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눈치와 사교성 그리고 사회성마저 자의적으로 쓰레기통에 처박고 사는 김소소를 닦달하고 협박하고 회유한 끝에 주강희는 영상의 주인공과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김소소는 한 달의 휴가를 더 얻었고, 테레사는 김소소와 함께하는 전국 카페 투어를 면제받았다.
그리고 지금. 주강희는 드디어 영상 속 주인공을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을 도진이라 소개한 남자는 건네받은 명함을 앞뒤로 돌려보고 있었다.
그를 보며 주강희는 도진을, 정확히는 그의 상품성을 분석했다.
‘몇 살쯤 된 거지? 얼굴은 어려 보이는데… 뭔가 나보다 연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도진의 첫인상은 묘했다.
얼굴은 어린데 그를 감싼 분위기는 전혀 어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다소 날카로운 인상과 맞물려 신비감을 조성했다.
종잡기 힘든, 예측 안 되는 이미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 소소가 그랬었다.
‘신기한 사람’이라고.
‘분위기는 너무 괜찮고. 키도 크고, 몸도 다부지네.’
몸이야 운동을 통해 만들었겠지만, 키와 골격은 타고나는 육체적 재능이었다.
그런 면에서 도진은 축복받은 유전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체형이 좋았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회장님이 만족하셨던 마스크 그대로고.
가상현실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인물이라 해도 ‘실물’이 잘생기고 예쁜 건 강력한 무기였다.
라엘 그룹에서 일하면서 예쁘고 잘생긴 모델들을 지겹도록 봐 온 주강희가 보기에도 도진은 뛰어난 원석이었다.
LOST는 다른 가상현실 게임들과 달리 커스터마이징에 한계가 있다고 들어서 어느 정도 기대를 하긴 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거기다 상대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고, 그 열기가 식기는커녕 주인공 찾기에 더욱 혈안이 되어 가고 있는 영상 속 주인공.
주강희는 다짐했다. 이 자리에서 꼭 이 남자를 설득해서 계약서에 사인을 받겠다고.
마침 그때 명함을 보고 있던 도진의 시선이 주강희를 향했다.
주강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직장인의 싸움을 준비했다.
* * *
도진은 받은 명함에 적힌 글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 무표정 힐러가 설마 재벌집 따님일 줄은 몰랐네.’
사실 도진은 소소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없었다.
말수도 적고, 딱히 눈에 띄는 것도 없이 할 일은 또 잘해서 신경 자체를 안 썼기 때문이다.
원래 기억에 남는 파티원은 사고를 거하게 치는 놈들이 머릿속에 남는 법이었다.
그래서 테레사에게 연락이 와서 소소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꽤나 의아했었다.
그 영상 때문이라는 말을 들어도 도무지 그게 무표정 힐러랑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소소가 라엘 그룹 딸이라는 소리에 도진은 납득했다.
라엘 그룹은 현재는 스킨, 주얼리, 패션까지 총 세 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는 하나가 더 추가된다.
라엘 엔터테인먼트.
유명한 LOST 방송인도 몇몇 소속되어 있던 기획사여서 도진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호구 회사로 유명했었지.’
실수인지 승부수인지 몰라도 라엘 엔터테인먼트는 계약 조건이 매우 좋기로 유명했었다.
얼마나 유명했느냐면, 그런 데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도진조차 여기저기서 주워들어 알고 있을 정도였다.
또 라엘 엔터테인먼트는 소속 연예인 케어로도 유명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타이밍에 거기서 날 보자고 했다는 거지? 그것도 영상 때문에.’
도진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굴러들어 왔다.
행운이 굴러들어 왔으니, 최대한 상처 안 나게 잡아채야지.
도진은 주강희에게서 받은 명함을 내려놓고, 액상과당이 듬뿍 들어간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그런데… 라엘이 거기 맞죠? 옷이랑 화장품 파는 회사. 그런 곳에서 절 찾을 일이 있나요?”
“저희 라엘 그룹이 패션, 스킨, 주얼리에 주력하는 만큼 남성분들께는 조금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도진 씨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린 건 기존 라엘 그룹의 사업 부분이 아니라 다른 부분 때문에 연락을 드린 거라서요.”
