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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47화 (48/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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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방금 내린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들고 창가에 섰다.

평소에는 마실 생각조차 안 하던 검은 물이지만, 새집에 커피 머신과 커피 캡슐이 있길래 궁금해서 타 본 것이었다.

알싸한 산미가 느껴지는 향을 음미한 도진은 후룩, 하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허름한 원룸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풍경을 즐기며 생각했다.

‘다시는 마시지 말아야지.’

도진은 입에 머금었던 커피를 그대로 컵에 뱉고는 퉤퉤- 하고 옅게 남은 쓴맛까지 털어 냈다.

“사람들은 이게 뭐가 좋다고 마시는 거야? 쓰고 시고 떫기만 하구만.”

도진은 사정없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돌아서자마자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어제까지 지냈던 허름한 원룸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고급스러운 오피스텔의 전경을 보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도진은 싱크대에 걸레 빤 물 같은 맛이 나는 쓰레기 음료를 버리면서 이 오피스텔에 입주할 때까지의 과정을 떠올렸다.

‘그게 벌써 사흘 전인가?’

사흘 전 도진은 집 앞에 쓰러져 있던 여자를 발견했고, 그건 그의 전속 매니저였다.

도진이 기억하는 그녀의 신상명세와 감상은 대략 이러했다.

이름은 천지현. 나이는 22세.

특이사항으로는 과한 성실함과 무능력자로 찍히는 것에 대한 거부감, 정규직에 대한 엄청난 집착 정도가 있었다.

얼마나 성실하고 위에서 시킨 일을 완수하지 못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지는 도진이 전화도 안 받고 문을 두드려도 안 나온다고 롱패딩까지 가져와서는 새벽 1시까지 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기다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고작 준비된 숙소 보여 주고서 마음에 드는지, 더 준비됐으면 하는 사항이 있는지 물어보고 오라는 말에 새벽이 되도록 잠복하는 사람이라니.

도진 입장에서는 매니저로 붙은 사람이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인 건 좋은 일이긴 했지만, 조금 지나친 게 아닌가 싶긴 했다.

띠링-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커피 대신 마실 우유를 꺼내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전생의 버릇 때문에 굳이 쓸 일이 없으면 스마트폰을 항상 꺼 두던 도진이었으나 요즘에는 그냥 켜 두고 있었다.

스마트폰은 꺼 놓고, 캡슐은 물리적 자극을 제외한 다른 외부 자극에는 알림이 뜨지 않게 세팅해 둔 탓에 사람 하나를 새벽 1시까지 바깥에 방치한 뒤로 말이다.

[도진아, 오늘 오후쯤에는 영상 준비 끝낼 수 있을 거 같아. 영상 편집 끝나면 보내줄 테니까 컨펌 좀 해 줄 수 있어? 시간은 오후 6시쯤이 될 거 같은데. 그리고 영상 업로드를 어떤 식으로 할지도 정해야 하거든.]

발신자는 천지현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질 도진의 유튜브 채널에 올릴 영상에 대한 내용.

활동 시작을 언제쯤 할 건지 묻기에 영상 소스를 넘겨줬는데 편집자까지 붙어서 뭔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얘기 어젯밤에 했는데……?’

이 사람, 아무래도 맡은 일을 24시간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두고 A급이라고 하는 건가.’

도진은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보이는 듯했다.

[A급 노예를 얻었습니다!]

-같은.

본인에게는 실례가 될 테니 굳이 전할 필요는 없는 감상이었다.

도진은 바쁘니까 그냥 알아서 하라는 답장을 보낸 뒤 오늘의 일과를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은 뻔했다.

게임이다.

* * *

도진이 3주나 사냥을 하고 있던 호르콘 습지를 지나 하루를 꼬박 이동하면 마르지아 자작령이란 곳이 나온다.

마르지아는 자작령치고는 꽤나 규모가 큰 도시였다.

주변의 마나 농도가 낮아 강력한 몬스터가 태어날 일이 없다 보니 상행을 다니는 상인들의 거점도시로서 선택됐고, 자연히 사람과 돈이 몰린 것이다.

