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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52화 (5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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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에게 줬던 500골드에 다시 500골드를 보태서 돈을 나눠 주자 도합 20명의 여자들은 도진을 거의 구세주 바라보듯 바라봤다.

지금 당장 ‘내가 신이고 이제부터 너흰 내 신도들이다!’ 하면 바로 신종 사이비 종교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을 정도였다.

‘이건 뭐 새끼 오리 끌고 다니는 어미 오리가 된 기분인데.’

졸졸졸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여자들을 의식하며 도진은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자신을 걸으면 따라오고, 멈추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멈춰 서고.

가끔 돌아보기라도 하면 수십 쌍의 눈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으니 상당히 부담이 됐다.

하지만 그나마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이제 헤어질 시간입니다.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곧바로 모험가 길드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세요.”

제국은 허가받지 않은 노예 거래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특히 제국 신민을 납치하여 거래하는 건 곧바로 모가지가 달아나는 중범죄.

영주는 자기가 연관됐든 안 됐든 숨기려 들 확률이 높았다.

황실에서 파견된 조사단이 영지를 들쑤시는 것 자체가 마르지아 자작 입장에서는 지옥문이 열리는 셈일 테니.

그래서 도진은 경비대가 아닌 모험가 길드로 여자들을 보내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동행이라도 해 주고 싶지만…….

‘지금은 저거부터 처리해야 하니까.’

모험가 길드로 뱀파이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깥에 내리쬐고 있는 햇빛도 문제고.

“이걸 가지고 가세요. 제 모험가 펜던트입니다. 이걸 보여 주면 모험가 길드에서 조금 더 빠르게 일을 처리해 줄 거예요.”

10급 모험가 따위의 펜던트를 가져가 봐야 별 도움은 안 될 거다.

하지만 여자들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보고 있으려니 무슨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는 강아지들처럼 보여서 그냥 보내기가 뭐 했다.

‘나중에 보상을 받기도 편해질 거고. 이 사람들 구출한 게 나라는 걸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말이야.’

거기에 더해 덤으로 이득도 좀 챙기고.

로스타니아에 이로운 일 하는 거. 이게 다 세계와 나누는 거래고 퀘스트고 성장 동력이다.

기껏 좋은 일 하고 낭비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 *

“후우, 드디어 좀 차분해졌네.”

여자들이 다 지상으로 올라가고, 위쪽에서 상인들과 행인들이 놀라서 내는 소리를 들으며 도진은 엘더를 바라봤다.

“멋져요, 멋져!”

엘더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진을 보며 감탄사를 뱉고 있었다.

문제는, 그 말을 바닥에 널브러져서 하고 있다는 거다.

도대체 뭔 짓을 당한 건지.

이 무능한 흡혈귀는 아직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냐? 놈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전혀 몰라?”

엘더가 으음… 하고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이렇게 된 과정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결론을 냈는지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기억 안 나요!”

“…….”

도진은 속으로 참을 인(忍)자를 그렸다.

그런 도진의 노력을 세상이 알아줬는지 흡혈귀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짐작이 가는 건 있답니다!”

“…뭔데?”

“때는 아주 오래전. 제가 아직 철이 없던 어릴 적의 이야기랍니다.”

“본론만 간단히.”

“이게 본론인걸요? 흠흠,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저는 소설책에서 본 태양이란 게 너무나 보고 싶었답니다.”

“아니, 그게 지금 상황이랑 무슨…….”

말을 끊으려 하자 엘더는 세상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 말 해라.”

그제야 활짝 웃는 낯이 된 엘더가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파아란 하늘이란 것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시다시피 그림자 공국은 부유대륙 바닥에 거꾸로 선 곳이잖아요? 그렇다 보니 제가 바라보는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거뭇거뭇한 바다였어요.”

