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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그러니까 도진이 회귀하기 전 1회차 시점.
탈피하여 진화를 마친 하베르칸은 자신을 깨운 유혈 놈들을 전멸시킨 뒤 동굴을 벗어났었다.
완전체가 되었으니 더 이상 숨어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겠지.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하베르칸의 탈출은 참극으로 이어졌다.
은신처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동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 하베르칸에 의해 무려 6곳의 마을이 초토화됐다.
그로 인한 사망자만 1,000명에 이르렀다.
하베르칸의 공격 수단이 넓게 퍼지는 독가스였던 것이 희생자를 극단적으로 늘렸었다.
사실 이 사건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밖으로 뛰쳐나온 하베르칸을 바로 잡아 죽였다면 로스타니아인의 희생은 없었을 테니.
하지만 하베르칸이 산을 넘고 평야를 가로질러 강을 건너는 동안 유저들은 이동하는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 서로를 공격했다.
역대급 강력함을 자랑하여, 아마도 역대급 보상을 줄 게 확실해 보이는 보스 몬스터를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누군가가 하베르칸에게 칼을 꽂으면, 칼을 꽂은 자에게 사람이 쏜 화살이 박혔다.
그러면 활을 쏜 놈은 누군가의 단검에 목이 따이는 식.
나중에는 아예 하베르칸은 안중에도 없이 PK만을 노리고 돌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까지 몰려들어 완전한 난장판이 됐었다.
이 사건이 벌어진 시간에 도진은 아직 LOST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사건을 접한 것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고.
그래도 뒤늦게 찾아본 하베르칸과의 마지막 전투 영상에서 본 장면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틀린 앵글 속에 쓰러져 있는 어린아이의 눈은 생기를 잃어 가는 중이었고, 독에 중독된 얼굴에는 검은색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번져 있었다.
그 뒤로는 수십 명의 유저들이 하베르칸을 공격하고, 하베르칸을 공격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또 그런 사람을 누군가가 공격하고…….
욕심 많은 것들이 지랄을 하고 있을 때 그 아이는 그렇게 죽었다.
마지막으로 달싹이던 입이 하고 싶었던 말은 뭐였을까.
살려 달라는 말이었을지, 제 어미를 찾는 것이었을지.
‘바꿀 수 있는 건 바꿔야지.’
복수도 하고. 더러웠던 기억도 바꾸고.
그러면, 그러다 보면 이 세계도 좋은 쪽으로 변하겠지.
‘그게 내 인생을 돌려준 로스타니아랑 공주에 대한 보답이 될 거고.’
이어지던 회상은 섬광이 잦아듦에 따라 끊겼다.
-그르르르.
낮게 우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하베르칸.
“…너, 너 누구…….”
그 사이로 혈왕의 곧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겹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진의 시선은 정면의 괴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놈은 지금 탈피를 마쳐 완전체가 되었다.
허나 그걸 위해 엄청난 생명력을 소진하여 약해진 상태.
하베르칸을 죽일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다.
-크와아악!
하베르칸이 포효한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분노에 찬 괴성에 불과할 움직임.
그러나 도진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전생에 영상으로 보았던 ‘전조’였다.
고개를 뒤로 쭉 빼며 포효하고, 가슴은 움푹 들어가는 저것은 내부에서 독액을 압축하는 자세.
‘덩어리 패턴.’
독액 덩어리를 연속으로 쏘아 내는 패턴이었다.
패턴을 읽은 도진은 빠르게 마법을 짜냈다.
심장이 마나를 뿜고 마법회로가 그것을 삼킨다.
독가스 형태일 때와 달리 꽉 압축된 것은 점화 정도로는 불태우기가 어렵다.
《화염창》
그래서 도진은 그보다 강한 화력을 준비했다.
투-
웅, 하고 뭉쳐진 독액 덩이가 완전히 쏘아지기 직전.
쩍 벌린 하베르칸의 아가리에 화염으로 만들어진 창이 꽂혔다.
화르륵- 하고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길.
-크아아아아아!
분노보다는 고통으로 가득한 괴성이 동혈을 진동시켰다.
스스로의 독이 타들어 가면서 생긴 화상에 하베르칸은 아가리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몸을 웅크렸다.
