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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56화 (5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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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도진은 당황했다.

캡슐에서 눈을 떠야 할 자신이 전혀 생각도 못 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장소의 변경에 맥락이란 게 좀 있어야지.

수로에 뚫린 거대 배수구로 뛰어들면서 정신을 잃고 눈을 뜬 곳이 난생처음 보는 허허벌판이라니.

도진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발견했다.

익숙한 사람… 아니, 뱀파이어를.

칠흑 같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흡혈귀 소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언제나 방실방실 웃을 것만 같고, 바보처럼 들떠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녀인데…….

‘꼭 인형 같아.’

지금은 무생물처럼 보였다.

차라리 인형이나 마네킹이 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야.”

그런 그녀를 도진이 부른 순간이었다.

[피에 담긴 기억이 재생됩니다.]

[피와 기억의 소유자는 ‘카르네스 티룬드’와 ‘카린 티룬드’입니다.]

카르네스 티룬드? 티룬드 대공의 이름이다.

그럼 카린 티룬드는?

맥락상 눈앞에 있는, 못난이 엘더의 이름일 터.

‘설마…….’

엘더가 티룬드 대공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게 진짜 친딸이어서 그랬단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진실을 깨달은 도진의 눈이 커질 찰나.

풍경이 바뀌었다.

침대가 보인다. 누워 있는 것은 병색이 짙은 카린.

그녀는 누가 보아도 죽어가고 있었다.

「너만큼은… 너만큼은 꼭 살리겠다. 카린, 너만은 기필코……!」

그 앞에서, 아마도 티룬드 대공의 과거 모습일 사내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방법밖에 없어. 이 방법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마법사의 공방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대공이 중얼댄다.

그런 그의 주변으로 그의 고유마법이 될 ‘피(血)’를 상징하는 마법진이 부유한다.

금단의 술법이 대공에 의해 시행되었다.

대공의 영토는 흡혈의 저주로 물들고, 카린은 생전의 기억을 잃은 채 뱀파이어로서 눈을 떴다.

「이건… 내가 바란 게 아니었어!」

대공은 반쪽짜리 성공 앞에 오열했다.

하지만 이미 흡혈귀가 된 그의 눈에서는 눈물 대신 피가 흘렀다.

이후로 빠르게 카린의 성장기가 지나갔다.

18살의 육체 그대로 멈춰 버린, 마음의 성장기였다.

다만, 그것은 지독한 무채색으로 물든 시간이었다.

후회와 회한에 젖어 감정을 내비치는 일이 없어진 대공.

그런 대공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마찬가지로 인형처럼 변해 버린 모든 뱀파이어들.

그 사이에서 자라는 카린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손에 쥔 책에서 본 인간 세상을 떠올리며 상상한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카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 인간 그리고 자신을 번갈아 보며 의문을 품는다.

입매를 만져 보고, 차이점을 깨닫는다.

카린은 책에 담긴 행복한 인간의 이야기를 동경했다.

그런 그녀는 책에 나오는 대사와 행동을 무작정 흉내 내기 시작했다.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카린의 연기는 어색함에서 자연스러움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도진이 알고 있는 밝게 웃는 모습의 카린이 나타난다.

다만 웃는 건 반쪽뿐.

나머지 절반의 얼굴은 여전히 처음과 같이 무표정인 채였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저 멀리 비치는 자신의 상상 속 인간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할 정도로 밝았던 모습이 전부 꾸민 거였다니…….’

피에 담긴 기억이 불완전해서인지 아니면 기억의 소유자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해서인지 몰라도 기억의 재생은 두서없기 그지없었다.

꼭 마음의 병을 앓는 아이가 그린 그림같이.

그래서 더 씁쓸했다.

카린이 겪은 외로움과 무상함 그리고 다른 모든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피에 담긴 기억 재생이 끝나갑니다.]

풍경이 서서히 멀어진다.

그렇게 멀어지다, 도진은 어느새 드넓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앞에 밀려 있던 시스템 메시지가 폭발적으로 밀려들었다.

[가장 오래된 흡혈귀 카르네스 티룬드의 ‘진혈’이 주입되었습니다.]

[뱀파이어 엘더 카린 티룬드의 피가 주입되었습니다.]

[※경고※]

[회복 불가능한 오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카린의 과거를 보고 감상에 젖었던 도진의 등이 축축해졌다.

최초의 뱀파이어도 모자라 뱀파이어 엘더의 피까지 덤으로 주입되었고, 회복 불가능한 오염이 진행된다고?

