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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혼자가 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레벨 50에 도달한 도진은 캡슐에서 나와 기지개를 켰다.
“후우, 1차 목표는 달성했고. 이제 나머지 준비만 철저히 하면 되겠네.”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스트레칭을 한 도진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선선한 10월의 공기가 들어온다.
저녁이라 그런지 반팔 차림으로는 꽤 추웠다.
도진은 재빨리 문 앞에 놓인 택배를 가지고 들어와 첫 번째 상자부터 개봉했다.
건강을 위해 주문한 샐러드 도시락 세트였다.
도진은 가장 위에 놓인 연어 샐러드를 뜯어 대충 집어먹으며 나머지 상자를 개봉했다.
“캡슐용 웰빙 에너지팩에 탄산수… 종합 영양제… 어? 캡슐 등받이 쿠션은 아직 안 왔나? 아, 이거구나.”
하나같이 건강 관련 음식이나 약, 캡슐 보조기구 등으로 구성된 택배들 합친 금액은 무려 87만 원.
20살 이전의 도진은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었고, 전생의 도진은 돈이 있어도 게임에 전부 갖다 바치느라 생각도 안 했을 과감한 소비였다.
이번에는 게임도 게임이지만, 현실을 잘 챙겨서 멋진 인생 길게, 또 아프지 않게 살아 보자는 마음에서 벌인 일이었는데, 이를 통해 도진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돈 쓰는 게 생각보다 재밌구나.’
드드드드득 하는 소형 안마기의 진동을 느끼며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 버는 돈은 당연히 게임으로.
현실에서 생긴 돈도 게임으로.
결과적으로 현생과 겜생 둘 다 피폐하게 만들었던 돈지랄은 해도 해도 허무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쓰는 돈맛은 꽤 달았다.
뭔가 고생한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게 노동과 소비의 참맛이겠지.
다시 고개를 주억거린 도진은 남은 연어 샐러드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자, 그럼 재택 근무 좀 해 볼까.”
택배 정리를 마친 뒤 바로 캡슐에 누우려던 도진이 멈칫했다.
방금 밥을 먹고 바로 누우면 나중에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서였다.
‘젊음을 과신하지 말자. 늙어 봐서 알잖아. 지금 저지르는 죄는 서른만 넘어도 바로 업보로 돌아온다. 절대 방심하면 안 돼.’
어차피 하려던 건 게임이 아니라 정보 검색.
캡슐에 누워서 안 해도 컴퓨터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진은 보육원 출신에게 지원되는 싸구려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로트라넷을 둘러보니 한동안 시끌시끌했던 도진에 관한 이슈는 이제 눈에 띄지 않았다.
현재 LOST 유저들의 관심을 쓸어 담고 있는 화젯거리가 워낙 핫한 것이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증발한 것이었다.
‘유혈 길드…….’
그것은 바로 유혈 길드의 대규모 레이드 예고.
도진은 로트라넷 메인 페이지 가장 상단에 있는 글을 클릭했다.
[안녕하십니까. 유혈 길드장 혈왕입니다.]
유혈과 혈왕. 두 단어를 본 도진의 입매가 위험하게 비틀렸다.
유혈 길드 그리고 혈왕은 도진과 깊은 악연을 지닌 길드이고 사람이었다.
공격 마법만 쓸 수 있는 극악한 조건을 지닌 마법사임에도 도진은 노력과 실력, 그리고 인생을 포기한 투자로 말단이긴 해도 랭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억 단위 플레이어 중 겨우 1,000명만이 ‘랭커’ 딱지를 붙일 수 있었던 만큼 도진도 나름 이름을 날렸고, 인기가 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유혈 길드와 시비가 붙으면서 도진은 나락에 빠지게 됐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도진의 신상을 알아낸 유혈 길드, 정확히는 혈왕이 현실의 도진에 대해 폭로를 해 버린 탓이었다.
게임에서는 멋있는 마법사인 척하지만, 현실에서는 제 발로는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는 장애인.
좋은 장비로 온몸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어 봐야 현실은 장애인 보조금이나 타 먹는, 빚에 허덕이는 쓰레기 인생.
처음으로 LOST의 도진과 현실의 도진을 연결하여 폭로한 글귀.
누가 퍼뜨렸는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지만, 도진은 알고 있었다.
‘혈왕.’
이 빌어먹을 새끼가 범인이라는 것을.
「어때? 기분이. 말 좀 해 봐. 팔다리만 병신이 아니라 입도 병신이었냐? 내가 듣기로는 말은 할 줄 안다고 들었는데.」
비틀린 웃음을 머금고 하던 말을 도진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 까불어 봐. 그땐 더 비참하게 만들어 줄게. 병신 장애인 새끼야.」
모든 사람이 도진의 현실을 알고서 조롱하거나 비웃지는 않았다.
그를 동정하고, 안타깝게 여기며 신상을 폭로한 자를 비난하는 여론도 상당했다.
그러나 상처로 가득한 짐승 같은 상태였던 도진에게는 그 모든 관심이 버거웠다.
도진은 그 모든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현실을 외면했고, LOST에 집착하며 혼자 되기를 선택했었다.
‘전생에는 결국 복수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밟아 주마.
잠시 동안 이글거리는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도진은 혈왕이 직접 올린 영상을 재생시켰다.
[“유혈의 혈왕입니다.”]
오만한 목소리로 시작된 영상은 짧지 않은 유혈 길드 소개로 이어졌다.
