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마나를 머금어 스스로 빛을 내는 꽃과 풀이 가득한 화원.
그곳에서 카린은 화원 안에 있는 작은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는 짐덩이예요. 도움이 되기는커녕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만 됐어요.’
카린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그러다가 한숨.
또 멍하니 물을 보다가, 괜히 주변에 있는 돌조각을 주워서 호수에 던졌다.
그렇게 한참 궁상을 떨던 그녀는 갑자기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헉!”
완전히 돌아온 엘더의 감각은 대단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아버지의 기운에 감싸인 ‘인간’의 기척을 감지한 카린은 부리나케 일어나 숨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안개에 휩싸여서 나타난 건 도진이었다.
카린은 당황했다.
아버지에게 도진을 살려 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정작 그가 깨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해 둔 게 없었다.
‘어, 어떻게 하죠?’
카린은 그늘이 만들어 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도진을 훔쳐봤다.
잠시 신기한 듯 화원을 둘러보던 도진의 입이 열렸다.
“나와.”
카린의 몸이 움찔했다.
혹시 보이나? 눈치를 살핀 카린은 안도했다.
도진이 바라보는 곳이 전혀 엉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휴우. 가슴을 쓸어내리는 카린.
그러나 곧 깨닫는다.
이대로 숨어 있어 봤자 해결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카린은 후회했다.
숨지 말고 그냥 있는 편이 나았을 텐데.
지금 와서 나가면 너무 민망할 것 같았다.
‘그래요. 끝까지 없는 척하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 다른 곳에서 짠 나타나면 훨씬 자연스러울 거예요!’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는 그녀에게 도진의 목소리가 다시 꽂혔다.
“안 나와? 셋 센다. 셋 세는 동안 안 나오면 그냥 중앙대륙으로 돌아간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카린이 발을 동동 구를 새도 없었다.
“셋.”
도진은 다짜고짜 ‘셋’을 뱉어 버리고는 미련 따위 없다는 듯 화원 출구를 향해 몸을 돌린 것이다.
그걸 본 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튀어나가며 말했다.
“자, 잠깐만요! 그건 셋을 센 게 아니잖아요! 셋은 하나랑 둘 다음에 나오는 거예요!”
억울함을 한껏 담아 항의하는 카린.
도진이 다시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둘, 하나.”
“……?”
카린의 멍청한 표정에 도진이 피식 웃는다.
“거꾸로 센 거야.”
커다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카린은 도진을 손가락질했다.
“저를 속이셨군요!”
“그러게 누가 숨으래?”
“그, 그건……!”
할 말이 궁해진 카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죄송해요…….”
“뭐가?”
“…가출한 것도 그렇고, 그거 때문에 저랑 엮이게 된 거… 그리고 방해만 됐던 거랑 위험에 빠지시게 만든 거…….”
이것저것 자신의 잘못을 주워섬기는 카린.
그에 대한 도진의 대답은.
“사과는 됐고, 태양이나 보러 가자.”
뱀파이어에게 하는 일광욕 제안이었다.
“네……?”
“해 보는 거 좋아했다며. 가자고.”
“저 뱀파이어인데요?”
“혼자서는 잘도 보러 다녔으면서 나랑 가는 건 싫다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럼 됐네.
가볍게 말하는 도진을 보며 카린은 생각했다.
‘부유대륙의 지상은 온갖 마물로 가득해요. 저는 몰라도 이분은 위험할 수도…….’
하지만… 가고 싶었다.
언제나 홀로 앉아 있던 그 언덕에, 이 사람과.
‘제, 제가 지켜 주면 되는 거니까요. 어둠도 많이 먹어 둬서 태양 밑에 있어도 당분간은 능력은 그대로일 거예요.’
마음을 정한 카린의 등에서 어둠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돋아났다.
“가요!”
카린은 도진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날아올랐다.
* * *
쿠웅.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부유대륙 지상을 활보하는 몬스터가 카린의 주먹질 한 방에 쓰러지는 소리였다.
탁탁.
가볍게 손을 턴 카린이 주변을 둘러봤다.
엘더의 눈으로 아주 먼 곳까지 살핀 카린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근처에 있는 몬스터는 전부 처리한 거 같아요!”
“…그래.”
그녀는 활기찼으나 도진은 그러기 힘들었다.
주변에 널려 있는 몬스터의 레벨은 최소치가 250은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런 놈들을 한 방에 황천길로 보내는 완력이라니.
새삼 뱀파이어 엘더의 강력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회귀하기 직전에도 뱀파이어 엘더는 하위권 랭커 5인 파티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몬스터였으니까…….’
도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저물고,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시간이다.
