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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한참 나중에나 보여야 할 흡혈귀가, 그것도 엘더씩이나 되는 게 여기 굴러다니는 거야?’
뱀파이어들이 중앙대륙에 발을 들이는 시기는 한참 나중이다.
인간들의 피해가 커지고, 뱀파이어들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그게 또 던전이 되고.
결국 제국과 성황청이 성전까지 선포하는 지경이 되지만… 이건 미래의 이야기.
심지어 엘더급 뱀파이어는 성전 때도 중앙대륙으로 넘어오지 않았었다.
성전 치른다고 그림자 공국에 발을 들인 인간들을 사냥하기만 했지.
“그런데 그게 지금 여기 있다. 그것도 누가 봐도 납치된 모양새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도 상황 파악을 완전히 하기는 어렵지만, 이게 아주 더럽게 꼬인 상황이란 건 확실했다.
설마 관 조사해 보라고 부추겨 놓고는 흡혈귀가 눈 뜨자마자 싹 다 죽는 순살 엔딩은 아니겠지?
정말 그런 거면 그냥 뫼비우스 본사에 불지른다. 본사 소재지가 15년 뒤에도 안 밝혀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찾아서 불태울 거다.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 흡혈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누가 봐도 ‘나 곧 눈뜰 겁니다.’ 하는 모양새였다.
이에 따라 도진의 심장 박동도 덩달아 빨라졌다.
눈뜬 엘더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은 물론 이 도시 전체가 죽음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퀘스트니까, 하고 최소한 순살은 안 당할 거라고 믿고 싶지만… 이 빌어먹을 게임에 발등 찍힌 게 한두 번이어야지.’
잠깐. 설마 이게 마르지아 자작령을 싹 쓸어버린 재앙의 정체인가?
불길한 생각이 고개를 들자 도진은 당장이라도 저게 눈을 뜨기 전에 공격부터 박고 봐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선공을 갈기는 건 그야말로 ‘퀘스트니까 순살은 면하겠지.’ 하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스스로 부수는 꼴이 될 것이 확실하기에.
“으음…….”
결국 엘더가 눈을 떴다.
그리고 엘더가 가장 처음 한 말과 행동은…….
“아, 안녕하세요? 어어? 꺅!”
도진을 보고 약간 놀라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다가 중심을 못 잡고 앞으로 넘어지는 거였다.
“…….”
하아. 뭐야 시발. 상황 전개가 뭐 이따위야.
허공을 바라보며 격한 현타를 느끼는 도진 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퀘스트 선택지 발생!]
불길한 관
[관 안에는 발견된 뱀파이어 소녀는 모종의 이유로 매우 약화된 상태로 보인다.]
▷아름다운 겉모습에 속지 말자. 뱀파이어는 인류의 적! 뱀파이어가 힘을 되찾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지 모르니, 약화된 지금 당장 처치하자!
▷아무래도 나쁜 뱀파이어처럼 보이진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곳에 잡혀 있을 리 없으니, 일단 사정을 들어보도록 하자!
※1번 선택지를 고를 경우 퀘스트는 바로 완료됩니다.※
전생부터 수많은 퀘스트를 해 본 도진은 두 가지 선택지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었다.
첫 번째 선택지를 고르면, 밑에 적힌 것처럼 이번 퀘스트는 여기서 끝이다.
더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적당한 보상으로 만족하려면 첫 번째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반면 두 번째는 보상이야 더 커지겠지만, 퀘스트가 어디까지 꼬일지 가늠을 할 수 없는 무저갱과 같은 선택지일 터였다.
더 큰 보상에 대한 욕심이나 뒤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을 들였다간 피를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두 가지 선택지를 확인한 도진은 망설임 없이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이 세계에서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많은 걸 바꿀 수가 없거든.’
겁쟁이처럼 굴면 안전하게 성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위험을 감수할 때는 감수하고, 그걸 극복해 내서 다른 사람들보다 몇 걸음을 앞서 나아가야 비로소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저것 다 이뤄 놓아 봐야 결국 이 세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미래를 바꾸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뭔가를 바꿀 기회가 있을 때 확실하게 바꿔야 돼.’
결심한 도진은 바닥에서 몸을 못 가누고 산낙지처럼 꿈틀대는 흡혈귀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요? 혹시 선생님께서 저를 이렇게 만드신 건가요? 그… 저희 저주를 풀어 줄 수 있다고 하셨던 분은 다른 분이셨던 거 같은데. 그분은 다른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힘이 하나도 없는지 고개도 못 돌리고 바닥에 볼을 비벼 대며 하는 말이 쓸데없이 예의 바르다.
