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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53화 (54/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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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화 메시지에 도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필 가정했던 상황 중에 최악이 걸렸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란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예상했던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 던전화는 가장 나쁜 축에 드는 것이라는 게 문제다.

‘이렇게 빠르게 던전화했다는 건 적이 신물을 들고 있다는 건데… 그럼 최소한 상급 사제는 된다는 거군.’

멸망교단 놈들이 ‘신물’이라 부르는 물건은 다양한 형태와 사용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능력이란 게 필요했다.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적의 레벨이 ‘최소’ 100은 넘길 거라고 가정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운명 퀘스트라지만 기껏해야 60레벨 지역에서 100레벨 넘는 멸망교 사제한테 살아남으라는 건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냐?’

그만두자. 없는 양심을 굳이 찾아 보려고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남은 시간 동안 버틸 궁리를 해야 했다.

일단 던전화 자체는 큰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별도의 의식도 없이 급하게 던전화 된 곳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는 그 지역에서 등장할 수 있는 몬스터의 최소 레벨로 맞춰질 확률이 높다.

기껏해야 60레벨 초반 몬스터. 도진보다 다소 레벨이 높긴 하지만, 감당 못 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집중해야 할 문제는 멸망교 사제다. 지금 당장은 무슨 짓을 해도 멸망교 사제를 정면 대결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만 칠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하다못해 지하수로의 지리라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면 무엇을 하든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할 때였다.

“이쪽으로 가면 막다른 길이에요. 오른쪽으로 걸어가야 여러 방향에서 물길이 모이는 장소가 나온답니다.”

골칫덩이가 도진에게 길을 알려 줬다.

뭐지? 왜 길을 알지?

“여기 길 알아?”

“네!”

“어떻게?”

“소리로요! 물이 흘러가는 소리, 벽에 부딪히는 소리, 물길의 방향이 꺾이는 소리를 들으면 길을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에요. 심지어 저는 선생님이 걸으면서 나는 발소리가 저 멀리 벽에서 반사되어 돌아오는 소리도 구분할 수 있답니다!”

짐덩이니 골칫덩이니 했던 거 다 취소다.

알고 보니 등에 업혀 있던 게 맵핵이었다니.

놀랍게도, 이 엘더에게 쓸모란 게 있었다.

* * *

엘더의 능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그저 소리를 통해 길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소리를 듣고 일정 범위 내의 지형을 머릿속에 3차원 도면으로 그려 낼 정도의 공간지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엘더는 여기저기서 접근해 오는 몬스터들의 소리를 듣고 경고를 해 주기도 했다.

덕분에 도진은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전투를 피해 숨어 다닐 수 있었다.

또 그런 과정에서 엘더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아낼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지하수로의 크기나 구조가 거대하다는 것이었다.

“여기보다 밑쪽에 더 넓은 공간이 있다고?”

“네. 지하에 아주 넓은 공간이 있고, 그곳으로 여러 방향에서 모인 물이 흘러들어 가는 소리가 들려요. 아, 지금 또 그 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이쪽 터널도 뒤지기 시작한 건가.”

“으음… 이번에는 이쪽으로 나간 뒤에 왼쪽으로 꺾어야 해요. 그런데 이대로 가다가는 갈 수 있는 길이 사라질 거 같아요.”

다시금 엘더를 업고 이동하면서 도진은 생각했다.

마치 토끼몰이를 당하는 사냥감이 된 것 같다고.

그래, 사냥감.

이렇게 도망만 쳐서는 결국 한낱 사냥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것도 이빨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벌벌 떨다 죽는 하찮은 짐승.

적은 실시간으로 더 넓은 구역을 장악하고 있고, 안전한 장소는 줄어들고 있다.

머지않아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 올 것이다.

힘의 차이가 현격한 상태에서 궁지에 몰리면 결과는 볼 것도 없이 죽음밖에 없을 터.

그러기 전에 무언가 해야만 한다.

‘구석에 몰리길 기다렸다가 두드려 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전에 발악다운 발악이라도 해 보는 게 낫겠지.’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는 않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상대가 멸망교 사제치고도 좀 치는 놈이면 발악 자체가 소용없는 짓이겠지만, 반대로 딱 신물을 발동할 능력만 있는 수준이라면…….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 보던 도진은 쓰게 웃었다.

‘결국 운에 맡겨야 하는 게 마음에는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해 볼 수 있는 만큼 해 보는 수밖에.’

도진은 짐덩이에서 맵핵으로 지위가 격상한 엘더에게 요구했다.

지금까지 파악한 지형 정보를 아주 자세하게 알려 달라고.

* * *

“흐으음……!”

헥슬리는 숨을 깊게 마셨다.

냄새가 난다.

물비린내와 수로에 낀 이끼에서 나는 젖은 풀 냄새.

그리고 신물이 불러들인 멸망의 냄새가.