[“이미 유혈이란 이름을 들어본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우리 유혈은 여러 게임의 최상위 랭커들이 모인 최정예 길드로, LOST의 최전선에서 앞을 개척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랭킹 시스템이 없는 게임이 아니었다면, 저와 우리 길드는 분명 최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 유혈이 이번에도 새로운 도전에 나서려 합니다. 그건 바로 LOST 최초의 대규모 레이드 몬스터 토벌입니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화면에 혈왕 대신 검은색 실루엣이 나타났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잠들어 있는 모습.
화면은 점점 다가가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전환됐다.
[“우리 유혈은 플레이어에게 허락된 영역 중 가장 위험한 곳을 탐험하는 길드이고, 자연히 가장 위험한 존재를 가장 먼저 마주하는 집단입니다. 그런 위험을 마주하고, 누구보다 먼저 물리치는 건 모험과 탐험에 있어 가장 전율스런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전율의 순간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다가오는 10월 10일. 우리 유혈은 LOST 최초 레이드 몬스터 토벌 현장을 숨김없이 생중계하기로 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영광을! 유혈의 승리를!”]
아저씨들이나 좋아할 법한 웅장한 BGM이 깔리며 영상이 마무리됐다.
“10월 10일이었나.”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생의 도진은 이맘때 LOST를 하고 있지 않았으니.
다만 LOST 최초 레이드 보스에 도전한 것이 유혈의 혈왕이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게 이맘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공략에 실패하긴 하지만, 이걸로 유명해진 덕에 기업형 길드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됐었지.’
지금도 유혈 길드는 유명한 편이긴 하지만, 혈왕의 말만큼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의 유혈 길드는 전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대형 길드로 성장하고, 혈왕 또한 랭킹 100위 안쪽에서 노는 하이랭커가 된다.
그게 전부 다 LOST 최초 레이드 몬스터 토벌 도전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토벌 실패 후 달려드는 다른 길드들과의 각축전으로 유명세를 떨친 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위치랑 힘으로 나한테 좆같이 굴었고 말이야.’
어쨌든 정확한 날짜를 알게 됐으니 됐다.
도진은 10월 10일이라는 날짜를 한 번 더 눈에 새긴 뒤 댓글 반응을 살폈다.
-유혈? 쟤들 비매너 길드 아님?
└비매너랄 게 뭐가 있냐? 쟤들 길드원 전체가 50레벨 넘는데 마주칠 일이나 있음?
└ㅋㅋㅋ 다 너처럼 쪼렙인 줄 앎? 쟤들이랑 사냥 동선 한 번이라도 겹친 적 있는 고인물은 다 알걸? 쟤들 여기 자기들이 통제 중이니까 꺼지라고 신사적으로 통보하는 새끼들임.
-레벨이 문제가 아니라 저 길드 소속된 사람들 다 건물주라는 소리가 있음 방송 키는 사람도 몇 있는데 맨날 엄청 과금하고.
└LOST에 과금이 있어? 그냥 이용료 내고 끝 아님?
└현금으로 템 산다고
-근데 뭐 보여 주는 게 겨우 그림자뿐이야? 저걸 보고 뭘 기대하라는 거임?
-레이드면 몇 명이 잡는다는 거야? 그래 봐야 뭐 필드 보스나 오픈형 던전 보스 잡듯이 우르르 몰려가서 패고 끝 아님?
└뭐가 됐든 쟤들이 사냥하는 곳에서 발견했으면 존나 센 몬스터겠지. 우린 그냥 팝콘 뜯으면 됨. 우린 어차피 저기까지 가려면 3개월은 더 꼬라박아야 하니까.
-근데 시발 ㅋㅋㅋ 난 유혈인지 뭔지 오늘 첨 보는데 댓글 보니까 그냥 과금충들 아냐? 돈 존나게 발라서 세지는 거 누가 못하냐. 실력으로 찍어 눌러야 그게 진짜지.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법사 게시판에 난리 났던 그 마법사처럼.
└응~ 그 새끼도 발동형 아이템 존나 좋은 거 썼어~ 황금색 번쩍번쩍 하는 그거 현금가 최소 3천만 원은 넘는 템이야~
└ㅋㅋㅋㅋㅋ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거 템 뭔지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씹뉴비인 거 티내죠? LOST에서는 돈 있어도 그런 템 못 구하는 구조인 거 모르죠?
-병신들아 싸우지 좀 마라. 늬들은 저거 기대도 안 되냐? 시발 어찌 됐든 나중에는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콘텐츠라는 거 아냐. 겜돌이 새끼들이 레이드가 던져졌으면 그거나 쳐다볼 것이지 싸우긴 왜 싸워.
-비매너 길드든 뭐든 솔직히 존나 멋있다. 쟤들 말대로 정말 제대로 된 대규모 레이드 보스면 LOST 최초잖아. 그걸 한국 길드가……? 국뽕 차오르는 소리 안 들려?
└ㅇㅈㅇㅈ 이왕 잡을 거면 개새끼라도 우리 집 개새끼가 잡는 게 낫지. 일본 새끼들이 먼저 잡는다고 생각하면 피 거꾸로 솟죠? 오늘 잠 못 자죠?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댓글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었다.
유혈 길드의 비매너를 직접 겪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수인데 반해 드러난 강한 모습에 매료된 단순한 사람들은 많았기 때문이다.
도진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지금 최대한 즐겨 둬라.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을 영광일 테니까.”
닿을 리 없는 경고를 읊조린 도진은 로트라넷 아이템 거래 페이지로 넘어갔다.
도진은 마철강 장신구 중 목걸이, 귀걸이 판매글을 올렸다.
반지 한 쌍과 팔찌만으로도 충분한 마나 회복이 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얼마쯤 하려나?”
비싸게 팔렸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로스타니아로 향하기 위해서.
기적처럼 찾아온 복수의 기회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