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41화 (42/271)

41

그 어떤 가상현실보다 현실에 가까운 가상세계를 구축한 LOST의 인기는 엄청났다.

오죽하면 LOST를 하지 않는 부류는 캡슐 사양이 떨어져서 돈을 모으고 있거나 미성년자라서 가상현실 게임 접속이 금지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한껏 어그로를 끌어 대며 홍보를 한 유혈 길드의 레이드 방송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LOST 최초의 대규모 레이드 몬스터 토벌’이라는 말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고레벨 유저들이나 볼 수 있는 보스 몬스터에 대한 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시작하는 거야? 왜 검은 화면에 음악만 나옴?

-ㅋㅋㅋ 성질 더럽게 급하네. 공지된 시간까지 몇 분 남았으니까 좀 기다려 봐.

-아, 빨리 시작하라고. 치킨 다 식는다고!

-근데 유혈 비매너 길드로 유명했던 애들 아님? 초기에 한창 시끄러웠는데 레벨 쭉 올려서 딱히 마주칠 일 없어져서 그런지 이제 추종자들도 보이네.

-ㅅㅂ 말 잘했다. 저 개새끼들 이번 레이드 제발 실패했으면. 유혈 길드원한테 죽어서 며칠 접속 못 한 것만 생각하면 그 새끼들 면상에 휘발유 뿌려서 불태우고 싶네.

-지들이 약해서 털린 거 가지고 그러는 거 존나 추하죠? 약육강식에서 밀린 도태 겜창 쌀먹 새끼들 다 자살하면 소원이 없겠죠?

-[불쾌감을 유발하는 내용으로 인해 블라인드 처리된 채팅입니다.]

-근데 진짜 LOST가 대단하긴 하네. 지금 유튜브 채널 말고도 온갖 곳에서 다 중계 중인데? 방송사에서도 물었는지 TV에서도 나오고 걔들 인방 채널에서도 나오고. 대기업 BJ랑 스트리머들도 다 중계방송 중임.

-외국인 스트리머들도 다 중계 중이다. ㅋㅋㅋ LOST 스트리머가 LOST에 접속한 놈이 없다. 다 캠 켜고 리액션 준비하고 있어.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오, 시작했다!

순식간에 채팅의 파도에 파묻힌 누군가의 말대로 화면이 바뀌었다.

유혈 길드장 혈왕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준비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혈왕이 물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길드원이 대답했다.

[“완벽합니다.”]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혈왕.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

화면에 잡히는 커다란 동혈.

화면으로도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괴물의 아가리를 닮은 검은 구멍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확신한다. 저 앞에 있는 괴물도 우리의 노력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화면 속 혈왕은 그의 좌우로 도열한 길드원들을 한 명 한 명 시선을 마주치며 바라봤다.

[“더 이상의 긴말은 필요 없겠지. 가자. 그리고 승리하자. 그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예!”]

수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출은 짧게 끝이 났다.

혈왕은 가장 앞서 동혈 안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동혈의 끝자락.

그곳에는 커다란 괴생명체가 잠들어 있었다.

[키메라 하베르칸]

긴 뱀의 머리, 몸통은 육중한 도마뱀을 닮았다.

다리는 거미의 다리가 여덟 개가 붙어 있고, 꼬리는 전갈의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LOST에서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그 어떤 괴물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게 보이는 외형이었다.

-시발! 미쳤다, 미쳤어. 유혈 미친 새끼들 도대체 어디서 사냥을 하고 돌아다니길래 저딴 괴물을 발견한 거냐?

-와… 난 솔직히 최초네 대규모네 레이드네 하는 소리가 그냥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저건 인정이다. 그냥 비주얼만 봐도 오줌 지리겠네.

방송을 통해 혈왕과 유혈 길드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상상 이상으로 위압적인 몬스터의 위용에 놀라고 있었다.

[“우리를 막아서는 자.”]

[“한 줌 핏물이 되리라.”]

약속한 듯 구호를 주고받은 혈왕과 유혈 길드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혈왕은 커다란 대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고, 길드원들 중 탱커인 둘이 그 옆으로 함께 걸어갔다.

그리고 원거리 공격조와 그들을 지키는 호위조가 진형을 갖추고, 힐러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어디든 지원할 수 있게끔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최상위 길드’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30인의 유혈 길드 최정예가 자리를 잡고 진형을 갖춘 순간.

[“공격!”]

혈왕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것에 맞춰 30인의 길드원들은 일제히 가지고 온 마법 스크롤을 찢었고, 30줄기의 4성 공격 마법이 발동되어 날아갔다.