“다른 부분이요?”
“네. 이번에 저희 라엘 그룹에서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사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계열사가 추가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과 관련돼서 저희 라엘에서 도진 씨에게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뵙자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막힘없이 말을 마친 주강희는 도진의 기색을 살폈다.
상대의 반응에 맞추어 대응을 해 나가기 위해서였다.
들뜨는 듯한 반응이면 긍정적인 것이니 거기에 맞춰 부추기고, 반대로 약간이라도 꺼리는 기색이면 설득을 준비해야 했다.
그것이 주강희가 생각하는 협상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도진은 구구절절 협상을 하느라 뇌세포를 혹사시킬 생각이 없었다.
라엘 엔터테인먼트가 어떤 회사인지 이미 알고 있는데 굳이 시간을 낭비할 게 뭐가 있나.
“그러니까 라엘에서 제 화제성을 사고 싶다는 말이네요.”
“…그렇죠. 네, 말씀하신 대롭니다.”
“그러면 피차 길게 얘기할 게 있을까요? 준비한 계약서 보면서 말하는 게 빠를 것 같네요.”
“벌써요……?”
대화 진행 템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강희가 물었다.
“제가 시간 낭비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피곤하게 서로 다 아는 얘기 빙빙 돌릴 거 없잖아요. 그냥 조건 확인하고 서로 맞으면 사고파는 거고, 아니면 그냥 일어나서 집 가면 되는 건데.”
톡톡. 도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계약서를 보여 달란 뜻으로.
주강희는 홀린 듯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
한참 이야기를 진행한 뒤, 그러니까 열심히 상대방을 구워삶은 뒤에 내보일 예정이었던 계약서였다.
도진은 슥 첫 장을 훑어본 뒤에 주강희를 보며 말했다.
“핵심 요약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계약을 하게 되면 다 읽고 검토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런 단계가 아니니까, 라엘 측에서 저한테 어필할 만한 부분이 있으면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네요.”
“아아, 네. 잠시만요.”
뭐가 이렇게 빨라?
살면서 성질 급한 사람을 수도 없이 봐 온 주강희였으나 단언컨대 이렇게 급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주강희는 급히 계약서 사본을 꺼내 자신이 미리 표시해 둔 ‘퍼주기’ 조항을 읽어 나갔다.
애초에 라엘 엔터테인먼트가 ‘A급’을 노리기 위해 작성한 계약서를 아주 약간 수정한 계약서였다.
그런 만큼 기본적인 계약 내용은 아주 좋았다.
수익 분배 비율이 9대1인 것만 봐도 그랬다.
이건 절대 아직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도 안 한 사람에게 제시할 만한 비율이 아니었다.
그게 아무리 화제몰이를 하고 있는 중인 도진이라 해도.
“괜찮네요.”
다만 도진 입장에선 몇 가지 걸리는 점은 있었다.
“몇 가지 조항만 고칠 수 있을까요? 그럼 바로 계약할게요.”
“바로 계약을 하신다고요? 고민도 없이?”
“고민했으니까 계약 내용을 고쳐 달라고 하는 건데요?”
“그, 그렇네요.”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 네.”
얼떨떨해하는 주강희에게 펜을 받아 든 도진은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나갔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1. 전속 매니저를 붙여 줄 것.
2. 숙소를 제공해 줄 것.
3. 계약금은 필요 없으니 계약 기간을 1년으로 하고, 1년마다 새롭게 계약을 진행할 것.
도진은 적은 것을 주강희에게 슥 하고 밀었다.
그 내용을 읽은 주강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1, 2번은 어려울 게 없는 조건이었다.
전속 매니저라고 해 봐야 신입 로드 매니저 하나 쓰는 인건비 정도라고 보면 되고, 숙소도 돈으로 해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3번은 많이 아쉬운 조건이었다.
1년이면 이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화제성은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주강희는 도진이 지금 받고 있는 관심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게 성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오래 잡아두고 싶었다.
‘5년은 무리라도 최소 3년은…….’