전생에도 이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병신의 길을 걸었던 터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도진은 빠르게 쌓인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무슨 경고 메시지만 이렇게 잔뜩 쌓여 있어!’

한동안은 아무리 내려도 살벌한 경고 메시지만 가득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메시지의 내용이 변했다.

다행히 그것은 걱정과는 달리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진혈’의 주인의 개입으로 오염이 억제되었습니다.]

[‘진혈’의 작용이 정지됩니다.]

[‘진혈’의 효과로 마나 적성이 향상됩니다.]

[‘진혈’의 효과로 육체의 재생력이 향상됩니다.]

[‘진혈’의 효과로 지능이 30 상승합니다.]

[특성 「마나 친화력」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성 「뛰어난 재생력」이 생성되었습니다.]

진혈을 주입한 대공이 직접 컨트롤하여 부정적인 효과는 억제하고, 긍정적인 효과만 남겨 두었다.

그 결과 마나와 생명력에 관련된 특성 2개가 생성되어 있었다.

「마나 친화력」은 말 그대로 마나에 대한 전반적인 능력 상승을 가져오는 특성이었고, 「뛰어난 재생력」은 자연 회복 능력이 소폭 상승하는 특성이었다.

하물며 지능 스탯의 상승치가 30이다.

보너스 포인트로만 따지면 깡레벨로 6이 오른 셈이다.

‘미쳤네.’

하긴 전생에도 등장한 적 없는 티룬드 대공의 진혈이다.

값으로 따지기도 힘든 최고급 영약을 삼킨 셈이니 부작용만 해결되면 이 정도 성장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래도 피 한번 받아 마셨다고 특성 두 개에 깡스탯이 30씩 오르다니.

이게 운명 퀘스트 보상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을 해야 할 수준이었다.

‘이건 됐고.’

상황 파악을 끝내고 진정한 도진은 메시지들을 치워 버렸다.

그러기 무섭게 도진이 있는 침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누가 연 게 아니다. 그냥 열렸다.

그리고 검은 안개가 들이닥쳤고, 순식간에 어디론가 끌려갔다.

끌려가며 도진은 생각했다.

정말 빌어먹게도 한시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게임이라고.

* * *

“꽤나 오래 걸렸군. 어떤가? 나와 딸아이의 기억을 엿본 소감은.”

카린과 마찬가지로 새까만 흑발을 지닌 무서울 정도의 미남.

재생된 기억 속에 있던 대공의 모습이다.

도진은 대충 이렇게 될 걸 예상했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서재인가.’

특별할 게 없는 서재였다.

인간인 도진을 위한 배려인지 어울리지 않게 촛불 몇 개가 조명 역할을 하는 중인 게 보인다.

도진은 자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제게 그 기억을 보여 주신 게 당신이십니까?”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도진의 차분한 물음에 대공은 의외라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딱히. 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너를 살려야 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보여졌을 뿐.”

“그랬다면 굳이 저에게 감상을 물으실 이유가 없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살리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카린의 피는 필요도 없었을 터다.

대공의 진혈만으로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테니.

아니, 진혈조차 필요 없다. 그는 대마법사이자 가장 강력한 뱀파이어이니까.

그럼에도 진혈에 더해 카린의 피까지 사용했다는 건 자신에게 일부러 기억을 보여 줬다는 뜻.

‘거기다 내가 본 장면은 초반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가 카린의 기억이었다. 일부러 그것만 펼쳐서 보여 준 것처럼.’

도진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해서, 침묵하는 대공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저에게 그 기억들을 보여 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티룬드 대공이 옅은 한숨을 뱉었다.

“본 게 있으니 알겠지. 내 딸, 카린은 뱀파이어가 된 뒤 점차 불안정해졌다. 인간이던 때의 기억을 잃고, 백지부터 형성된 어설픈 자아로 그 긴 시간을 산 탓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 탓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런 그 아이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감정을 표현했다. 병마에 시달리기 전.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보였다.”

대공이 손을 들어 도진을 가리켰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너였다. 너를 걱정하는 그 아이의 눈은 진짜였다. 기억에 없는 인간 시절을 동경하여 책을 보고 사람의 감정과 말투를 흉내 내던 아이가, 진짜 제 스스로의 감정에 휩쓸려 내게 부탁을 했다.”

그래서다. 내가 너에게 나는 물론이고 그 아이의 기억까지 보인 것은.