뱀파이어 하면 피에 미쳐서 헉헉대는 미치광이들과 피는 필요로 하지 않지만 말 한마디 없이 인간을 도살하는 엘더들만 알고 있는 도진으로선 상당한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널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냐. 쇠사슬로 묶여 있는 관이 있어서 열어 보니까 네가 있었을 뿐이지.”
“그렇군요.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저를 좀 일으켜 주실 수 있으실까요?”
“내 질문에 대답을 하면 생각해 보지.”
“질문이요? 아하. 심장 박동이 빨라지신 걸 보니 제가 뱀파이어란 걸 알고 긴장하신 거군요? 이런… 제가 멍청했어요. 중앙대륙분들은 저희를 피를 탐하는 괴물로 인식하고 계신 걸 깜빡했어요.”
음음. 움찔움찔 고개를 살짝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이던 엘더는 끙끙대며 고개를 겨우 돌렸다.
바닥에 볼이 눌린 채 엘더는 도진을 향해 아주 무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저주에 강한 영향을 받고 계신 분들과 달리 저는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엘더거든요! 제가 당신의 피를 마실 일은 없다는 말이죠!”
엘더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빨리 물어봐 주세요. 저는 다 대답할 준비가 됐답니다.
도움을 받고 싶어서 저러는 게 아니다.
그냥 저 엘더는 마냥 착한 거다. 그게 느껴졌다.
이상한 엘더의 등장에 당황스럽긴 해도, 정보 수집이 용이해진 건 맞았다.
“흡혈… 아니, 너희 그림자 공국 사람들은 태양을 피할 필요 없이 영원히 밤이 지속되는 너희 터전에서 나오지 않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엘더씩이나 되는 네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지?”
“아하, 그게 궁금하셨군요? 확실히 저희 그림자 공국은 1,500년 전 맺어진 제국 그리고 성황청과의 불가침 조약에 의해 아주 오랜 기간 공국에서 나오지 않았었죠. 저희 아버지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하셨고요.”
하지만… 하고 말끝을 흐리며 슬픈 표정을 지은 엘더가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래 억눌린 탓일까요? 공국의 백성들이 이제는 흡혈의 저주에 완전히 잠식당하고 있답니다. 어둠이란 양식만으로 충분한 엘더 이상의 뱀파이어와 달리 이제는 한계가 온 거겠죠. 그래서 저는 혹시나 공국 백성들을 괴롭히는 저주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해서 중앙대륙으로 건너왔어요. 그리고 운 좋게도 저에게 도움을 주실 분을 만났어요.”
저 감명 받은 얼굴을 보니까 ‘도를 아십니까?’ 하고 접근한 사이비 앞에서 감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호구 여대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제 고민을 듣고, 제 슬픔에 공감한 그분은 방법을 찾는 걸 도와준다고 하셨어요. 뱀파이어 엘더인 제가 실험에 협조만 하면, 다른 백성분들도 뱀파이어 엘더처럼 어둠만 있으면 인간 분들의 피를 탐하지 않아도 되는-”
“야, 이 호구 새끼야!”
도진은 결국 견디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고구마를 먹여도 정도가 있지.
더 들을 가치도 없었다.
이 멍청한 엘더는 나름의 고민을 안고 중앙대륙으로 원정(가출)을 나섰고, 오자마자 사기꾼에게 걸려든 거 같았다.
결과는 물어볼 것도 없이 웬 관짝에 갇혀서 이러고 있는 거고.
도진은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 넘치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뒤쪽에서는 감금돼 있던 여자들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우는 중이고.
“저기 중앙대륙 인간분들. 제가 무서우셔서 우시는 거면 안심하세요! 저는 뱀파이어지만 인간분들의 피를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어요. 오히려 빨간 피를 보면 현기증이 나는걸요? 그러니까 살려 달란 말씀은 그만하셔도 된답니다!”
착해빠진 뱀파이어 엘더는 우는 여자들이 자기 때문에 살려 달라고 비는 줄 알고 위로를 해 대고 있었다.
‘후우, 그냥 받아들이자. 이런 상황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선택지를 고른 이상 그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관을 보고 뜬 퀘스트 메시지를 보고 왠지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거 같아서 대비를 해 두었다는 점이다.
“저기요.”
먼저, 도진은 그나마 쓸 만한 인력을 포섭하기로 했다.