도진은 적당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넓게 트인, 만년설 덮인 설원과 그 끝에 걸친 지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세상 전부가 희미한 달빛에 젖어 푸른색을 띤다.
“좋네.”
자연이 만들어 내는 경이로운 경관에 도진은 작은 탄성을 질렀다.
카린이 조심스레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죠? 제가 찾은 장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장소랍니다. 찾는 데만 몇 년이 걸린.”
잠시 대화가 끊겼다.
카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저무는 달만 바라봤다.
그때 툭 하고 도진이 말했다.
“네 기억 봤어.”
“어떻… 게요……?”
“날 살리면서 네 피를 썼다더라. 그래서 네 피에 담긴 기억이 보였나 봐.”
“그럼 알게 되셨겠네요. 제가… 하는 말도, 짓는 표정도 전부 가짜라는 걸. 제가 인간을 흉내 낼 뿐인 빈껍데기라는 것을요.”
카린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도진은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
영문을 몰라 쳐다보는 카린에게 도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머리야 돌이야? 손이 다 얼얼하다.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살았겠지.”
“그게 무슨…….”
“마음이 별거냐? 감정은 또 얼마나 대단한 거고? 그런 거 다 뜯어보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도진은 카린이 한참이나 찾고 있던 것들을 다 별게 아니라 말했다.
이에, 카린은 처음으로 도진을 향해 뾰족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그건 선생님이 인간이셔서 할 수 있는 소리예요! 태어날 때부터 감정도 마음도, 뛰는 심장도 가지고 계셨으니까……! 너무 당연하게 가진 것들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요!”
“아냐.”
카린의 투정을 부정한 도진은 그녀가 반박을 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감정도 그렇고 마음이란 것도 그렇고, 자라는 동안 보고, 듣고, 말하고 겪으면서 배우는 거야.”
도진이 카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인간의 감정도 만들어지는 거라고. 말투랑 표정은 말할 것도 없지. 주변 환경에 따라서 다 자란 다음에도 바뀌는 게 말투고 성격인데.”
“…모르겠어요.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요.”
“네가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하고, 연기라고 생각하고, 허상이라고 생각했던 그것들 전부 너의 일부라고.”
“전 제 안에 다른 모습을 숨기고 있는데도요?”
자신 없이 묻는 카린의 머리를 도진의 손이 쓸고 지나갔다.
“사람은 다 그래. 누구든 남한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은 다 가지고 있어.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다 숨기고 살아. 네가 그걸 숨기고 싶어 한다는 건 네가 인간답다는 증거야.”
“정말요……?”
기대와 의심이 반씩 섞인 눈빛을 향해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멍청아.”
애초에 말이야.
“마음이 없으면 네가 그런 고민을 했겠냐?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 고민들도 생기는 거야.”
“제가… 인간분들과 다를 바 없는 마음을 가진 거라고요?”
카린이 제 가슴을 쓸었다.
가슴 안에 무언가가 꿈틀대는 것 같다.
심장은 뛸 일이 없을 텐데.
엘더의 감각으로 집중해 보아도 육체적인 변화는 감지되지 않는데.
이 사람을 만난 뒤로 처음 겪는 일이 너무 많았다.
“이상해요. 여기가 아픈 거 같아요.”
달로 시선을 옮기며, 도진이 말했다.
“그게 마음이야.”
[믿을 수 없는 기적!]
[관계 형성이 불가능했던 종족과의 호감도가 해금되었습니다.]
[뱀파이어 엘더 카린 티룬드와 인연이 이어집니다.]
[인연이 이어짐으로 인해 카린 티룬드의 호감도가 ???포인트 상승하여 ???이 되었습니다.]
[관계 형성!]
[뱀파이어 로드 카르네스 티룬드가 당신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입니다.]
[카르네스 티룬드의 호감도가 50포인트 상승하여 50이 되었습니다.]
[<뱀파이어의 친구> 업적 달성]
[업적 보상: 모든 능력치 +10]
[뱀파이어 종족 전체 호감도 +10]
[퀘스트 완료!]
[30,000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인류의 큰 위협이 될 뱀파이어와의 관계를 개선하였습니다.]
[정해진 운명을 뒤틀었습니다.]
[위대한 업적 <운명을 뒤튼 자>의 달성 조건 중 극히 일부가 추가로 충족되었습니다.]
[※운명 퀘스트 완료 보상 및 <운명을 뒤튼 자> 부분 달성 보상은 NPC ‘카르네스 티룬드’의 보상으로 대체됩니다.]
수많은 메시지가 도진의 시야를 침범했다.
그것들은 모두 새로운 미래, 바뀔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