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75화 (76/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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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흥.”

내 이름 천지현. 22살.

직업은 대기업 대리다.

이제 막 생긴 회사이긴 해도 어엿한 라엘 그룹 계열사에 근무하고 있으니 대기업 맞다.

경력이라고는 온갖 알바밖에 없는 고졸이 22살에 대기업 대리라니.

이것만 생각하면 요즘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심지어 지금은 퇴근 후 샤워를 마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더 그랬다.

“오늘도 공부를 해 볼까요~”

좋은 기분은 열정을 낳았다.

하는 일이 워낙 편해서 타 직장인분들에 비해 힘이 남아도는 걸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는 오늘도 자기 전까지 공부를 하기로 했다.

[로트라넷]

공부의 시작은 즐겨찾기 해 둔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하는 걸로 시작이다.

입사 전까지 게임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LOST에 대한 지식과 LOST를 하는 유저들 동향이나 이슈를 파악하기엔 이 사이트만 한 곳이 없었다.

“역시 요즘엔 다 도전의 탑이랑 멸망성 디버프 얘기만 하는구나.”

요즘 여긴 민심이 흉흉하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도전의 탑의 난이도와 디버프 때문이었다.

월드 이벤트를 포기하고 사냥만 하려는 사람도 멸망성 디버프로 인해 게임을 제대로 못 하는 중이라 유저 전체가 독이 바짝 오른 것 같았다.

[제목: 솔직히 이제 8층 도전 어쩌고 하면서 방송 키지도 마라.]

월드 이벤트 시작하기도 전에 최초로 클리어하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하면서 어그로 끌던 새끼들이 고작 8층 하나 못 깨서 일주일째 전 월드가 멸망빔에 익어 버리게 만드냐?

너흰 후원 빨 자격도 없다.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8층 깰 때까지 방송 끄고 시체 끌자.

며칠 전부터 8층 도전 중인 개인 방송인에 대한 공격적 글이 자주 눈에 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도진이도 요즘 8층 도전 중인 거 같던데.’

그것도 혼자서 하는 거 같아서 참 걱정이다.

나도 공지를 자세히 읽어서 도전의 탑에 솔로 모드라는 게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은 쪽이 좋은 게 아닐까?

그런데도 혼자서 도전하는 건…….

‘도진이는 1인 클리어 기록을 세우려는 거겠지? 그러면 굳이 최초로 클리어 안 해도 사람들이 엄청 놀랄 테니까.’

나름 예상도 해 보면서 나는 공부… 라기보다는 눈팅을 계속했다.

그럴수록 이번에 도진이의 선택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라이브 스트리밍 시작했으면 도진이도 욕먹었을 거 아냐.”

도진이가 욕을 먹는다니. 생각만 했는데도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에 열이 올랐다.

애가 무심해 보이고, 응? 세상 삭막하게 보이고, 응? 그렇긴 한데 그래도 얼마나 여릴… 지도 모르는데!

보증금도 없는 쪽방살이 하다 특별 보너스 받아서 보증금 1,000짜리 원룸으로 옮긴 것도 그렇고, 나이 스물둘에 무려 대기업 대리로 초고속 승진한 것도 그렇고 다 도진이 덕분인데!

괜히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을 때였다.

[제목: 야야, 디버프 사라졌는데?]

[제목: 인게임 공지 떴다. 멸망성 빛 약해짐!]

[제목: 8층 누가 깼나 본데? 스피어 길드인가?]

[제목: 스피어 애들 방금 보스룸에서 전멸했는데? 다른 데 보스까지 진행한 파티 어디임?]

새로운 글이 폭발적으로 올라왔다.

8층이 클리어됐는지 로스타니아 전역에 뿌려지던 멸망성 디버프가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이 글 저 글 눌러보며 상황을 살폈다.

‘역시 파티로 도전하는 팀에서 깼나 보네…….’

왠지 살짝 아쉬우면서도 어차피 도진이는 1인 클리어를 노리니까 괜찮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런데 잠시 후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음? 도진이잖아?

[발신자: 진이]

[누나, 숙소 올 때 내 컴퓨터에 저장된 영상 좀 대충 정리해서 회사로 보내 줘. 렌더링 중이라 당장 보낼 수가 없어서. 난 피곤해서 좀 잘게. 미안.]

다른 사람이 보면 별 내용 없는 일상적인 업무 문자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고.

