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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하베르칸 소굴에 그냥 간 게 아니었습니다. 히든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니 하베르칸에 도달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죠. 하베르칸이 어떤 놈인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는지 같은 거요.”
“듣고 보니까 문득 처음 도진 씨 영상을 봤을 때 했던 생각이 떠오르네요. 그때 분명 이런 생각을 했었던 거 같아요. 와, 저 사람은 어떻게 처음 보는 보스 몬스터를 저렇게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걸까, 하는 생각이요. 그런데 이제 다 이유가 있었던 거군요?”
“제가 뭐라고 그 정도 사이즈 되는 놈을 만나자마자 일방적으로 팰 수 있었겠어요? 당연히 사전에 정보가 다 수집된 상태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죠.”
유정현이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그런 말씀도 하신 거네요. 유혈 길드가 없었다고 해도 잡는 데 무리가 없었을 거다. 이 말이요.”
“네. 그런데 또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자신 있었으면 리셋 된 다음에 처음부터 잡으면 되지 않았냐는 사람들이 있을 거 같아서 덧붙이자면, 하베르칸은 2페이즈로 넘어간 순간 통제가 불가능해집니다.”
“통제가 불가능해진다고요?”
“지금이야 하베르칸이 그냥 인던 보스몹 정도겠지만, LOST에서 최초니 히든이니 글자가 붙어 있을 때는 예측 불가능한 뭔가가 숨어 있어요. 하베르칸의 경우 둥지를 탈출해서 폭주하는 기믹이 그거였던 거고요.”
도진이 손가락 3개를 펼쳐 보였다.
“제가 그 히든 퀘스트를 하면서 돌아다닌 마을만 3개입니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하베르칸이 진화한 상태에서 회복까지 해 버리면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건 순식간이었을 겁니다. 히든 퀘스트 내용으로 짐작한 거지만, 그런 피해 없이 하베르칸을 막으려면 2페이즈로 넘어간 그 순간 처치하지 않으면 안 됐어요.”
거짓말이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하베르칸이 통제 불능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가장 가까운 마을 3곳은 물론 이동 경로에 놓였던 마을 전부가 폐허가 됐던 것도 사실이니.
원래 완벽한 거짓말을 만드는 방법은 다량의 진실 사이에 핵심이 되는 거짓을 섞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만든 거짓으로 도진은 ‘그거? 걔들 없었어도 나 혼자 충분했음.’, ‘스틸? 안 했으면 그대로 탈출해서 대참사 날 거라 어쩔 수 없었음.’이라는 두 가지 명분을 얻었다.
“그럼 스틸이 아니라 예견된 대형 참사를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개입을 했다는 거네요.”
유정현도 도진의 말속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 그 부분을 짚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건 됐다.
이래도 계속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그런 놈들은 뭘 해도 덮어 놓고 깔 놈들이다.
그런 영역까지 다 케어하려 들면 갈리는 건 자신의 멘탈뿐이라는 걸 도진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을 필요는 없지.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냥 나 좋다는 사람만 끌고 가면 그만이야.’
미움 받을 용기. 이게 없어서 전생에는 아예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숨어서 게임하는 패배자로 살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명만 하면서 가는 건 너무 재미가 없다. 도진은 악동 그 자체인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절반쯤?”
“절반이라는 건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건가요?”
“개인적인 원한이요.”
잘 나가다가 또 왜 이래? 도대체 어떻게 맞장구를 쳐야 할지 몰라 유정현은 울고 싶은 심정이 됐다.
자신도 나름 5년 차 방송인인데, 이렇게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 되는 게스트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울상 짓는 유정현과 달리 도진의 얼굴은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는 소년 같았다.
“솔직히 날 짜증 나게 했던 사람이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참아요? 바로 난입해서 몬스터 때려잡고, 너희가 떼로 덤벼도 못 잡은 거 난 이렇게 쉽게 잡는다, 실시간으로 보여 주고 바로 티배깅 해야죠.”
“티, 티배깅이요?”
“아,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쓸 단어가 아닌데. 조롱도 좀 그렇고, 농락도 좀 아닌 거 같고……. 음, 제가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런데 이 부분 편집 가능할까요?”
태연하게 말을 정정하는 도진을 보며 유정현은 생각했다.
‘미친놈아!’
그녀뿐만 아니었다. 라이브 스트리밍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도 난리가 났다.
-티배깅 못 참는 건 인정이지. 원수가 바닥에서 꿈틀대는데 그걸 어케 참냐고 ㅋㅋㅋㅋㅋ
-이 새끼 똘끼 미쳤네 ㅋㅋ 이미지 관리고 뭐고 좆 같아서 난입해서 쓸어 버렸음 박아 버리네 ㅋㅋ
-능력도 있었고, 이유도 있었고, 명분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저 좆 같은 놈한테 좆 같음을 선사하기 위해 한 선택이었다. 캬… 이 새낀 ‘진짜’다.