입은 상처를 재생하기 위한 방어 자세.
도진이 빠르게 캐스팅에 들어갔다.
콰앙.
그의 앞의 대지가 뜯겨져 올라온다.
「대지의 창」 본래의 위력에, 「염동」으로 가속을 더한 날카로운 암석이 하베르칸의 전신 중 가장 야들야들한 부위인 눈동자를 노렸다.
재생 패턴에서는 하베르칸의 방어력이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안구에 꽂히는 날카로운 암석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크익!
상상 이상의 통증에 웬만한 공격은 버티면서 재생할 기세였던 하베르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닥다닥 쉬지 않고 바닥을 두드리는 여덟 개의 거미 다리가 놈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를 대변했다.
-크르륵!
굵직한 괴성과 함께 하베르칸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예 육탄 공격을 결심했는지 육중한 몸으로 돌격해 온다.
도진은 피식 웃었다.
‘회귀가 반칙은 반칙이네.’
워낙 패턴 구분이 쉬운 놈이어서 그런지 상대하기가 너무 쉬웠다.
후우웅!
웃는 도진을 향해 수평으로 날아드는 길쭉한 전갈 꼬리.
그러나 도진은 전갈 꼬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공중으로 떠 있는 상태였다.
「염동」을 쏘아 내며 발생하는 반발력을 이용한 기동.
허무하게 빗나간 전갈 꼬리에 휩쓸려 중독되어 있던 유혈 길드원 몇이 갈렸지만, 그건 도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가까이 와 줘서 고맙다.”
바닥에 착지하며, 도진의 손에서 작은 돌들이 쏘아졌다.
염동력을 이용한 투척은 정확하게 도진이 의도한 곳, 하베르칸의 배 아래로 작은 돌들을 배달했다.
이어지는 연쇄적인 폭발. 다음 달 월세 낼 돈도 남기지 않고, 남은 모든 돈을 퍼부어 산 마석 폭탄이 터지면서 발생한 폭발이었다.
돈은 아깝지 않았다. 아주 정확한 위치에 놓고 폭발시킬 수 있는 특성 덕에 하베르칸의 몸통에 붙은 거미 다리의 연결부를 집중 타격할 수 있었으니.
연속 폭발의 끝에 하베르칸의 다리 두 개가 파열되며 떨어졌다.
그것을 본 도진은 바쁘게 발을 놀렸다.
퉁. 퉁. 퉁.
진리의 서를 발동한 도진은 황금빛 일렁이는 마법회로를 풀가동해 마법을 쏘아 댔다.
다리를 잃어 측면으로의 회전이 불편해진 하베르칸의 우측으로 돌면서.
-크아아악, 크아아악!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하베르칸은 긴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꼬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도진을 쫓았으나 회전의 부자유는 추적에 명확한 한계를 부여했다.
그렇다고 도진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시간이 무한한 건 아니었다.
잘렸던 다리가 불쑥불쑥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량의 생명력을 소모하여 결손 된 육체를 재생하는 하베르칸의 「급속 재생」이었다.
물론 하베르칸의 그런 특징을 도진은 모르지 않았다.
해서, 놈의 회전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본 순간.
《암석 방패》
콰콰콱!
방패를 연속으로 세우며 속도를 더했다.
마침내 다리 재생을 마치고 도진 쪽으로 돌아서는 데 성공한 하베르칸.
-……!
그러나 하베르칸은 움찔했다.
돌아서자마자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암석 뭉치가 띄엄띄엄 세 개나 있었던 것이다.
허나 망설임도 잠시.
하베르칸은 전갈 꼬리를 가운데에 있는 암석 덩어리에 꽂아 넣었다.
콰지직- 하고 형편없이 무너지는 돌덩이.
그러나 그 뒤에 도진은 없었다.
실망하지 않고 하베르칸은 바로 독액을 투- 하고 뱉었다.
이번에도 실패다.
그래도 하베르칸은 기뻤다.
숨을 곳이 이제 한 곳이니, 저곳에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인간이 있을 터.
콰자작!
하베르칸은 온몸을 던져 마지막 남은 숨을 곳을 뭉개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느낌이 없었다.
푹.
그때 하베르칸인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옆구리였다. 옆이구나! 쥐새끼 같은 놈이 또 옆으로 돌았었구나!