“너는… 이를테면 실마리다. 내 딸이 오랜 세월 찾아 헤맨, 기억에도 없는 인간 시절의 마음을 되찾기 위한 실마리. 최소한 그 아이는 그렇게 느끼고 있지. 그런데 그런 네가 그 아이의 진짜 모습을 깨닫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가뜩이나 불안정한 공녀의 상태가 더 위태로워질 거란 말씀이시군요.”

티룬드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거라면, 차라리 너를 조용히 중앙대륙으로 돌려보내는 게 낫겠지. 그러니 솔직하게 대답해라.”

온갖 살벌한 이명을 지닌 티룬드 대공도 결국 아버지였다.

하긴. 지독하게 딸을 아낀 끝에 뱀파이어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1,000년의 시간도 딸을 향한 사랑은 희석시키지 못한 거겠지.

그런 대공의 모습에 도진은 진지한 대답을 위해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결론을 내린 도진이 한 대답은 이러했다.

“제가 느낀 감상은… 슬펐습니다. 뱀파이어로서 눈을 뜬 공녀는 그야말로 갓난아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때부터 혼자였죠. 대공께서는 이렇듯 딸을 사랑하시지만, 제가 본 장면들 속에서 대공이 직접 그런 감정을 내비치는 장면이 없었습니다.”

“…….”

“공녀, 아니 카린은 늘 혼자 있더군요. 혼자 책을 읽고, 혼자 상상하고, 혼자 책에 나오는 인물들을 흉내 내며 웃고 울고.”

“그건…….”

“압니다. 대공께서 그때 무얼 하고 있었는지. 더 이상 태양 아래에서 살 수 없게 된 공국의 백성들을 위해 부유대륙 밑바닥에 영원히 어두운 공국을 세우고 있었죠.”

“그게 내가 카린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딸을 더 이상 사람 사이에 섞여 살아갈 수 없는 괴물로 만든 아비로서, 최소한 그 아이와 비슷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만들어 줘야만 했으니까…….”

덤덤히 하는 말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음을, 카린을 아끼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표현하셨다면 제가 본 당신과 카린의 기억이 그렇게 슬프지 않았을 거 같군요.”

도진의 말을 들은 티룬드 대공은 생각에 잠겼다.

‘카린을 볼 때마다 나는 후회했었다. 나 자신과 카린을 괴물로 만든 내 선택을. 그래서 피했었다. 내 욕심으로 섭리를 벗어난 괴물로 만든 것이 미안해서. 하지만… 정말 미안해야 했던 것은 다른 것이었나.’

그런 그를 보며 도진은 나머지 감상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 이라고?”

“네. 대공께서는 표현은 서툴러도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시잖습니까. 이제 그 마음을 조금씩 표현하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겁니다. 그리고 카린도 혼자 자란 것치고는 아주 잘 컸잖아요? 약간 정서불안이랑 무기력증 같은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해도 성장환경을 감안하면 아주 잘 컸다고 할 수 있죠.”

“…….”

대공의 눈이 흔들렸다.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녀간의 역사를 단 몇 마디로 퉁쳐 버리는 도진의 과격함에 질려 버린 것이었다.

“최악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변하기만 하면 돼요. 시간은 아주 넉넉하실 테니까요.”

흔들리던 대공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도진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대공에게 있어 시간이란 자신과 딸을 고장 내는 존재에 불과했다.

1,000년을 그저 견디며 녹슬어 왔기 때문에.

한데 도진은 아예 반대로 얘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망가지고 녹슨 것을, 시간을 들여 고치고 닦아 내면 되는 거라고.

‘신기한 인간이다.’

그 오랜 세월 방황하던 딸을 순식간에 바꿔 놓은 것도 모자라, 후회와 회한만으로 세월을 보내던 자신마저 흔들고 있었다.

‘아니, 그저 내가 흔들릴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걸지도.’

방금 전까지 산다는 건 그냥 시간을 견디는 것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달리 느껴졌다.

견디는 게 아니라 채워 나가는 것. 해 주지 못한 것들을 해 주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이 인간 말대로 내게 시간은 흘러넘치도록 있으니.’

티룬드 대공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순간.

도진의 눈앞에는 퀘스트 진행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믿을 수 없는 업적!]

[퍼스트 블러드 카르네스 티룬드 대공의 호의를 샀습니다.]

[앞으로 뱀파이어가 인간을 적대할 확률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이어서 티룬드 대공의 입에서도 반가운 말이 튀어나왔다.

“한동안 공국에 머물도록. 큰 신세를 진 만큼 그에 어울리는 보상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무려 진혈을 주입해 주고 부작용 컨트롤까지 말끔하게 해 줬으면서 알아서 추가 보상을 입에 담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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