그런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나는 모니터를 봤다.

8층 클리어 소식에 난리가 난 상황이 모니터 안에 있다.

그리고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 속에는 도진이의 문자.

“지금 가 봐야지.”

도진이가 ‘영상’이란 단어를 꺼내는 건 곧 대형 사건을 예고하는 거나 마찬가지.

나는 황급히 잠옷차림 그대로 차 키만 챙겨 달려 나갔다.

* * *

어디 파티가 8층을 깬 거냐?

어느 나라 파티냐?

스피어? 스피어면 미국이잖아.

아니야, 스피어는 아니래.

그럼 어디? PVE로 유명한 데면 라이신?

라코코도 시청자들 데리고 진도 꽤 나간 걸로 아는데.

그쪽도 아냐. 파티원 중에 잠든 사람 나와서 쉬러 갔었어.

그럼 어디야? 누구네 파티가 깬 건데?

멸망성의 빛이 약해졌다.

디버프는 사라졌고, 다시 버프가 찾아왔다.

그렇다는 건 8층이 클리어됐다는 소리.

그런데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며 미친 듯이 도전하던 길드도, 파티도, 스트리머도.

어느 곳도 클리어를 인증하는 곳이 없었다.

‘갓반인 파티가 깬 거네.’

그래, 일반인이 깬 거라고 치자.

그래도 이 정도로 엄청난 업적을 세웠으면 그 흔한 인증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조금 있으면 스크린샷 한 장이라도 올라오겠지.

사람들은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록 8층 클리어를 인증하는 그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8]

그쯤이었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가장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하나의 동영상이 업로드됐다.

동영상이 올라온 곳은 채널 ‘도진’.

영상의 시작은 조용했다,

아무것도 없는 화면 속에서 옅은 숨소리만 들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면이 뜨였다.

아니, 누군가의 눈이 떠지는 게 화면으로 보인 것이었다.

그러자 보이는 수많은 거미들.

바닥은 물론 외벽과 천장까지 점하고 밀려드는 거미들이 보였다.

도전의 탑 8층의 전경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시야가 선명하지? 하는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상황이 급격하게 흘러갔다.

1인칭으로 보이는 화면이 휙휙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도진이 상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미의 포위망이 허술한 방향을 찾아 달리는 도진과 그를 쫓는 거미 무리가 만드는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조금 가빠진 숨소리는 마치 화면 속 영상의 장르를 스럴러나 공포물로 비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탁, 하고 도진의 발이 제동을 걸면서 공기가 변했다.

황금빛이 일렁이고, 마법진이 떠오르고, 짧은 시간에 완성된 마법이 추적에 여념이 없는 그림자 거미 무리를 덮쳤다.

화르륵. 불길이 좁은 통로를 메운다.

거미가 타 죽기 시작하는 걸 확인한 도진이 재빠르게 다음 주문을 왼다. 이번에는 「악령 소환」.

검은색 악령 하나가 앞으로 튀어나가려다 우뚝 멈춰 선다.

도진은 그곳에 악령을 세워 둔 채 다시 달렸다.

뒷걸음질을 치는 도진의 눈에 악령을 쫓던 사냥감으로 착각하고 불길 속으로 계속 몸을 밀어 넣는 미련한 거미 떼가 보였다.

[“후우.”]

깊게 내쉬는 숨소리. 달리는 소리. 약간씩 밭아지는 숨.

얼마 안 가 새로운 소리가 섞인다. 벌레 소리다.

「기어 다니는 불」이 적이 나타나기에 앞서 미리 코너를 돌아 놈들을 반긴다.

컨트롤이 어렵다고 잘 쓰이지 않는 불 속성 마법 「기어 다니는 불」은 더없이 완벽하게 거미의 이동경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놈들을 불태웠다.

그런데 도진은 이번에는 바로 이동하지 않고 잠시 발을 멈추고 있었다.

[“3, 2, 1.”]

작은 소리로 카운트다운을 하는 도진.

[“0.”]

그리고 0을 뱉자마자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날아가는 것과 천장에서 거미 한 마리가 줄을 타고 날아들 듯 달려든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슥- 하고 「바람 칼날」이 자른 건 놈의 몸을 천장과 연결하고 있는 거미줄이었다.

이동수단에 문제가 생긴 거미는 목적지인 도진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퍼엉.