다른 도시에서 넘어온 상인들, 그들을 호객하는 도시 사람들, 그런 모두를 상대로 꺄르르 웃으며 유혹하는 미녀들.

꽃을 파는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상인들의 상행을 호위하는 모험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이렇듯 생기 넘치는 모습을 한 마르지아 자작령이지만, 정작 도진에게는 이 생기 넘침이 매우 낯설었다.

그가 본 마르지아 자작령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불리는 지명부터가 달랐다.

그때는 이곳을 <죽은 자들의 도시 마르지아>라고 불렀으니.

‘이런 곳이…….’

왁자하게 떠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심장 한편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안 있어 이 도시는 죽음의 땅으로 변할 것이다.

도시를 둘러싼 깨끗한 성벽은 정체 모를 검은 덤불에 뒤덮일 것이고, 도시 내부는 을씨년스런 시체와 망령의 땅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도진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도진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전생에서조차 이 도시가 어떻게 지워졌고, 하루아침에 70레벨대 사냥터가 됐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추측만이 난무했을 뿐.

“모험가님, 모험가님! 꽃 한 송이만 사 주시면 안 될까요? 1실버만 주시면 제 동생들이 먹을 빵을 살 수 있답니다!”

사색에 잠긴 도진을 깨운 건 하얀 꽃이었다.

도진은 하얀 들꽃을 내민 소녀를 보았다.

떨리는 눈과 손이 그녀가 가진 도진에 대한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 줬다.

소녀가 보이는 두려움은 마법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굳이 꼽자면, 경험에서 나오는 근거 있는 구체적인 공포였다.

도진은 그것이 ‘모험가’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라 추측했다.

거친 놈들에게 몇 번 고초를 겪었거나 겪는 걸 본 거겠지.

그럼에도 꽃을 내민 건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일 테고.

만만해 보이는 손님은 덩치 크고 나이 많은 꼬마들이 선점해 버리니 어쩔 수 없이 아무도 눈독 들이지 않는 마법사 차림의 모험가에게 도전을 한 모양이었다.

도진은 겁먹은 소녀가 안심할 수 있게끔 얼굴을 내보이며 빙긋 웃어 보였다.

“가진 꽃을 다 사려면 얼마니?”

“1, 1실버예요!”

긴장 탓일까. 소녀는 도진이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송이에 1실버인데 바구니에 담긴 거 전체를 사도 1실버라고?”

“바, 바구니요? 제가 가진 이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 꽃 전부 다 해서 얼마냐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녀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래도 꽃을 팔아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가장답게 소녀는 다가온 기회를 놓치진 않았다.

“8실버, 아, 아니! 5실버만 주세요!”

나름 크게 불렀다가 혹시라도 도진이 사지 않는다고 할까 봐 바로 가격을 낮추는 소녀.

그걸 본 도진은 말없이 10골드를 꺼내어 소녀의 손에 쥐여 줬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게끔. 조심해서.

놀라 입을 벌린 소녀에게 도진은 쉿 하고 주의를 줬다.

“티 내지 말고. 동생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 꽃은 한 송이면 충분할 거 같으니까 이것만 받을게.”

그렇게 말하며, 소녀가 처음에 내민 들꽃을 받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과하게 가는 그녀의 손목에 찍혀 있는 검은 반점이 도진의 눈에 들어온 건.

도진은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꺅!”

갑작스레 도진이 손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소녀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몰렸으나 잠시 후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다.

꾀죄죄한 소녀를 보고는 소매치기라도 하다가 걸렸다 보다, 하고 생각하며 신경을 끄는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약자로 살아온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일단 사과부터 했다.

“이거, 이 반점 언제 생긴 거야?”

“이, 이거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묻는 소녀에게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흑, 그, 그게 며칠 전부터 생긴 건데… 자,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 내야 돼. 언제 생겼는지, 그때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대한 정확하게 떠올려 봐.”

도진의 강렬한 눈빛에 주눅이 들대로 든 소녀는 억지로 검은 반점을 발견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도 운이 좋은 날이었던 것 같다.

그래. 꼭 지금처럼 운 좋게 꽃 한 바구니를 한 번에 팔았던 기억이 난다.

