임에도 도진의 생명력은 찔끔 빠졌다.

불 그 자체+높은 마방+법사치고 높은 체력 스탯의 삼중주는 도진에게 무적에 가까운 몸빵을 부여했다.

반면 도진이 쏘아 대는 물과 얼음 마법은 불의 숙명을 타고 난 쿠사에게 아주 정직한 피해를 꼬박꼬박 누적시켰다.

그러기를 얼마간.

【자, 잠깐!】

덩치가 확연히 줄어 든 쿠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도진 입장에서 휴전 신청을 받아 줄 이유는 없었다.

《얼음 구체》

냉기를 지속적으로 뿜어내며 회전하는 「얼음 구체」를 다짜고짜 날리는 도진.

쿠사는 꼬리를 휘둘러 회전하며 날아오는 얼음 구체에 열풍을 쏘았다.

불과 만난 얼음이 상잔한다.

허무하게 녹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없애기 위해 쿠사도 그만큼 자신의 힘 일부를 소모해야 했다.

아주 미세하게 쿠사의 덩치가 줄어든 게 그 증거였다.

【이, 이놈이!】

굴욕을 참아 가며 외친 ‘잠깐’이 무시당하자 울컥한 쿠사는 남은 힘 중 상당량을 퍼부어 여러 개의 불덩이를 만들었다.

그때였다.

“잠깐!”

도진이 공격을 멈추며 타임을 외쳤다.

막 공격을 퍼부으려던 쿠사가 약간 억울한지 만들어 놓은 불덩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내, 내가 왜 멈춰 줘야 하지!】

그러거나 말거나 도진은 슬쩍 로브 자락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힐링 포션과 마나 포션을 몰래 마셨다.

음… 역시 조금씩 틱 대미지가 들어오는 중이라 회복 효율이 안 좋네.

그래도 죽는 시점을 조금 미룰 정도는 되겠지.

비겁하게 혼자 회복을 꾀한 도진은…….

《얼음 화살》

《얼음 구체》

《얼음창》

바로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 와중에 대화? 웃기고 있네.

숨 마시고 뱉을 시간도 쪼개서 마법 하나 더 쓰는 게 낫지.

쿠사가 잔뜩 화가 나서는 뭐라고 지껄였지만, 도진에겐 들리지도 않았다.

도진은 그저 마법을 쓰고 또 쓸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쿠사가 멈췄다.

약간은 가볍게도, 경박하게도 보였던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순간, 도진은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조금씩 줄어들던 생명력이 고정되고, 마나 수치도 고정됐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아니 못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뭐지?’

도진은 긴장했다.

새로운 페이즈로 돌입하는 전조인가 하는 생각에.

그러나 아니었다.

【…우습구나. 이 시험을 통과하는 인간이 나올 줄은. 또, 그 인간이 너 같은 녀석일 줄은 몰랐다.】

도진이 수호자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었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결과였다.

그건 쿠사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뭔가 찜찜한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런 쿠사의 오른쪽에서 도진에 의해 소멸되었던 삭풍이 돌풍과 함께 나타났다.

【아니, 충분하다. 저자는 충분히 실력을 입증했다.】

【…….】

입을 꾹 다문 쿠사의 좌측에서 돌이 솟아올라 새의 형상을 갖췄다.

문다였다.

【나도 삭풍과 같은 생각이다. 분명 쿠사의 시험을 통과한 방법은 편법에 가깝고, 또한 격조 없고 과격한 것이었지만……. 가끔은 극복하기 어려운 벽을 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돌로 만들어진 깃털을 고르며 도진을 힐끔 본 문다가 부리를 딱 부딪친다.

자신이 할 말은 그것이 다라는 듯이.

【…너희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리고 어차피 규칙으로 정해진 기준을 통과한 이상, 저 인간이 시험을 통과한 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

쿵. 쿠사가 꼬리로, 삭풍이 검집으로, 문다가 다리로 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셋이 동시에 겹쳐 말했다.

【도전의 탑에 도전하여 우리의 시험을 통과한 최초의 인간이여, 선택하라.】

[도전의 탑 9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메시지가 뜨고.

나란히 서 있던 셋 중 삭풍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인간, 선택해라.】

문다가 후웅 하고 날아오르며 말했다.

【이곳에서 너는 두 가지 보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번에는 쿠사가.

【하나는, 네가 강해질 수 있는 무언가를 받아서 네가 올라왔던 길을 따라 너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또 하나는.

【이곳을 넘어 저 위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기회를 갖는 것.】

넌, 무엇을 선택하겠느냐. 세 정령의 목소리가 겹쳐 묻는다.

쿠웅 하고 세 정령의 뒤쪽으로 문이 솟아올랐다.

도전의 탑 상층으로 갈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보상 업그레이드 유저 특전.]

[10층 입장 기회가 주어집니다.]

[10층 입장 티켓 수령 선택 시 모든 보상은 10층 보상 업그레이드로 대체됩니다.]

[9층 보상 선택 시 도전의 탑 도전은 종료됩니다.]

그러면서 뜨는 시스템 메시지.

도진은 당황했다.

‘이게 뭐야? 10층을 가려면 또 도박을 해야 한다고?’

도진은 다짐했었다.