그리고 그림처럼 바닥에 착지한 놈에게 「화염구」가 꽂혔다.

2성 불 속성 마법은 거미 한 마리를 보기 좋게 구워 버렸다. 아니, 구워 버렸을 것이다.

이미 도진의 시야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기에 확인은 불가능했다.

적의 죽음을 끝까지 확인하지도 않은 도진은 이번에는 어딘지 모르게 규칙적인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1. 2. 3. 4. 5. 7. 8.

누가 봐도 일정한 리듬에 따라 일정한 거리를 움직이는 걸음.

그리고 그 끝에.

[키아아악!]

바닥이 뒤집어지며 거미 떼가 뛰쳐나왔다.

커다란 구덩이 안에서 먹잇감을 기다리다가 먹잇감이 코앞까지 다가와 멈추자 몇몇이 본능을 못 참고 튀어나온 것이었다.

도진은 타이밍을 맞춰 뒤로 도약했다.

아슬아슬하게 도진의 앞섬을 가르는 갈고리 모양의 거미발.

다른 놈들과 달리 앞발 한 쌍이 사마귀의 낫처럼 생긴 특수 개체들이었다.

몸빵도 전투력도 속도도 다 일반 개체들보다 월등하여, 어둠 속의 암살자란 별명이 붙은 8층의 골칫덩이들.

그러나 위용을 뽐내던 사마귀 닮은 거미, 멘티스 스파이더들은 튀어나오자마자 폭발에 휩쓸려 키틴질 껍질을 휘날리며 단백질 덩어리를 이곳저곳에 뿌리는 신세가 됐다.

깔끔하게 투척된 마석 폭탄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도진은 달리면서 구덩이 안쪽에도 선물로 똑같은 걸 여러 개 넣어 줬다.

밖에서 일어난 폭압에 본능적으로 웅크리고 있던 멘티스 스파이더 무리는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해 보고 좁은 곳을 가득 채운 폭발에 죽음을 맞이했다.

[“후우. 빡세네.”]

말하면서 마나 포션을 꺼내 꿀꺽꿀꺽 삼키는 도진.

높은 회복 효율을 위해 가만히 서서 연초를 태운다.

[“3, 2, 1.”]

그러다 다시 카운트다운. 자신이 정한 시간이 딱 됐는지 바로 움직인다.

단 한순간의 빈틈조차 없는 움직임과 계산이었다.

미로 뺨치는 8층을 골목골목 누비며 거미 무리가 뭉쳐 있는 곳을 격파하고, 놈들이 우회해서 뒤를 치는 루트를 미리 앞질러 격파하고.

종횡무진 8층을 누빈 도진은 어느새 보스룸 앞에 서 있었다.

보스룸으로 오기 위해 필수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몹들만 정리했기에 쓴 시간도, 쓴 소모품도 적었다.

그 뜻은 보스전에서 쓸 수 있는 힐링 포션과 마나 포션의 개수가 많이 남았다는 걸 의미한다.

해서, 동영상을 시청하는 모두가 집중한 건 도진에게 남은 ‘소모품 개수’였다.

보스전이 길어지면 힐링 포션이 아주 절실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스룸 앞에서 도진이 한 행동은 동영상 시청자는 물론 8층을 깨기 위해 도전 중인 수많은 파티가 선택한 ‘절약과 보존’이 아니었다.

동영상 속 도진이 선택한 건 낭비와 또 낭비였다.

[마력 강화 포션]

[지능 증가 포션]

[마법회로 강화 버프 스크롤]

[「지능의 축복」 버프 스크롤]

[독 저항력 증가 포션]

[마나 과부하 포션]

…….

값비싼 데다 하나하나가 부작용을 동반하여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 하다는 평을 듣는 도핑제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3분에서 5분 정도의 지속 시간이 끝나면, 제각각의 반동이 돌아와 마법은커녕 걷는 것도 제대로 못 할 후폭풍을 예약하는 모습.

[“으윽……!”]

아니나 다를까. 도핑을 끝내자마자 가슴을 움켜잡는 도진.

벌써부터 약물 오남용으로 피가 닳는 지경에 다다른 게 딱 보였다.

그걸 안정화시키기 위해 마법사용 연초를 급히 빠는 모습은 그야말로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약쟁이가 따로 없었다.

[“하아…….”]

한숨과 연기, 그리고 퇴폐미를 한껏 뱉어 낸 도진은 보스룸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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