콰콰쾅!

그야말로 돈지랄의 향연.

터지는 폭음은 돈이 터져 나가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뛰어났다.

-크오오오옥!

잠들어 있던 하베르칸은 엄청난 화력이 집중된 공격에 놀라 깨어나자마자 버둥거렸다.

전투 시작과 동시에 그로기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지금이다! 전부 쏟아부어!”]

마법 스크롤은 쿨타임이 존재했다.

해서, 유혈 길드원들은 그로기 상태에 빠진 하베르칸을 향해 자신의 클래스에 맞는 스킬을 활용해 추가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30개의 4성 마법이 일제히 꽂히는 수준의 화력을 내는 방법은 거의 없었고.

상대적으로 약해진 공격에 하베르칸은 순식간에 충격에서 벗어났다.

몸을 일으켜 자신을 공격하는 것들을 노려본 하베르칸은 머리를 어지럽게 흔들며 달려들었다.

콰지직. 콰지직. 콰아앙!

그 공격을 앞으로 나선 탱커들이 받아냈다.

방패 하나에 프리미엄 세단을 퍼부은 탱커들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고, 분노한 하베르칸의 공격을 잘도 받아냈다.

혈왕은 그 틈을 타 자신의 클래스인 혈기사의 고유 스킬 「혈검술」을 펼치며 하베르칸의 거미 다리를 집중 공략했다.

숨도 쉬지 않고 공격하고 방어하고 지원하는 인간들.

분노에 발광하며 미친 듯이 인간을 잡아 죽이려는 괴물.

이미 수많은 도전을 하며 공략을 정형화했음에도 전투는 치열하고 힘겨웠다.

도전을 거듭할 때마다 다섯 명 이상씩 죽어 나가며 쌓은 경험이 무색해질 지경.

그럼에도 승기는 확실히 인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저게 다 얼마냐……? 진짜 돈지랄이란 게 저런 거구나.

-ㅋㅋㅋㅋ 저기 힐러가 던지는 약병 보임? 저거 시발 한 병에 제작비 50만 원짜리임. ㅋㅋㅋㅋ

-돈도 돈인데 진짜 무빙이 깔끔하다. 불필요한 움직임이 아예 없어. 힐러들 날아오는 돌 피하는 거 보셈.

-투사체 날아오는 거 탱커들이 컷해 주는 것도 미쳤네. ㅋㅋㅋ 저런 탱커 앞에 두고 있으면 힐 할 맛 나겠다. 내가 파티하는 탱커 새끼들은 맨날 지 죽는다고 힐 달라고 지랄만 하던데.

-상위권 길드랑 유저들은 그냥 건물주 연합이라더니 그 말이 맞네. 실력 있으면 뭐 하냐 저렇게 돈 안 쓰면 엔드 콘텐츠 근처도 못 가는 게 현실인데 ㅉㅉ 페이 투 윈 좆망겜 수준

└이런 소리 하는 새끼들 특: 실력도 좆도 없음.

└ㅋㅋㅋㅋ 맘대로 생각해라. 그런다고 LOST가 현질 좆망겜인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유혈 길드는 하베르칸과 싸우고, 방송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싸워 댔다.

그러는 사이 하베르칸은 검녹색 피를 줄줄 흘리며 점차 죽음과 가까워져 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 돼!”

“시발! 처음 보는 패턴이다! 거의 다 깠어!”

“야, 호식이 이 새끼야! 너 힐러 지키는 탱커가 왜 앞으로 나왔어!”

처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켜본다는 생각에 어색한 연기와 연출된 대사를 입에 담던 유혈 길드원들은 어느새 모든 걸 잊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고래고래 서로의 이름과 별명 등을 부르며 욕설을 내뱉고, 피와 땀을 흩뿌리며 무기를 휘두르고 몸을 굴렸다.

그러다 마침내.

콰직.

하베르칸의 길쭉한 목 아래 가슴 한복판에 혈왕의 대검이 꽂혔다.

-끄르르륵.

하베르칸은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쿠웅 하고 주저앉았다.

잠시 동안 소름 돋을 정도의 고요가 스쳐 가고.

“와아아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끝까지 살아남은 유혈 길드원 전부가 고함을 내질렀다.

꾸밈없는 진짜 희열에 찬 함성.

그들의 비매너 행위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잠시 동안 극적인 장면에 취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하베르칸의 껍질이 무너졌습니다.]

[진정한 하베르칸이 깨어납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생성됐다.

-잉? 분위기 이상한데?

