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리스트를 보던 중 도진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들어왔다.
“유정현.”
KGN 인터뷰 진행 아나운서 유정현.
KGN의 가상현실 게임 관련 채널에서 활동하는 인기 아나운서다.
그리고 도진이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아나운서기도 했다.
당시 챙겨 보던 게임 리그 인터뷰 담당이었나?
‘고등학생 때라. 까마득하네.’
지금 나이로 따지면 겨우 1년도 안 되는 시간만 거슬러 올라가면 고등학생이지만, 이미 15년의 세월을 건너온 도진이다.
교통사고를 겪기 전 여러 의미로 싱싱했던 고등학생 때가 떠오르니 절로 눈이 아련해진다.
‘얼굴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이제 흐릿해진 팬심이라지만, 그래도 파릇파릇한 잼민이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준 이름에 가산점 붙여 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결정을 내린 도진은 바로 주강희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일단 KGN 것만 할게요. 나머지는 천천히 골라 보려고요. 할 일 생기면 그냥 안 하고요.”
[“그럼 KGN 측에 인터뷰 내용 정리해서 미리 보내놓으라고 할게요.”]
“네.”
통화를 마친 도진은 날짜를 가늠했다.
‘안달복달하던 애들이니까 늦어도 다음 주면 촬영 마칠 거고. 그러면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겠네.’
도진이 따져 보는 건 LOST 최초 월드 이벤트가 시작되는 날짜였다.
앞으로 딱 보름 남은, 많은 변화를 가져올 ‘도전의 탑 업데이트’.
“발표되면 난리가 나겠지. 이벤트 기간 동안 몇 층까지 깼느냐에 따라서 보상이 차등 지급되는 시스템이니까.”
도전의 탑 이벤트가 불러올 난리통이 벌써부터 기대돼서, 도진은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었다.
전생에는 게임 시작도 하지 않은 시기라 한참이나 지난 후에 남아 있는 영상으로나 접할 수 있었던 이벤트.
‘이번에는 챙길 건 다 챙겨야지.’
게임을 늦게 시작한 입장에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가 지나간 이벤트들이었다.
그때만 즐길 수 있는 걸 못 즐기고, 그때 얻었으면 좋았을 걸 못 얻고.
하지만 이번 인생에선 그럴 일이 없으니, 생각만 해도 도진은 마음이 꽉 찬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날짜 정해질 때까지 게임이나 하고 있어야겠-”
다, 라고 말하며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스마트폰 화면이 반짝였다. 메시지 알림이다.
그걸 본 도진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처리가 이렇게 빨라?”
연락을 받자마자 KGN 측에서 인터뷰 관련 자료를 보냈고, 일정은 도진이 정하는 날짜에 무조건 맞추겠다고 했단다.
“내가 좀 과하게 어그로를 끌긴 한 모양이네.”
* * *
시간이 흘러 며칠 뒤.
인터뷰 촬영 날이 돌아왔다.
KGN 세트장 중 한 곳에서 촬영 준비에 열을 올리는 스탭들.
황우영 PD가 스탭 사이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보조 PD를 불렀다.
“막내야!”
“네!”
뭔가를 열심히 옮기던 막내가 대답과 함께 열심히 뛰어온다.
황우영은 달려오는 막내에게 종이철을 던지며 말했다.
“이거 좀 대기실에 가져다줘라. 먼저 보냈던 인터뷰 질문지에 누락된 게 있었다고. 추가 내용이니까 확인 좀 부탁한다고 해. 그쪽에서 뭐라고 하든 그냥 얼버무리고.”
“네? 지금 촬영 들어가기 30분 전인…….”
“팍 씨! 그러니까 지금 주라는 거 아냐. 세트장에 앉히고 인터뷰하기 전에만 전달하면 우린 책임 없어. 우린 질문 내용 미리 알려 준 거니까.”
“…저쪽에서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이런 말 모르냐?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막내 PD가 그래도 걱정이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요. 선배님이 이런 식으로 전달하라는 건 질문 내용이 좀 공격적이라는 얘긴데 그러다 인터뷰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자 황우영이 한숨과 함께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막내님, 머리를 좀 쓰세요. 지금 촬영 현장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쏘는 거 걔들도 다 아는데 여기서 인터뷰를 어떻게 펑크를 냅니까. 여론 십창 날 거 뻔히 보일 텐데.”
“아하.”
막내 피디가 새삼스런 눈으로 황우영을 바라봤다.
“후우. 알았으면 가 봐.”
“네.”
후다닥 달려가는 막내 피디를 보며 황우영은 생각했다.
‘저 새끼, 저거 국장 조카만 아니면 진짜…….’
답답함에 가슴을 치던 황우영이었으나 곧 기분 좋은 생각에 표정이 풀린다.
‘이번 인터뷰만 잘되면 바로 고과 역전이다. 다음 승진 시즌 승자는 나다, 이거야.’
이미 ‘도진’이라는 화제의 인물을 데려다 놓은 것만으로도 성공이 보장됐다고 보면 되는 수준이다.
그런데 살짝 아쉬운 점이 있었으니, 사전에 보낸 질문지에 실린 내용이 다 너무 순한 맛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우영은 인터뷰 당일, 그것도 직전에 인터뷰 질문 내용을 추가 통보하기로 했다.
‘사전에 통보하지 않은 질문을 꺼내면 문제가 되지만 일단 통보만 했으면 문제가 없거든.’