그래서 아버지 몰래 부유대륙의 지상 쪽으로 가출을 했었죠. 아름다웠답니다. 처음 본 하늘이란 건.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어요. 밤이란 개념을 그때 처음 보았죠. 공국은 언제나 어두우니까요. 우스운 이야기를 해 드리자면, 저는 밝게 빛나는 달이 태양인 줄 알았어요. 하늘이 보이는 밤은 공국보다 훨씬 밝았거든요. 그런데 낮이란 게 찾아오고, 진짜 태양이 떠올랐을 때 알게 됐죠. 인간들에게 허락된 그 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시간인지.”

태양을 동경한 흡혈귀라. 꽤 낭만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지금 상황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도진은 그걸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질문하면 이야기가 또 딴 데로 새겠지. 괜히 더 길어질 거고. 그냥 듣자.’

해탈한 청자가 된 도진은 묵묵히 엘더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래서 저는 밤이 되면 어둠을 먹고, 낮이 되면 쌓아 놓은 어둠을 소모하며 태양을 계속해서 바라봤답니다. 그러다 결국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저는 지금처럼 몸을 가누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됐었죠. 아버지께서 저를 찾으러 오지 않으셨다면 아마 죽었겠죠. 태양 빛에 가루가 되어서.”

그러니까 결국 결론이란 건…….

“태양에 오래 노출돼서 그렇게 됐다는 거야?”

“네! 태양 중독에 걸렸을 때랑 지금 상태가 똑같아요! 그래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한 달 동안 매일 낮마다 태양을 구경했을 때도 일주일 정도 어둠을 먹었더니 다 나았었거든요!”

쓸데없이 해맑은 엘더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퀘스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불길한 관’ 퀘스트 진행을 위한 세부 목표가 설정되었습니다.]

[고위 흡혈귀 소녀는 햇빛에 중독된 상태로 짐작된다. 그녀가 힘을 되찾을 때까지 보호하도록 하자. 뱀파이어 엘더가 힘을 되찾으면, 그 무엇이 되었든 그녀를 이용하려던 음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뱀파이어 소녀의 회복까지 필요한 시간: 01:59:59

※태양이나 강한 빛에 노출될 때마다 회복에 필요한 시간이 늘어납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엘더가 일광건조를 당한 뒤에 관짝에 오래 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2시간만 더 어둠을 먹이면 회복된다고 적힌 걸 보니.

‘아직 정오도 안 된 시간. 2시간 동안 수로 밖으로 나가는 건 무리다. 결국 지하 수로에서 2시간 동안 저걸 지키면서 살아남는 게 목표라는 건데.’

이대로 2시간 동안 무사히 넘어갈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운명 퀘스트는 보상이 빵빵한 만큼 난이도도 미쳐 돌아가는 게 보통이다.

‘그래도 일단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는 도망쳐 두는 게 좋겠지.’

생각을 정리한 도진은 여전히 뭔가를 쫑알대고 있는 엘더를 들쳐 업고 지하 수로를 따라 걸었다.

도망쳐 나온 도둑놈들의 아지트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서.

* * *

스스로를 위대한 섭리를 받드는 종복이라 믿는 헥슬리는 슬펐다.

멍청한 뱀파이어 엘더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해 진정한 멸망의 도래를 앞당길 재료로 활용하려 했는데……!

“저 버러지 놈들이 지금 뭐라고 했지……? 내가 맡긴 물건이 사라졌다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어둡고 지저분한 곳에 숨어서 추잡한 짓으로 더러운 돈이나 빌어먹는 것밖에 없는 버러지들이 계획을 망쳐 버렸다.

적지 않은 돈까지 줘 가며 보관이랑 운송만 차질 없게 하라고 했더니… 아예 물건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다니.

처음에는 웬 헛소리인가 싶어서 버러지들이 물건을 빼돌리고 거짓말을 하나 싶었다.

그런데 홀랑 불타 버린 현장을 보니 웬 놈이 엘더를 훔쳐 간 게 확실해 보였다.

물론 다른 변수가 끼어들었다 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버러지들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 이 버러지들이 친 사고이니, 이놈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 세계가 섭리에 더 가까워지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해 주어야지.’

헥슬리는 고래고래 저들끼리 소리를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범죄자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때 그걸 보고 있던 헥슬리 뒤에 시립하고 있던 수습 사제가 그를 만류했다.

