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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뜨리거나 단순히 불로 지져서 그 고열로 녹여 내기에는 벽이 지나치게 두껍다.
그래서 도진은 암석 등을 녹이는 데 특화된 「융해」를 쓰기로 했다.
문제는 「융해」가 5성 마법이라는 것.
5성 마법부터 본격적으로 습득 조건이 까다로워지는 거야 사기 클래스 및 스킬인 「진리의 서」를 보유한 도진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레벨은 다른 문제다.
5성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최소 조건은 레벨 100 이상.
현재 레벨 43에 불과한 도진에게는 엄두도 못 낼 아득한 경지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도진에게는 다 방법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이 정도 돈이면 할 수 있지.’
도진은 시세가 가파르게 상승한 연화의 저주 스킬북과 지금까지 쌓인 재료템, 장비템 등 팔 수 있는 모든 걸 처분했다.
그렇게 모인 돈은 총 17,800골드.
현금으로 환산해도 1,70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잠시, 도진은 월급날 통장 잔액을 확인하는 직장인의 눈으로 인벤토리에 찍힌 숫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아련한 것은… 이제 곧 이 돈이 아름답게 증발할 걸 알아서였다.
마치 아주 잠시 계좌에 머물렀다 사라지는 뭇 서민들의 급여처럼 말이다.
‘이게 다 빠른 레벨업을 위한 투자다.’
돈이야 벌려면 나중에 얼마든지 벌 수 있다.
이번 생에는 정점에 우뚝 서기로 마음먹은 이상 주저 따위 없었다.
“잠시만 안녕하는 거야… 계속 못 보는 거 아냐.”
이날, 5시간 만에 도진의 인벤토리에 남은 잔액은 1,200골드가 되었다.
* * *
모험가 길드 지부에 돈을 내고 빌린 마법 공방.
탁자 위에 값비싼 재료 아이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기형 목도리 도마뱀의 가죽과 혈액.
마법적으로 액화한 순금.
마찬가지로 액화한 순은.
마법사용 목탄.
그리고 마석.
하나같이 비싼 물품들이 소량도 아니고 꽤 많은 양이 준비되어 있었다.
도진이 이것들을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산 이유는 하나.
「융해」를 담은 마법 스크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3성 마법사가 5성 마법 스크롤 제작에 도전했을 때 성공할 확률은 1퍼센트 언저리지만… 그래도 150번 가까이 시도하면 하나는 성공하겠지.’
높게 잡아야 1퍼센트가 될까 말까 한 확률.
그나마도 낮은 확률을 뚫고 제작에 성공해도 결과물은 위력 면에서나 효과 면에서나 진짜 5성 마법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떤 유저도 하지 않는, 그저 돈 낭비에 불과한 뻘짓으로 취급받는 일이지만, 도진에게는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는 도박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벽을 녹일 수단이지 진짜 5성 마법이 아니니까.
“시작해 볼까.”
언제나 그렇지만, 확률이 개입하는 도박을 시도할 때는 심장이 뛴다.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흥분감이 도진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가슴이 날뛴다 하여 머리까지 따라 움직이면 곤란했다.
제작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마법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
그것을 위해, 도진은 몸에 녹아들어 체화되다시피 한 제작 과정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런 뒤 진리의 서를 발동했다.
진리의 서를 펼친다고 제작 확률이 오른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도진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엘토마기아의 만리서고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마법계의 슈퍼컴퓨터라면, 마법에 관한 모든 곳에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이.
황금색이 너울대는 손이 스크롤의 본체가 될 용족의 친척의 사촌의 이종사촌쯤 되는 몬스터의 가죽을 제작대 위로 올렸다.
‘다음은 마법사용 목탄으로…….’
마법진의 밑그림을 그릴 차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작업이다.
밑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목탄을 떼는 일이 없어야 했다.
도진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한 번에 마법진의 초안을 그려 넣었다.
그런 뒤 빠르게 다음 작업을 위해 손이 움직인다.
마석을 빻아 가루를 만들고, 가루가 된 마석이 변성되기 전 마법적으로 처리된 액체 순금과 순은을 섞는다.
그것을 적절한 속도로 휘저어 마법적 안료를 만들었다.
도진은 만든 안료를 사용해 목탄으로 그린 밑그림 위로 진짜 마법진을 그렸다.
“후우…….”
이제 마지막 작업이다.
스크롤 발동을 위한 마나를 주입하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작업.
도진은 제각각 크기가 다른 마석을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무게가 아닌 마나를 재는 저울이다.
가장 적절한 용량을 찾을 때까지 큰 것과 작은 것을 넣고 빼며 마나량을 맞췄다.
그런 뒤 마석을 마법진 중앙에 올려 두고, 진짜 제작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모든 것들은 그저 이 순간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한 행위들.
심호흡을 한 뒤 도진은 기억하고 있는, 「융해」의 마법 코드를 떠올리며 회로를 열었다.
회로에 입력되지 않은 마법이기에, 순전히 술자의 기억력으로만 완성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
마석이 반응한다.
그린 마법진도 함께 반응하며, 안료에 함유된 금과 은이 방울지며 통통 튀었다.
조심, 또 조심. 아주 섬세하게 마나를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파지직.
도진의 마음과는 달리 통제되던 마나가 순간적으로 화를 내듯 꿈틀했다.
일순간이었으나 마나가 휘도는 혈관에 균열을 만들기에는 충분한 반항이었다.
“크윽!”
그것을 느낀 도진은 곧바로 회로를 닫고 물러났다.
그 순간 공방에 설치된 안전장치들이 발동됐다.
불안정한 마나가 연소하여 발생하는 마력을 강제로 흩어놓는다.