올라가는 한 줄의 채팅과 함께 쓰러진 하베르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뭐?”

혈왕은 놀라 추가적인 공격을 하려 했으나.

푸화악.

하베르칸의 상처 부위에서 독액이 뿜어지는 바람에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죽은 거 아니야? 왜 움직이고 지랄이야!”

억울함 가득한 외침에도 하베르칸은 계속해서 꿈틀대더니 등이 쫘악 갈라지며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로 변하여 태어났다.

[키메라 하베르칸이 탈피하여 진화를 마쳤습니다.]

[저주받은 피조물 하베르칸이 깨어납니다.]

뱀, 도마뱀, 거미, 전갈. 키메라 하베르칸을 구성하는 생물의 공통점은 탈피.

그렇다. 하베르칸은 탈피하여 더욱 강력한 괴물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유혈 길드원들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절망했다.

“어, 어떻게 하죠?”

길드원의 물음에 혈왕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시발. 방송 송출만 아니면 그냥 튀면 되는데!’

하지만 지금은 튈 수가 없었다.

새롭게 튀어나온, 검녹색 진액으로 둘러싸인 ‘진짜’를 두고 바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겁쟁이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어그로를 끌기 전, 공략법을 알아낼 때처럼 위험하다 싶으면 냅다 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도전은 해 보고, 몇몇쯤 안타깝게 희생되는 그림이라도 나와야 극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을 텐데…….

계산을 마친 혈왕은 길드원들에게 외치려고 했다. 일단 부딪쳐 보자고.

콰아아아!

그런데 혈왕이 목소리를 내보기도 전에 갓 태어난 아기 가젤처럼 맥을 못 추던 하베르칸이 고개를 팍 들더니 브레스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위를 향해 계속해서 뿜어지는 검녹색 기체에 혈왕은 불길함을 느끼고 공격을 명령하려 했으나 늦은 판단이었다.

“으윽……!”

빠르게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한 검녹색 기체에 닿은, 정확히는 그걸 마신 길드원들이 비틀거리더니 쓰러졌다.

“컥.”

혈왕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아 순식간에 흔들리는 시야를 인식하고 나니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이미 HP와 스태미나가 잔뜩 소모된 상태에서 독가스를 마시는 바람에 순식간에 상태가 악화된 것이었다.

‘제, 젠장……!’

혈왕은 빠르게 줄어가는 생명력을 확인하고는 죽음을 예감했다.

-…LOST 난이도가 뭐가 없긴 없네. 저 고생을 해서 잡았더니 ‘짜잔 2페이즈 시작이요.’ 이딴 게 말이 되냐? 뫼비우스는 개새끼들이 확실하다.

-50레벨 넘기면 일반 몹도 개같이 세진다더니, 진짜 보스급 가면 양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만든 수준이구나. 쟤들도 나름 존나 잘 싸웠는데도 결과는 개같이 멸망트리라니.

-저러면 저거 처음부터 잡아야 하는 거임? 초기화되나?

└그건 모르지. LOST가 워낙에 던전마다 제각각이라.

-유혈 애들 사망 페널티 때문에 당분간 접속도 못 할 텐데 다른 놈들이 저기 위치 찾겠다고 아주 난리 나겠네.

└어쩔 수 없지. 유혈 애들이 입에 달고 살던 말 아님? 힘으로 쟁취한다. 그 소리 하면서 소규모 길드가 찾아 놓은 히든 던전 뺏은 건 아직도 욕먹는 일인데.

사실상의 레이드 실패라는 결과를 두고 모두가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때였다.

-저기 누구 새로 나오는데?

-어, 진짜네. 독가스 안 마신 길드원이 있었나?

독가스에 중독되어 모두가 쓰러진 현장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입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던전 최심부에 등장한 것은… 도진이었다.

도진은 여전히 쉬지 않고 굴뚝처럼 독가스를 위로 뿜어 대는 중인 하베르칸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런 도진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불며 독가스를 몰아냈다.

바람은 유혈 길드원들이 쓰러져 있는 범위 전부를 안전지대로 만들었다.

하나 바람이 멈추는 순간 동혈 전체를 채우다시피 한 독가스가 다시 잠식해 올 것은 자명한 사실.

그때. 그저 시간을 버는 정도의 발악으로 여기며 모두가 지켜보는 순간.

딱.

도진의 손가락이 맞물려 소리를 냈다.

《점화》

겨우 1성 마법. 기초 중의 기초다.

그러나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가연성 높은 기체가 가득 찬 공간에서 일으킨 불씨다.

대폭발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