“헤, 헥슬리 님, 안 됩니다. 아직 저희 교단은 존재를 드러내서는 안 되니 절대 경거망동 말하는 대사제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차라리 이제라도 교단에 일을 알린 후에… 컥!”

헥슬리는 수습 사제의 목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누가 내 결정에 간섭해도 된다고 했지? 그리고 뭐……? 교단에 이 일을 알리자고? 설마 내 실패를 교단에 고자질해서 날 묻어 버리겠다는 속셈이냐? 내가 상급 사제의 자리에 영원히 올라가지 못하게 만들려고!”

수습 사제는 그게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숨 한 톨 삼킬 수 없게 목이 졸린 상태에서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탁탁. 애처롭게 제 목을 조르는 헥슬리의 팔을 쳐 대며 수습 사제가 버둥댔다.

헥슬리는 수습 사제가 고통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걸 봐.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제 할 일만 바삐 하는 버러지들을. 저런 걸 그냥 방치하는 건 멸망을 모시는 자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악이라고!”

그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에 최대한 더러운 것을 지워 놓는 것. 그게 우리 멸망의 사제들이 해야 할 본분이다!

신앙에 취해 악을 지른 헥슬리는 한결 편안해진 눈으로 수습 사제를 바라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수습 사제는 답하지 못했다.

축 늘어진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를 보며 헥슬리는 만족스레 웃었다.

“위대한 멸망이시여. 당신의 종복이 오늘 또 하나의 버러지를 지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더 많은 버러지를 청소하도록 하겠습니다. 라 디아 라베스.”

멸망을 갈망하는 자신들만의 성호를 그은 헥슬리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만약을 대비해 뱀파이어에게 남아 있는 봉인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서.

희미하긴 하지만 봉인의 잔재가 지나간 길이 보였다.

하지만 워낙 옅어서 금방 사라질 것만 같다.

마치 눈 내리는 설원에 찍힌 발자국처럼 말이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위대한 멸망이시여. 당신의 종복이 간절히 바랍니다. 이 못난 세계에 도래할 멸망의 편린을 지금 이곳에 미리 보여 주소서.”

헥슬리는 기도를 올리는 동시에 품속에서 멸망교단의 신물 「멸망의 방울」을 꺼내 들었다.

딸랑.

그가 손을 흔들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헥슬리를 무시한 채 잔불을 끄고, 추적대를 꾸리니 마니 분노를 표출하고 있던 자들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나를 따라 걸으라. 너희가 마땅히 닿아야 할 목적지로 내가 안내를 하리니.”

딸랑, 딸랑, 딸랑.

계속해서 방울을 흔들며 헥슬리는 봉인의 잔재가 남긴 흔적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지하 수로로 들어선 그는 인형처럼 자신을 따라온 범죄자들을 보며 씨이익 하고 광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기뻐하라. 하등 쓸모없는 너희들이 지금 이 순간 잠시나마 멸망을 부추길 불씨로서 사용될 수 있게 되었으니.”

딸랑.

멸망의 종이 한 번 흔들렸다.

퍼억.

남자 하나의 머리가 터졌다.

딸랑.

또 하나. 또 한 번 울리고, 또 하나가 터진다.

점차 헥슬리의 손놀림이 격해졌다.

1초에 대여섯 번의 울림이 있고, 마찬가지로 그만큼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럴수록 주변의 마나는 급속도로 오염되어 갔고, 세계의 수명이 다했을 때에나 찾아오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됐다.

“오오오오오오-!”

광기 어린 헥슬리의 포효를 배경으로,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온갖 마물을 뱉어 내는 균열이 생성된 것이다.

[특수 아이템 「멸망의 방울」 효과로 <마르지아 자작령 지하 수로>가 임시 던전화 되었습니다.]

“가아아아아-! 가서 섭리를 거스르는 무지한 버러지를 찾아 찢어 죽여어어어!”

소리 없이 태어난, 쓰레기장의 더러운 오물 덩어리를 닮은 괴물들이 지하 수로에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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