“후후후, 버러지답구나, 버러지다워. 구석으로, 구석으로 숨어들어 가는 게 꼭 바퀴벌레를 닮아 있어.”

헥슬리의 손에 들린 멸망의 방울이 흔들린다.

그에 맞춰 균열에서 튀어나온 찌꺼기들이 헥슬리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이리저리 퍼지고, 사냥감이 도망칠 구석을 줄여 간다.

“살 구멍이 어디일까? 저기일까? 여기일까? 아니지, 아니지. 네놈이 살아남을 구석 따위는 없어. 그런데 너는 그걸 모르지. 버러지니까. 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살아 보려고 발버둥이나 치는 벌레 새끼니까. 그래, 그래야지. 끝까지 살아남을 희망이 있다고 믿고 도망쳐라, 도망쳐.”

히히힉! 하고 헥슬리는 미치광이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졌다.

그의 조종을 받고 있는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달라진 것이다.

‘아니야… 달라진 건 멸망의 사자들이 아니다. 쫓는 사냥감의 움직임이 달라지니까 사냥개들의 움직임도 달라진 거다.’

점점 더 구석으로, 구석으로만 도망치던 지능 없는 벌레 같던 놈이 밖으로 뛰쳐나오려 하고 있었다.

퍼어엉-

그걸 증명하듯 복잡한 수로를 타고 폭발음이 들려왔다.

“호오오… 발악을 해 보시겠다? 드디어 공포에 머리가 돌아 버리기라도 했나 보군.”

바퀴벌레쯤 되는 줄 알았더니 쥐새끼 정도는 된단 말이지.

헥슬리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는 탐지니 추적이니 하는 데는 재능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교단의 신물이 부여한 일시적인 권능은 그에게 멸망이 불러들인 것들의 감각을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감히… 감히 라베스 님께서 보낸 사자들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 파괴하기까지 하다니!”

얼굴을 쥐어뜯을 듯이 움켜쥔 그가 오열했다.

어렴풋하게 느껴진 균열 찌꺼기의 소멸은 그에게 있어 신의 사자가 죽음을 맞이한 것과 같은 슬픔을 안겨 줬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광신도가 미친 듯이 방울을 흔들었다.

“모여라, 모여! 우리 함께 멸망의 별 라베스 님께 반기를 드는 불신자를 처단하자!”

헥슬리는 달렸다.

폭발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감히 존귀한 라베스의 사자를 공격한 놈을 찢어 죽이러.

* * *

최대한 전투를 피해 왔던 도진은 전략을 완전히 수정했다.

좁혀 오는 포위망을 적극적으로 돌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전체 개체수가 많다 한들 몬스터들은 넓고 복잡한 수로 전체에 퍼져 있는 상태.

소리로 맵핵을 켤 수 있는 엘더를 활용하면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찾아 길을 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놈들 사이에 섞여 있는 인간이랑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거, 알고 있지?”

“넵, 걱정 마세요! 지금도 이상하게 웃는 분이 저~ 쪽에서 오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쪽 앞으로 가면 그분이랑은 계속 멀어질 수 있어요.”

“좋아. 그래도 아예 떨어지면 안 된다. 우리 최종 목적지는 물길이 모이는 곳이고, 빙빙 돌면서 놈을 거기로 유인해야 하는 거야.”

“으음, 잠시만요. 흠흠. 이제 됐어요. 최적의 루트를 벌써 완성했답니다!”

이게 멍청한데 천재인 그런 건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 길 안내에 있어서 이 엘더는 그야말로 위성의 힘을 빌리는 내비게이션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진은 맵핵의 말을 믿고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전진했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강아지 세 마리가 있을 거예요.”

그래, 안다.

벌써부터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지거든.

방향을 꺾으며, 도진은 눈에 보이는 하수구 찌꺼기를 긁어 낸 듯한 몬스터들에게 마법을 날렸다.

번쩍이는 이펙트와 함께 폭발이 일고, 몬스터들이 처리됐다.

‘마나 소모 장난 아니네.’

레벨 높은 적을 순식간에 제압하려니 마법 출력을 올려야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마나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나 소모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있는 마나를 다 털어서라도 시간을 사야 하는 게 지금 상황이었다.

“아앗! 웃음소리가 예상이랑은 다른 길로 빠지셨어요! 이렇게 되면… 저쪽이에요! 저쪽으로 가야 저희랑 마주치지 않을 거예요!”

“물 빠지는 데랑 멀어지는 길이야?”

“아니요! 오히려 더 가까워진답니다! 아무래도 저희 뒤를 쫓는 분께서는 심각한 길치인 거 같아요!”

해맑게 대답하는 엘더의 말에 도진의 입에 서늘한 웃음이 걸렸다.

“그래?”

게임에는 이런 법칙이 있다.

실수했으면 죽어야 한다는 법칙이.

길을 잘못 들었고, 그로 인해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면 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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