-이거 본방송만 몇 명이 보고 있는데 편집해 달래 ㅠㅠㅠ. 진짜 우리 도진이 매력 어쩔 거야. 귀엽기까지 하면 반칙 아니냐고!
여전히 이를 악물고 도진을 욕하는 사람도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런 채팅은 긍정적 채팅에 밀려 순식간에 묻혀 버리고 있었다.
이쯤 되자 인터뷰어인 유정현은 물론 현장 책임자인 황우영 피디도 해탈을 해 버렸다.
[“…정현 씨, 과하다 싶으면 이쪽에서 휴식 핑계로 촬영 잠깐 끊을 테니까 수습 걱정하지 말고 질문해요. 일단 개인적인 원한 부분부터 갑시다.”]
그래, 저 새끼 말대로 본방분은 그냥 편집으로 커버 치면 되겠지. 과한 논란이든 뭐든 화제성만 잡자. 황우영은 그리 생각하며 지시했다.
‘그럼 욕은 내가 먹잖아요, 피디님!’
유정현 입장에서는 유리 조각이 놓인 길을 걷는 셈이 됐지만, 어쩌겠는가. 방송밥 먹는 입장에서 피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음, 조금 조심스러운 질문일 수 있는데요. 혹시 지금 말씀하신 개인적인 원한이 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극히 조심스럽게 묻는 유정현.
그에 반해 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개인적인 원한이 개인적인 원한이죠, 뭐. 유혈 길드마스터 혈왕이랑 예전에 시비가 붙었던 일이 있었어요. 아마 그쪽은 기억도 못 할 겁니다.”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다. 왜냐면 혈왕이 잘못한 건 미래의 일이니까.
하지만 그건 혈왕 입장이고. 도진에겐 그 미래가 곧 과거.
겪은 일에 대해 하소연하는 거니까 이건 반만 거짓말인 게 아닐까?
‘억울하긴 할 거야. 자기 주특기인 여론 조작으로 두드려 맞고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와 픽 웃어 버린 도진은 약간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참 별거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짜증 나고 힘들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기회가 오면 복수는 해야죠. 원래 제가 눈에는 송곳으로, 이에는 망치로 대응하는 편이라.”
“하하하. 이 부분도 편집점이겠네요.”
-MC 누나 해탈한 거 봐 ㅋㅋㅋ
-나 같아도 게스트가 갑자기 눈에 송곳 꽂고 이빨 망치로 부수고 싶다고 하면 뇌가 표백될 거 같긴 해~ ㅋㅋ
-근데 결국 무슨 잘못을 해서 저렇게 미워한다는 거야? 그건 왜 언급을 안 하지?
-아, 눈치 좀 챙기라고 ㅋㅋ 말하는 거 보니까 졸라 사소한 거 같은데 ‘개초보 때 토끼 잡다가 얻어맞아서요’ 이딴 거 말하면 가오 빠지자너 ㅋㅋ
게스트도, 알아서 편집점 판단하는 인터뷰어도, 제멋대로 날뛰는 채팅창도.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현장이었다.
* * *
도진이 브레이크 없는 놈이란 걸 눈치챈 제작진 측은 최대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방향을 튼 건 제작진 측일 뿐. 그들의 소망이 부질없는 것임을 도진은 바로 증명해 보였다.
“혹시 저한테 다른 논란은 없나요?”
게스트 스스로가 자기한테 따라붙는 논란을 인터뷰어에게 묻는 광경이라니.
너무 당황스러워 유정현은 고개를 앞으로 빼며 네?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제가 게임만 하느라 그런 부분은 못 챙겼거든요.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고, 오해에서 비롯된 거면 풀고 싶기도 하고. 뭐, 하베르칸 말고는 부유대륙 때도 그렇고 이번에 깬 히든 던전도 그렇고 기껏해야 엮인 게 지인 두 명밖에 없어서 논란될 게 있나 싶긴 한데, 혹시 모르잖아요.”
유정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
겉으로는 정말 문제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도진의 예의 바르고 순진하기까지 해 보이는 말이 유정현에겐 이렇게 들렸다.
‘하베르칸 건은 끝난 거 같고. 다음은 뭐냐? 부유대륙도 그렇고 히든 던전도 그렇고 걸고넘어질 것도 딱히 없는 거 같긴 한데 혹시 트집 잡을 거 있으면 지껄여 보시든지.’ 하고.
온화하게 웃고 있지만, 왠지 툭 건드리면 확 하고 물어 버릴 거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곧이곧대로 적혀 있는 질문을 하면 계속해서 말려들 것만 같았다.
그걸 황우영 피디도 느꼈는지 이런 지시가 떨어졌다.
[“정현 씨, 컨디션 난조 때문에 잠깐 휴식한다고 멘트 좀 쳐 주세요. 라이브 스트리밍 대기로 돌리고 쉬었다 가겠습니다.”]
다소 억지스런 지시이고 방법이지만, 그마저도 유정현은 반가웠다. 그녀는 바로 지시대로 입을 열었고, 촬영은 잠시 중단됐다.