보상 가지고 하는 도박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베팅을 잔뜩 해 둔 9층 보상을 수령하고, 편한 마음으로 10층에 도전하는 게 도진의 계획이었다.

정보도 있었고, 공략 수단도 강구해 뒀던 9층과 달리 10층은 정말 미지의 영역이니까.

한데 보상을 받아 버리면 아예 10층 입장 자체를 할 수 없다니.

‘그럼 사실상 9층이 도전의 탑 마지막 층이고, 10층은 히든 플로어쯤 된다는 거겠군.’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도진의 마음속에선 엄청난 고뇌가 소용돌이쳤다.

그때, 쿠사가 도진에게 말을 걸었다.

【고민되는가, 인간?】

그래도 몇 마디 말을 섞으며 약간의 친근함이 생긴 쿠사였기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고민되지. 10층에 가 보려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한다는 건데.”

【10층에서도 시험을 통과하면 되는 일 아닌가?】

도진이 피식 웃었다.

“여기서도 꽤 고생을 했는데 10층이라고 쉬울까? 오히려 더 어렵겠지.”

쿠사가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신 없어 보이는구나. 나에게 겁 없이 덤볐던 녀석이. 그럼 겁먹은 짐승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가면 될 일이다. 무엇을 고민하는 거냐?】

쿠사의 물음에, 도진이 쿠사 뒤편으로 있는 문을 가리켰다.

“거기에 뭐가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고민하는 중이다.”

【호기심이구나.】

“그래.”

【그럼 내가 저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 주마.】

“……?”

갑자기 친절하게 구는 쿠사를 의아한 눈으로 보는 도진.

그런 그를 얇게 뜬 눈으로 보던 쿠사가 크하하! 하고 웃었다.

【거짓말이다! 아니, 애초에 난 그걸 알려 줄 수 없다. 나도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거든!】

아까 비겁한 짓을 했던 네놈에 대한 복수다! 하고 더 크게 웃는 쿠사.

그런 쿠사를 보며 삭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하군.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마라. 저런 녀석은 내가 아는 정령 중 저 녀석뿐이니.】

뭐? 내가 뭐? 하고 쿠사는 눈빛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삭풍과 문다는 무시했다.

【너의 고민은 타당하다. 호기심은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하나 재앙을 부르는 단초가 되기도 하는 법이니.】

점잖은 목소리로 말문을 연 문다는 도진과 10층으로 통하는 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다만 내가 너의 선택에 무게추가 되어 줄 사실을 하나 알려 주마.】

“그게 뭐지?”

【네가 저 문을 열지 않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멸망의 별을 억제하는 힘이 다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저 문을 연다면, 멸망의 별은 이 탑이 사라질 때까지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9층까지만 깨면 며칠 후에 버프 끝나고 디버프 시작. 10층에 내가 들어가기만 하면 깨든 안 깨든 월드 이벤트 끝날 때까지 버프 유지라는 건가?’

온 누리의 경험치가 도진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다른 사람들 경험치 덜 먹고 더 먹는 건 도진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다만.

‘월드 전체에 뿌려지는 버프, 디버프의 향방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선택이라.’

이쯤 되니 도대체 저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궁금증이 커졌다.

‘…보상 중요하지. 중요한데.’

이성이, 머리가 날뛴다. 당장 9층 보상을 받아서 뒤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가슴이, 감성이 날뛰는 이성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꽂아 버린다.

이런 모험을 앞두고 도망칠 거냐고.

‘하아…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건가.’

무엇을 선택할지 정한 도진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포기하는 게 큰 만큼 땄을 때 가지는 것도 많을 도박이다.’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가 커지면 희박한 확률을 뚫고 도박에 성공했을 때 따는 판돈도 커지는 법.

그러니 나쁜 도박은 아닐 것이다.

‘항상 그런 건 아니긴 한데.’

쯧 하고 혀를 찬 도진은 세 정령과 눈을 마주쳤다.

“선택하겠다.”

세 정령의 시선이 강렬하게 도진을 응시했다.

“나의 선택은 도전이다.”

【도전의 탑에 들어선 자에게 어울리는 선택이다.】

【무모하나 또한 용감하군.】

【흥, 멍청하면 용감하다더니.】

삭풍, 문다, 쿠사가 동시에 말했다.

도진은 삭풍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다에겐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다. 나의 선택을 도와줘서. 내 도전으로 로스타니아 전체에 재앙이 닥치는 걸 막을 수 있다면, 이 선택도 가치를 갖겠지.”

【우리의 시험에 성실히 임한 너라면 다른 자를 위해 안정이 아닌 도전을 택할 거란 믿음에서 한 말이었다.】

쿠사는 무시했다.

새끼, 아까 일로 삐져서는 괜히 시비나 걸고.

도진은 속 좁은 뱀 쪽으로는 눈길도 안 줬다.

[보장된 재물과 안정적인 성장을 포기하고 위대한 도전의 길을 선택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로스타니아 월드에 비치는 멸망성 라베스의 빛이 약해집니다. 멀어집니다. 창세성 벨라의 빛이 강렬하게 명멸합니다!]

[도전의 탑 10층이 개방됩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도진이 마지막으로 본 건 사라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 정령들이었다.

그리고 새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도진을 반긴 건.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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