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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 최종 결전을 앞둔 도진은 숙면을 취했다.
쌓인 피로를 풀고, 소모된 체력과 정신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최상의 컨디션 확보는 최선의 전투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역시 나이가 깡패야.”
하루 입장 제한 5회를 전부 녹이는 것은 물론 남는 시간도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며 전투 분석을 하느라 하루 수면 시간이 2시간을 넘지 않았던 며칠.
상당히 막 굴려 피폐해진 몸뚱이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고작 8시간짜리 숙면 1회로 충분하다니.
늙고 병든 몸뚱이로 살아 봤던 도진은 ‘어림’의 위대함이 새삼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컨디션은 완벽하고. 이제 나만 잘하면 되겠네.”
모든 준비를 마치고 9층 입장만 남겨 둔 도진은 회귀 전 아무도 쿠사를 쓰러뜨리지 못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원인은 버티기 힘든 지속 대미지. 유저 스펙이 좀 더 높았다면 별문제가 없었을 몬스터지만, 그게 안 돼서 다 터졌다. 그게 결론이었지.’
사실 쿠사는 스펙만 되면 별게 아니었다.
레벨 100만 넘겼어도 새로운 장비와 스킬을 얻은 유저들이 스펙빨로 도륙을 냈을 그런 타입의 보스.
문제는 도전의 탑이 등장한 시점의 유저 레벨은 최상위권이라 해도 80을 넘기지 못했다는 것.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도 들어오는 피해를 힐량이 따라가질 못하니 전투 자체가 성립되기가 힘들었다.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미래에 풀릴 장비와 스킬을 가져올 수는 없는 일이었고, 결국 한 명도 「불의 영역」 안에서 쿠사를 쓰러뜨리는 쾌거를 이룩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아무리 뫼비우스 사가 미친 개발사라고는 해도, ‘현재’의 장비와 스킬, 레벨로는 공략이 불가능한 몬스터를 내밀었다는 게.
‘그때 당시 유저들이 잘못 생각한 거지. 생존할 스펙이 안 된다고 어떻게든 그쪽을 끌어올려 보려 하다니. 결국 장비든 뭐든 한계란 게 있는 법인데.’
그렇다. 도전의 탑 이벤트 기간 안에 쿠사를 처치할 방법은 돈을 펑펑 써서 장비를 세팅하는 데 있지 않았다.
‘내 스펙을 올리는 게 아니라, 내 스펙을 반 토막 내는 페널티를 해결하는 것.’
[정령종을 제외한 종족은 모든 능력치가 반감됩니다. (-50%)]
당연히 감당하고 감내해야 하는 줄로 알고, 9층에 도전했던 모두가 간과했던 한 줄의 문구.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정령만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곳이면, 정령이 되면 된다.
도진은 그걸 위해 준비한 비장의 수단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들었다.
[정령 정수]
<라브르 호수 수중동굴>에서 얻은 정령의 기운이 응집되어 결정화 된 아이템 「정령 정수」.
일반적인 쓰임은 귀한 재료 아이템이고, 꽤 오랜 기간 그 용도만 있는 줄 알았으나, 지금으로부터 3년 이상 지난 시점에 새로운 쓰임이 밝혀졌었다.
그건 바로… ‘일시적인 정령화’.
즉.
‘9층 페널티도 상쇄하면서, 속성 저항력도 지금 존재하는 어떤 장비를 입어도 올리지 못할 만큼 올릴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쿠사 공략의 걸림돌이 되는 모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 * *
이제는 몇 번째인지 헷갈리는 N 번째 9층 입장.
[도전의 탑 9층]
[챌린지 플로어에 입장하셨습니다.]
[새로운 챌린지 플로어 페널티가 추가됩니다.]
[소모품 개수 제한이 적용됩니다.]
[정령종을 제외한 종족은 모든 능력치가 반감됩니다. (-50%)]
익숙한 메시지가 뜨고, 그걸 치워 버린다.
그러면 보이는 첫 번째 네임드 삭풍.