민감하고 자극적인 질문을 그저 그런 의미 없는 질문들 사이에 숨겨서 확인하기 어렵게 만드는 걸로 연막까지 펼치면… 짠! 이슈와 적당한 논란이 생성될 맛깔 나는 인터뷰 방송 완성!
시청률은 물론 인터넷 이슈란을 며칠 동안 점령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말 그대로 겜잇슈가 이슈의 중심이 될 거란 말이지.”
유혈 길드 하베르칸 레이드 방송 실패.
이어지는 도진 섭외 실패.
이런 것들로 그간 자신이 국장에게 얼마나 갈굼을 당했던가.
그걸 다 만회하고 날아오를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혈 길드 때도 그 자식이 끼어들어서 망쳐 놨었지. 인터뷰 좀 하자니까 몇 달을 튕기면서 시간 끌고. 어차피 반짝하고 잊혀질 놈이 유명세 좀 탔다고 콧대만 높아져서는. 내가 반짝 스타 됐다고 유세 떨다가 훅 간 놈을 하나둘 본 줄 알아? 그런 놈들만 한 트럭이다, 한 트럭.’
자신의 추락의 원흉인 도진에게 사소하게나마 복수할 생각에 황우영의 미소는 갈수록 음흉해졌다.
* * *
“말도 안 돼요! 인터뷰 직전에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게 어디 있어요?”
도진의 대기실.
인터뷰에 앞서 당사자인 도진보다 더 부산스레 준비를 하던 천지현이 언성을 높였다.
사전에 합의된 인터뷰 질문 이외에 추가적으로 통보된 질문지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소란에 안대를 하고 자고 있던 도진이 깼다.
안대를 밀어 올리고는 게슴츠레 눈을 뜬 그를 돌아보며 천지현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지금 촬영 현장 실시간 스트리밍 쪽 체크가 급해서요! 질문 내용 검토해 보시고 문제 있는 부분은 메인 피디님한테 문의하시면 됩니다!”
“잠-”
어린 피디가 재빠르게 도망쳤다.
그의 입장에선 전달만 하고 튀라는 선배 피디의 말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었으나 당한 천지현은 황당할 뿐이었다.
“하, 참 나. 뭐 이런……!”
기가 찬다는 듯이 천지현이 씩씩 숨을 내쉬는데 문이 다시 열렸다.
아까 그 어린 피디구나!
천지현이 쌍심지를 켜며 입을 열었다.
“정말 일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하는 게 말이 된다고-”
…까지 말한 천지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다.
“일을 이런 식으로?”
천지현의 말을 따라 하며, 다음 말을 어서 해 보라는 듯이 바라보는 사람이 방금 나간 피디가 아니라…….
“시, 실장님!”
라엘 엔터의 실질적인 대빵 주강희 실장이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천지현의 허리가 90도로 굽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합을 짠 코미디 같은 장면에 도진은 큽- 하고 웃음을 참았다.
그런 그에게 눈인사를 보낸 주강희가 천지현에게 물었다.
“일을 이런 식으로, 다음에 하려던 말이 뭐였어요? 문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무슨 일이 났다는 거잖아요. 현장에서 어떤 문제라도 생기는 즉시 보고. 내가 당부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일과 관련된 상황 속 주강희는 그야말로 칼로 자른 듯 날카롭다.
그 압박감에 천지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보고했다.
어느새 천지현 손에 들려 있던 추가 질문지는 주강희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조잡하다는 표현도 민망한 수작이네요. 껄끄러운 질문에 대한 사전 협의를 촬영 들어가기 직전에 현장에서 얼렁뚱땅 넘어간다, 라.”
또각또각 굽 높은 구두 소리를 내며 도진에게 걸어온 주강희가 질문지를 넘겼다.
그러고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킨다.
도진은 그걸 소리 내어 읽었다.
“하베르칸 레이드가 유혈 길드를 상대로 한 스틸 행위라는 여론에 대한 본인의 생각.”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한 주강희가 혀를 쯧 찬다.
“얼마 전까지는 일반인이었다고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신생 기획사라고 우리 라엘 엔터를 무시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꼴에 공중파에 뿌리를 뒀다고 자기들 힘을 믿는 건지. 차가운 조소를 입가에 머금은 주강희가 도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방송 출연 아쉬운 신인이나 이런 식으로 나와도 해야 하는 줄 알고 따르는 거지. 이 질문지에 적힌 건 거절하는 걸로 할게요. 아니지… 촬영 들어가면 자기들 멋대로 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걱정할 거 없어요. 저도 현장에 있다가 선 넘는다 싶으면 바로 조치할 테니까.”
주강희는 정말 수틀리면 촬영을 엎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도진을 귀한 자산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도진은 침착하다 못해 심드렁했다.
“뭘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해요?”
도진은 별것 아니라는 웃음을 입에 걸고, 질문지를 휙휙 넘기며 말했다.
“실장님, 이거 그냥 제가 알아서 해도 되죠?”
주강희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도진 씨. 방송을 얕보면 안 돼요. 대본 쓰는 펜 끝으로 멀쩡한 사람 폐인 만드는 게 방송계예요. 물론 지금 상황이 그 정도까지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겪게 될 수도 있다고요.”
주강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도진도 잘 알고 있었다.
악의가 가미된 질문에 말실수 한 번이면 괜히 짜증 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크게 논란될 만한 일을 한 게 없는데 겁을 왜 먹어요?”
이런 장난질도 이용하기에 따라 좋은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법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