차라리 다른 걸 더 퍼주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주강희는 도진의 기색을 살피려 그의 눈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도진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훌쩍 커 버릴 자신이 있으니 계약 기간을 단축해 달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1년 뒤의 자신은 더 큰 가치를 지녔을 거라 확신하고서.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주강희는 도진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을 드려도 계약 기간은 1년보다 길어질 수 없겠죠? 예를 들어서 계약금을 무겁게 얹는다고 해도요.”
“굳이 길어질 필요가 있을까요?”
“……?”
무슨 의미인지 묻는 주강희의 눈빛에 도진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말했다.
“1년 뒤에 무조건 도망간다고 적은 것도 아니잖아요. 다음에도 재계약하고 싶게 회사가 잘하면 되죠. 뭐, 이건 반대로도 적용되는 거지만. 저도 회사가 보기에 가치가 없다 싶으면 그쪽에서 재계약을 안 해 주겠죠. 그러니까 서로 긴장하고 잘하자는 의미의 1년입니다.”
할 말 없게 만드네. 내가 이렇게 누구한테 휘둘리는 스타일이 아닌데. 주강희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렇겠네요. 서로 잘하면 된다, 라.”
주강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도진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지 겨우 10분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왔는데 너무 빨리 끝나 버렸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1시간, 2시간씩 입씨름을 한 것보다 더 허탈했다.
‘오늘은 빨리 퇴근해서 쉬… 지는 못하겠지.’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떠올린 주강희는 힘없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요구하신 부분 반영된 계약서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도진이 현실에서 쓸 노동력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새롭게 작성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며칠이 흘렀다.
그 며칠 사이에도 도진은 당연히 게임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었다.
마나가 차오른 습지에서 악어가 변형된 마수를 기계적으로 학살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전격 마법으로 지지면 전격 내성이 약한 습지 악어 놈들은 거뭇거뭇하게 타서 배를 까뒤집고 죽는다.
충분한 화력이 확보되지 못하면 광역으로 어그로만 끄는 짓이 되겠지만, 도진에게는 「흑룡의 송곳니 단검」이 있었다.
S급 무기의 무식한 깡마공은 사냥이란 행위를 힘겨움보다는 지겨움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종류의 단순노동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이었다.
“으음, 벌써 몇 시간째지……?”
약간 몽롱해진 정신으로 따져 본 도진은 자신이 벌써 13시간째 이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높은 지능 스탯과 빵빵한 장비 그리고 「마나 하트」라는 절륜한 특성이 없는 다른 마법사들은 꿈도 못 꿀 연속 사냥이었다.
그럼에도 보유 마나가 계속 간당간당한 상태로 유지되니 참기 힘든 졸음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쉬어야 할 시간이 됐음을 인정할 때였다.
안전지대까지 이동한 도진은 그대로 휴식을 취하는 동시에 로그아웃을 했다.
캡슐에서 눈을 뜬 도진이 가장 먼저 느낀 건 공복감이었다.
도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식량이 쌓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습지에서 개고생하다가 나와서 먹는 게 고양이용 간식이라고……?’
귀찮아서 새로운 식량을 준비 안 한 죗값으로는 과한 게 아닐까.
잠시 고민하던 도진은 편의점을 가 보기로 했다.
위치는 알고 있었다.
전에 나갔을 때 길목에 있는 걸 봐뒀었다.
뭘 먹을지는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새벽 편의점이라. 설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퍽.
아니라 고깃덩이가 걸리는 느낌이 찾아왔다.
‘뭐지?’
시선을 내리자 뭔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검은색 롱패딩을 입은 여자였다.
순간 도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술을 마셨으면 곱게 집에나 갈 것이지…….”
문 앞을 딱 가로막고 있는 고깃덩이를 취객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으윽……!”
옅은 신음을 흘리며 취객이 눈을 뜨더니 애처롭기 그지없는 눈으로 도진을 바라봤고, 곧 그 눈에 수막이 쳐졌다.
그리고 그 입에서…….
“도, 도진 씨 맞으시죠……?”
도진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매니저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