익숙한 공격이 날아오고, 도진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그걸 피하며 삭풍을 처치했다.
한숨을 돌리기 무섭게 다음 타자가 등장했다.
돌덩이 주제에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조류 새끼 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도진은 문다를 더 이상 창공을 날지 못하는 돌무더기로 만들어 줬다.
‘이제 시작이군.’
앞의 두 놈에게 위협을 느끼기엔 너무 고여 버린 도진이었으나 쿠사의 등장을 앞두고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공략을 위한 준비도 했고, 이론상 공략이 가능할 거 같긴 했다.
다만 그걸 실제로 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실제로 해 본 사람을 본 것도 아니라는 건 불안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무조건 된다.’
평정심을 위해 자기 암시를 걸면서도, 도진은 위가 쓰렸다.
8층 보상까지 여기다 베팅을 해 놔서 그런지 심장이 더 날뛰는 것처럼 느껴진다.
‘…9층에서 다음 층으로 넘어갈 때는 그냥 보상 받고 가야지. 심장 떨려서 안 되겠어.’
‘이번 판만 따면 절대 다신 도박 안 해.’ 하는 도박꾼이나 할 법한 다짐을 하며 기다리길 잠시.
공기가 뜨거워졌다.
그러면서 전방에 휘몰아치는 화염의 회오리.
회오리는 계속해서 형체를 만들어 가다가, 어느 순간 똬리를 틀며 뱀의 형상을 굳혔다.
[마지막 수호자가 등장했습니다.]
[화사(火蛇) 쿠사]
[최강의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당신의 강함을 증명하십시오.]
쿠사의 등장을 알리는 메시지와 함께 쿠사가 포효를 내질렀다.
9층 필드 전체에 「불의 영역」이 전개된다는 신호다.
서서히 뜨거워지던 공기가 순식간에 끓어오른다.
감각이 일정 부분 제한된 가상현실임에도 급격하게 오르는 온도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흡.”
열기가 호흡기로 들어오는 고통에 호흡을 멈춘 도진은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은 정령 정수였다.
정수는 같은 정령인 쿠사가 필드 전체에 뿌리는 열기. 즉, 정령력을 만나자 격렬하게 반응하며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초 단위로 뜨거워지는 열기에 생명력이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도진은 기다렸다.
다급한 마음에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이다!’
어느 순간 마법사로서 쌓은 경험치가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운을 삼킬 대로 삼킨 정령 정수가 깨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말이다.
말로는 설명 못 할 감각으로 타이밍을 잡은 도진의 손이 입을 향해 움직였다.
[「정령 정수」가 불의 정령의 기운을 흡수해 「불의 정령 정수」로 변화합니다.]
메시지가 뜬 것과, 정령 정수에 붉은 실금이 파지직- 하고 번진 것과, 깨지기 직전에 도진이 그걸 삼킨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무엇 하나라도 어긋났을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노린 대로 이루어졌음을 직감하며 짜릿함을 느낀 찰나 속에서 화끈함이 올라왔다.
“읍!”
입을 벌렸다간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아 필사적으로 참았다.
기운이 폭주하는 것이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 싶은 순간.
[온몸에 정령의 기운이 범람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불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균형 잃은 육체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뜨면서 도진의 눈에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붕괴라는 단어대로 온몸에 금이 가고, 그 안에서 새빨간 빛이 넘실넘실 새어 나왔다.
‘딱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늦었나.’
삼킨 정령의 기운이 지금 자신이 감당할 수준을 살짝 넘겼음을 직감한 도진이 혀를 찼다.
정령화에 더불어 시한부 생명까지 손에 넣은 셈.
‘그래도 뭐… 차라리 이쪽이 나을지도. 어차피 저놈이랑 결판을 내기 전까지만 숨이 붙어 있으면 되니까 말이야.’
이미 엎질러진 물.
도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인간과 정령의 경계에서 정령 쪽으로 많이 기우는 바람에 꼼짝없이 죽게 생겼지만, 그런 만큼 불 속성에 대한 저항력은 더 높아졌을 터.