하지만 어설프게 발동된 마법으로 이미 재료들은 눌어붙은 타르처럼 변한 후였다.
“젠장…….”
머리로는 도진도 알고 있었다.
1퍼센트라는 확률이 한 번에 성공할 리가 없다는 걸.
하지만 기대감이란 건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
순식간에 현금 10만 원이 넘는 돈이 검게 눌어붙은 무언가가 되어 버린 광경을 보니 속이 쓰렸다.
[제작자의 역량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필연적이며 당연한 실패!]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마십시오!]
[스크롤 제작에 실패하여 모든 재료가 소실되었습니다!]
사람 놀리나.
두 눈으로 녹아내린 타르 꼴을 한, 약 10만 원(이었던 것)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쓰렸다.
신경질적으로 시스템 메시지를 치워 버린 도진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새로운 제작 작업에 착수했다.
‘멘탈 흔들리면 나만 손해다. 최대한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침착해야 해.’
시간, 돈, 체력, 심력… 가진 모든 걸 쏟아붓는 도박이 계속됐다.
중복되는 실패에 피해 금액은 그 덩치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 * *
[만용으로 인한 결과!]
콰앙!
메시지가 전부 뜨기도 전에 도진은 테이블을 내려쳤다.
“말이 안 되잖아! 1퍼센트씩 130번을 했으면 한 번은 떠야 하는 거 아냐?”
모든 것은 독립시행.
덧셈이 아니기에 100번을 하든 1,000번을 하든 모든 시도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가 당장 1천만 원이 넘는 돈이 타다 만 껌딱지가 된 사람에게 들릴 리 없었다.
심지어 이 도박은 버튼 한 번 누르면 결과가 뜨는 그런 쉬운 도박도 아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식은땀이 날 정도로 그리고 새기고 섞고… 한 번 한 번이 온갖 중노동 끝에 도전하는 도박인 것이다.
“이제 겨우 20번쯤 남은 건가…….”
150번의 기회가 있을 때는 150번이면 한 번은 성공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20번의 기회만 남은 상황.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도진은 착잡한 눈으로 진리의 서로 인해 피어나는 옅은 황금색 아지랑이를 바라봤다.
이것도 별 소용이 없는 건가.
소모되는 마나를 보충하느라 마신 마나 포션만 아까운 일이었던 것일까.
모든 게 부정적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물러나기엔 많이 늦었다.
그래,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도전하자.
“이런 걸로 돈 날리는 게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다 날리면 더 빡세게 벌면 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도진은 으득 이를 악물었다.
다시금 제작 과정에 들어간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더욱 집중해서.
1번, 2번, 3번… 그리고 6번.
실패가 더 쌓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렸다. 부쉈다. 섞었다. 그리고 다시 그렸다.
그렇게 또 한 번 도진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할 모든 작업이 마무리됐다.
한계까지 끌어올렸던 집중이 풀리자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반응이 일어났다.
[이해하기 힘든 영역의 마법에 지속적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마법사란 무릇 무모함에서 길을 찾기도 하는 법.]
[고도의 집중력과 두려울 정도의 집착!]
[‘마법’에 대한 이해가 아주 조금 깊어집니다!]
[기록된 마법에 대한 해석이 아주 조금 용이해집니다.]
떠다니며 난반사를 일으키던 마나가 조금 더 밝게 빛나더니, 진리의 서가 글귀를 만들어 낸 것이다.
‘마법’에 대한 이해가 상승하여 전체적인 마법 해석에 보너스가 붙었다는 메시지였다.
그것을 본 순간 도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등골에 짜릿한 전율이 내달린다.
[믿기 힘든 성공!]
[끝없는 집착으로 과분한 경지의 마법을 스크롤에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지능이 3 상승합니다.]
[체력이 1 상승합니다.]
예상대로 제작 성공 메시지가 출력됐다.
“으아아아!”
도진은 괴성을 질렀다.
기쁨보다는 지금까지 날린 재료와 돈 그리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에서 나오는 괴성이었다.
준비된 재료 150회분.
시도 횟수 147회.
딱 3회분의 재료를 남기고 도진의 손에 「융해」가 담긴 마법 스크롤이 쥐여졌다.
“역시 조금 손상되긴 했네.”
제작자가 술식을 완벽히 통제할 역량이 안 되다 보니 그려진 마법진에 손상된 구석이 꽤나 많이 눈에 띄었다.
주입된 마나도 절반가량은 소실됐고.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성공했으면 됐지. 빌어먹을 벽을 녹여 낼 수 있으면 족하다.
그리고 부수적인 소득도 있고 말이다.
마법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는 명목으로 해석에 보너스가 붙었으니, 기록된 모든 마법의 숙련도를 더 효과적으로 챙길 수 있게 된 셈이다.
얻고자 했던 것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것까지 얻은 도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약속 시간까지 7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재료를 준비하는 데 하루가 걸리지 않았으니, 이 공방에 틀어박혀 제작에 몰두한 지 어느새 30시간이 훌쩍 넘었다는 소리였다.
“밖으로 나가면 5시간도 못 쉬겠네. 차라리 수면 모드로 이쪽에서 잠드는 게 낫겠어.”
폐인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벽을 녹이고 던전 심부로 진입하면 힘든 전투가 될 테니.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야지.
너무 집중한 탓인지 쉬려고 마음을 먹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인게임 아바타에게 쏟아지는 시스템적인 졸음 그리고 플레이어인 도진이 느끼는 졸음이 더해져 저항할 수 없는 수마가 덮쳐왔다.
‘공방 대여료가 더 나오겠지만… 못 움직이겠어.’
스륵. 무너지듯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도진은 잠들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만든 마법 스크롤을 꼭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