* * *
잠시 안도의 숨을 돌린 유정현은 도진에게 한마디 하려 했다.
아무리 방송을 모르는 일반인이라 해도 그렇지.
방금 그건 같이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저기요, 아무리 이런 방송이 처음-”
그러나 그녀의 말은 성큼성큼 다가온 황우영에 의해 끊겼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채 억누르지 못한 화가 넘실거리는 게 보이는 황우영의 기세에 유정현은 입을 다물고 자리를 옮겼다.
앉은 채로 황우영을 올려다본 도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제가 뭘요?”
황우영의 얼굴이 점점 더 붉게 물들었다.
“누가 인터뷰를 그런 식으로 합니까? 아무리 사전에 맞춰 보지 않았어도 흐름이란 게 있는 법인데.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흐름에 따라서 적당히 따라와 줘야 원활한 진행이 될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것보다 같이 온 매니저는 어딨어요? 아까부터 찾아도 보이질 않아.”
매니저? 아, 지현이 누나? 당연히 치워 놨지. 문제 생기면 브레이크부터 찾으려 들 텐데 그걸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잖아. 속으로 생각한 도진이 말했다.
“바쁜 일 있다고 먼저 갔어요.”
“…말이 됩니까? 촬영 현장에 연예인 버려 두고 매니저가 갔다고?”
“연예인이요? 누가요?”
도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저요? 오버가 심하시네. 저 그냥 게임만 하는 일반인이에요. 인터뷰하는 방법도 제대로 모르는. 그래서 그냥 질문지에 있던 내용 적당히 주고받으면서 티키타카 하면 되겠구나, 하고 그런 건데. 실수였나 봐요?”
황우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큰소리를 내진 못했다.
이번 건을 망치는 건 그에게 있어 재앙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 삐딱선을 타고 있는 출연자를 달래서 촬영을 재개해야 하는 상황.
“후우… 도진 씨, 추가 질문지 전달이 늦어져서 이러는 거면 미안합니다. 질문 내용 때문에 불쾌했으면 그것도 미안해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마음에 안 들거나 불쾌한 부분이 있으면 미리 얘기를 하든지, 아니면 그냥 거절 의사를 밝혔으면 될 일 아닙니까? 아무 말 없이 이래 버리면 여기 방송 만드는 사람들은 뭐가 되냐고요.”
거기까지 말한 황우영은 더욱 톤을 낮추며 도진을 설득했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까진 유쾌하게 넘어갈 만해요. 앞으로만 조심합시다. 여기서부터는 서로 감정 상할 일 만들지 말고 무난하게. 우리도 도진 씨 입장에서 거슬릴 만한 질문은 안 할 테니까 그렇게 가는 걸로 합시다. 오케이?”
도진은 난감하게 웃었다.
“뭔가 오해를 좀 하신 거 같네요. 제가 뭐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와중에 대놓고 사고 칠 놈처럼 보이세요?”
어, 그럴 놈으로 보였다, 인마.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황우영이었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다.
지금도 도진의 눈빛 한편에 위험한 광기가 번들거리는 게 언뜻언뜻 보였던 것이다.
잘못 건드리면 계속 엇나갈 것 같아서, 황우영은 백기를 들고 흔들기로 했다.
“후우, 원하는 게 뭡니까? 현장에서 맞춰 줄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맞춰 줄 테니까 말해 봐요. 대신 인터뷰어가 질문하는 거 말고는 막 나가지 않깁니다.”
그때서야 도진의 눈빛에 어른거리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도진의 부탁을 들은 황우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도진의 저의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만들어진 표정이었다.
“…의도가 뭡니까? 앞쪽에 부정적 이슈에 관한 질문을 몰아 달라니.”
도진이 자신의 논란 탭에 들어갈 모든 질문을 앞쪽으로 몰아 달라고 한 것이다.
설마 아직도 막 나갈 마음인가 싶어 보는데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이에 도진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답했다.
“논란 같지도 않은 논란 따로 해명한다고 나서서 구구절절 떠들면 모양 빠지는데, 이런 자리에선 그냥 자연스럽게 털고 갈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아니,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든가. 그럼 서로 좋게 좋게 갔을 거 아냐. 하는 억울한 눈빛을 해 보는 황우영이었으나 도진의 눈을 보곤 생각을 고쳐먹었다.
‘뼛속까지 반골인 새끼구나.’
도진의 눈에 ‘내가 해 달라고 요구하는 거는 돼. 그런데 네가 멋대로 하는 건 안 돼.’라고 적힌 게 보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가는 걸로 하고. 정현 씨랑도 잠깐 맞춰 보고 바로 촬영 다시 들어가는 걸로 합시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황우영은 다짐했다.
‘일반인은 리허설이니 대본이니 하는 게 끼어들면 오히려 버벅대? 자연스런 분위기랑 리얼리티가 생명? 좆 까라 그래. 이제부턴 무조건 대본 만들어서 달달 외우게 한다.’
도진으로 인해 15년 차 피디 황우영의 방송 철학이 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