그 증거로 쿠사는 갑작스레 눈앞에 있는 놈이 자신과 동질의 기운을 내뿜는 것이 의아한지 눈을 데룩데룩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역시나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생소한 것은 결국 적이란 결론에 도달한 쿠사가 꼬리를 휘둘렀다.
꼬리가 휘둘리는 궤적을 따라 불덩이가 우수수 쏟아졌다.
조준은 형편없으나, 조준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넓은 범위를 잠식하는 공격.
이렇다 할 대처를 할 새도 없이 사방팔방 허공에 수놓인 불덩이가 열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도진은 멀쩡했다.
‘…생각보다 더 효과가 죽이는데?’
얼마나 멀쩡한지 본인도 당황했을 정도였다.
생명력이 줄긴 했지만 아주 미미한 수준.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보다 정령 쪽에 더 가까울 정도로 정령의 기운을 삼킨 데다 그 정령의 기운을 제공한 당사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쿠사이니.
거기에 마법사 특성상 높은 마법 방어력까지 더해졌으니 피해량 감소폭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인간:정령 비율이 무너지면서, 정령 쪽으로 기운 덕에 9층 페널티가 풀려 능력치가 돌아온 것이 컸다.
【……!】
놀란 건 도진만이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게 범위 열폭발을 일으킨 쿠사 또한 깜짝 놀라 이글대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잠시 도진과 어색한 아이컨텍을 한 쿠사는 다시 입을 벌렸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본때를 보이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열풍과 화염이 뒤섞인 브레스 형태의 공격이 도진을 덮쳤다.
습관적으로 방어를 위해 마법을 쓰긴 했지만, 앞에 새운 방패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 공격은 아프긴 하네.’
자존심이 상한 쿠사의 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주 약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그리 큰 대미지는 아니다.
【네, 네놈은 뭐 하는 놈이냐? 왜 이 몸과 같은 기운을 품고 있는 거지?】
회심의 일격까지 실패한 쿠사는 진심으로 놀란 모양이었다.
갑자기 말까지 하는 걸 보니.
“…너 말할 줄 아는 놈이었냐?”
놀란 도진이 되물었다.
쿠사가 말을 했다는 소리는 전생에도 듣지 못했기에 정말 놀랐다.
【날 뭘로 보는 거냐! 이 몸 정도 되는 정령이 언어도 구사 못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쿠사는 불로 만들어진 꼬리에 불쾌감을 담아 팍팍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다 도진을 팍 노려보더니 말했다.
【흥. 어차피 네놈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걸 보아하니 내가 널 해할 수 없는 것처럼 네놈도 날 해할 수 없을 터! 날 쓰러뜨리지 못하는 한 넌 여길 벗어날 수 없음이다!】
자기는 여길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듯 코에서 불을 흐응- 하고 내뿜는 쿠사.
도진에게서 느껴지는 자기와 동질의 기운을 감지하고는 그를 자신과 비슷한 ‘불’의 존재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연하게도 착각이었다.
잠깐 그 엇비슷한 게 된 건 맞지만.
도진의 본질은 마법을 기록하는 「진리의 서」.
자신에게 기록되어 적혀 있는 마법이라면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진짜 마법사였다.
《얼음 화살》
마나의 힘으로 만들어진 얼음조각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녹아 없어지기 전에 쿠사에 닿았다.
스르륵 하고 불길 속으로 사라지듯 녹아 버리는 「얼음 화살」.
그러나 그렇게 사라졌다 하여도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얼음 화살」이 가진 마력(마법 공격력)만큼 쿠사를 이루고 있는 ‘불’과 ‘정령력’이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
쿠사의 눈이 커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난폭하게 흔들리던 꼬리도 우뚝 멈춘 채였다.
【어, 어떻게……?】
너 나랑 비슷한 동족 아니었냐? 근데 어떻게 얼음을 쏴? 일종의 배신감마저 담겨 있는 의문과 눈빛 그리고 물음.
이에 도진은 마법회로를 가동하여 더 강력한 얼음을 열심히 만들며 대답했다.
“그냥.”
쿠사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