눈이 시뻘개진 하베르칸이 다시 다다다닥 하고 거미발을 놀려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적이 보였다.
-……!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뾰족한 손끝으로 자신의 몸통을 긁어 대는 사람 아닌 것을.
그것은 도진이 소환한 악령이었다.
과거, 그가 히든 던전의 끝자락에서 얻었던 4성 마법 「악령 생성」으로 만든.
그러니까 일종의 미끼이자 덫인 셈이었다.
-크륵.
하베르칸은 본능적으로 속았음을 느끼고 다시 움직이려 했으나, 모든 판을 짜고 준비하고 움직인 도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툭.
어느새 하베르칸의 뒤에서 한 번의 염동력 도약으로 하베르칸의 등에 착지한 도진은 미리 장전해 둔 술식을 발동했다.
파칭, 파칭, 파칭.
마법진이 생성됨에 따라 회로가 과부하될 정도의 빛이 뿜어진다.
부족한 회로의 용량과 출력, 연산 등 모든 것을 「진리의 서」가 보조했다.
그리하여 도진의 손에서 피어난 순백의 빛은 총 3번에 걸쳐 크기를 불렸다.
마법사의 마나뿐만 아니라 생명력까지 갉아먹는 정도로 과투자된 단 한 번의 공격을 위한 주문.
4성 공격계 광(光)속성 마법 「섬광창(閃光槍)」.
도진이 손을 휘둘렀다.
투창 선수가 창을 던지듯. 땅을 향해서.
그가 디딘 땅은 하베르칸의 등.
「섬광창」이 닿은 곳은 그 등에서도 유독 검은 부분이었다.
탈피할 때 가장 먼저 벌어지기 위해, 그 어떤 곳보다 얇고 부드럽게 진화한 하베르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 부위였다.
피이이이. 얇은 소리를 내며 한 점에 뭉친 빛은 순간 폭발적으로 확장하며 터졌다.
그와 동시에 투웅- 낮고 굵은 소리와 함께 하베르칸의 몸통이 뚫렸다.
거듭된 빌드업으로 소모될 대로 소모된 생명력과 지칠 대로 지친 체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공격이었던 것이다.
[저주받은 피조물 하베르칸이 쓰러졌습니다!]
[타인이 실패한 히든 퀘스트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작은 비극은 쌓이고 쌓여 어느새 큰 비극을 낳는 법. 당신은 비극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높은 괴물을 처치하였습니다.]
[오류: 수령하지 않은 퀘스트]
[히든 퀘스트 지분에 따른 보상 책정 작업을 실시합니다.]
[당신의 히든 퀘스트 해결 지분은 75.4퍼센트입니다.]
[지분 부족으로 골드 보상 및 일부 경험치가 보상 목록에서 제외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저주받은 피조물 하베르칸의 전리품 「키메라의 독낭」이 「독을 품은 용족의 심장」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
[저주받은 피조물 하베르칸의 전리품 「하베르칸의 송곳니 단검」이 「흑룡의 송곳니 단검」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
[히든 등급 퀘스트 보상으로 모든 능력치가 +3 됩니다.]
하베르칸의 죽음과 함께 도진은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를 보게 됐다.
탈피한 하베르칸을 처치하는 것이 히든 퀘스트 목표였던 모양.
아니, 그게 단순히 처치하는 게 목표였으면 나중에라도 알려졌을 것이다.
‘이 동굴 안에서 처치’하는 게 목표였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퀘스트를 못 받은 건 퀘스트가 생성되는 순간에 여기 없어서일 테고.’
히든 퀘스트를 받고, 또 실패한 것들은… 당연히 저기 굴러다니는 놈들이겠지.
쿠웅.
빛의 창에 꿰뚫린 하베르칸의 몸체가 주저앉는 짧은 시간 동안 도진은 돌아가는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뭐, 어떻게 된 거든 간에 잭팟 터진 건 변함없지만.”
어차피 들어온 보상. 굳이 이유를 따질 필요가 있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통쾌한 복수의 마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도진은 천천히 하베르칸의 사체에서 내려와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대는 혈왕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혈왕의 시야를 통해 도진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
-……?
-……?
약속이라도 한 듯 물음표로 채팅창을 도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