다른 아이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간 해 질 녘, 친절해 보이는 사제님이 보여서 꽃을 내밀었고 남은 꽃을 모두 팔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빵과 스프를 사서 남동생과 여동생을 오랜만에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동생들이 먹고 남긴 스프로 배를 채우다가 검은 반점을 발견했었다.

“그, 그게 일주일… 아니, 여, 열흘 정도 전에 봤는데… 저, 전염병은 아니에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아요!”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소녀는 전염병이 아니니 제발 도시 밖으로 내쫓지 말아 달라며 사정했다.

그런 그녀를 달랜 후에야 도진은 소녀가 검은 반점을 발견한 날 겪은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새하얀 천에 검은색 꽃이 새겨진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고.”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보며 도진은 생각했다.

역시, 하고.

창세성 벨라를 모시는 사제들은 순백의 사제복에 금실로 빛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다.

같은 흰 사제복이라 해도 그 위에 검은 안개꽃을 새겨 넣는 놈들은 창조의 별이 아니라 멸망의 별을 섬기는 놈들이었다.

‘멸망교단 놈들은 이때부터 움직이고 있었던 건가.’

그리고 소녀의 손목에 찍힌 흑반점은 멸망교단 놈들이 쓰는 시그니처 주문 같은 것이었다.

보름 동안은 그저 작은 반점으로만 보이지만, 보름이 지나는 순간부터 폭발적으로 반점이 증식하며 상상도 못 할 고통을 준다. 그 끝은 당연히 죽음이고.

‘「안식의 꽃」이라고 했던가.’

주문 이름도 좆같이 지어서는.

도진은 멸망교단과 관련된 좋지 않은 추억이 떠오르는 걸 의식적으로 억눌렀다.

그놈들과 엮여서 좋았던 기억 따위 하나도 없다.

떠올려 봐야 냉정한 판단을 하는 데 방해만 되겠지.

도진은 소녀의 손목을 놔줬다.

무의식중에 힘을 줘서인지 소녀의 손목은 거의 멍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본 도진은 인벤토리에서 힐링 포션과 성수를 꺼냈다.

“미안하다.”

“……?”

소녀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한 듯 눈만 굴렸다.

그러나 도진으로서는 시시콜콜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네가 만난 그놈은 사람 좋은 호구가 아니라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또라이 집단에 소속된 개새끼란다.’ 하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그저 멍든 팔목을 힐링 포션으로 멀쩡하게 만들고, 멸망교단 사제 놈이 걸어 놓은 저주를 성수를 뿌려 없애 주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안식의 꽃」이 성수를 뿌리는 정도로 제거가 가능한 별것 아닌 주문이라는 것이었다.

“자, 이제 됐어.”

“어, 없어졌어……!”

불안한 눈으로 도진이 하는 걸 지켜보던 소녀는 깨끗해진 자신의 손목을 뽀득뽀득 만져 댔다.

약간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니 본인 스스로도 반점을 적잖이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염병 어쩌고 한 걸 보면 그런 쪽으로 불안해했던 눈치.

“내가 걱정하던 게 아닌가 보네. 다행이다.”

도진은 소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며 웃었다.

그리고 10골드를 더 꺼내 소녀가 떨어뜨린 바구니에 담고, 그걸 꽃으로 덮어서 돌려줬다.

“오늘은 맛있는 거 사서 일찍 들어가. 동생들 잘 챙기고. 그리고… 가능하면 며칠은 쉬는 게 좋을 거야.”

다시금 친절해진 도진을 보며 소녀는 쭈뼛쭈뼛 받은 걸 챙겼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소녀는 바구니를 가슴에 안고 달려갔다.

그러다 몇 번인가 도진을 돌아보다가 어디쯤에서 골목으로 쏙 사라졌다.

그 순간, 더 이상 소녀와 얼굴을 마주할 일이 사라진 도진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좀 더 알아봐야겠어.’

멸망교 사제가 이곳에 있다면, 이 도시에 찾아올 재앙과 놈들이 관련되어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그놈들이 무슨 수작질을 꾸미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솔직히 지금 내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도진은 일단 소녀가 보았다는 빌어먹을 멸망교단 사제 새끼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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