물론 바닥을 기고 있는 엘더는 포섭 대상이 아니었다.
이 멍청한 엘더보단 감금된 여자들이 차라리 도움이 될 테니.
“히이익!”
그러나 이쪽도 포섭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걸 보면.
그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고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
더 이상의 배려는 해 줄 수가 없다.
‘어르고 달래다 죽게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겁을 줘서라도 살리는 게 저 여자들 입장에서도 낫겠지.’
마음을 정한 도진은 그나마 가장 침착한 편이었던 여자를 향해 말했다.
“그만 울게 해.”
“네, 네?”
“그만 울게 하라고.”
도진의 분위기가 급변하자 울던 여자들이 알아서 울음을 그쳤다.
맹수 앞에 놓인 먹잇감들처럼 굳어 버린 것이다.
“살고 싶으면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난 노예 장사하는 놈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잠입했고, 그걸 위해서 너흴 빼낼 계획이다.”
잠시 자신들이 들은 말을 이해하려는 듯 눈을 굴리던 여자들의 표정이 변했다.
“저, 정말이신가요?”
불신 가득한 물음. 그러나 옅은 희망이 피어나는 건 숨기지 못한다.
하지만 여자들이 희망을 품는다고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조금만 지나면 그쳤던 울음을 다시 터뜨리고, 아까와는 다른 방향의 ‘살려 주세요’를 외쳐 댈 터.
그걸 막기 위해 도진은 선수를 쳤다.
“단, 짐짝처럼 구는 것들까지 살려서 나갈 여력은 없다. 그러니까 여기 남고 싶지 않으면 잘 들어. 너희가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있는 조건이다. 하나, 울거나 날 짜증 나게 하지 않는다. 둘, 내가 하라는 대로 의심 없이 움직인다. 셋, 질문하지 않는다. 이해했나?”
여자들의 눈에서 불신이 점차 옅어지고, 삶에 대한 갈망이 피어났다.
입술을 꾹 물어 울음을 참아 넘기며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을 보며 도진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이해했으면 저걸 부축하고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대기해. 바깥이 잠시 소란스럽겠지만, 당황하지 말고. 내가 신호하면 바로 뛰쳐나와서 내 지시에 따른다. 알겠나?”
“아, 알겠어요.”
가장 먼저 대답한 건 역시나 처음부터 제일 용감했던 여자였다.
도진은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부터 네가 여기 갇힌 여자들 리더다. 밖으로 나오면 다른 방에 갇힌 여자들도 다 챙겨서 잘 따라와. 내가 말하는 것보다는 같은 처지인 네가 하는 말을 더 잘 듣겠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도진은 몸을 일으켜 돌아선 뒤였다.
“이쯤이 좋겠어.”
밖으로 나온 도진은 감옥 구역으로 끝자락으로 걸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놈들이 직접 가져다 놓은 다섯 개의 오크통 위치를 염동력으로 조정했다.
그렇게 사전작업을 마친 도진은 큰 소리로 놈들을 불렀다.
“비키! 그리고 나머지 친구들! 이리 좀 와 봐!”
좁은 복도를 타고 도진의 목소리가 웅웅 저 멀리로 나아갔다.
잠시 후 어둡다 못해 새까만 복도 저편에서 길게 늘어지는 비키의 뾰족하고 높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남자들의 천박한 웃음소리도 겹쳐 들렸다.
“왜에-? 벌써 끝난 거야? 아니면 너무 흥분해서 벌써 다 죽인 건가-? 말해 두지만 환불은 안 된다-!”
“환불은 필요 없으니까 걱정 마! 대신 와서 이것 좀 보는 게 어때? 혼자 보기 아까워서 그러는데! 괜찮다면 같이 즐겨도 좋고! 비키 너는 그냥 관전만 해도 준 만큼 더 줄 테니까 이쪽으로 오라고!”
“어이없는 변태 고객님이네! 뭐, 나야 구경만 해도 돈을 준다니까 불만은 없지만! 잠깐만 기다려! 벌써부터 발딱 세우고 있는 병신 새끼들 데리고 갈 테니까!”
돌아오는 대답을 들은 도진은 마법회로에 주문을 장전했다.
그리고 소리에 집중한다.
아직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뚜벅뚜벅 하는 소리가 겹쳐 들린다.
조금 무거운 게 여러 개, 고양이처럼 가벼운 게 하나.
남자들과 비키다.
이윽고 깜깜한 복도에서 횃불로 조명을 밝혀 놓은 감옥 쪽으로 놈들의 실루엣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