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나마 멀쩡하여 집을 잃은 마을 사람들의 임시 숙소가 된 회관.
다들 피로에 지쳐 죽은 듯이 잠든 와중에 홀로 한숨 짓는 사람이 있었다.
“하아…….”
근심이 가득 담긴 한숨의 주인공은 굴락 마을의 촌장이었다.
“촌장님?”
멍하니 골몰하고 있던 촌장은 자신을 부르는 조용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자고 있던 하놀즈였다.
혹여나 아내와 딸이 깨지 않을까 조심조심 일어나 촌장에게 다가오는 하놀즈.
곰 같은 하놀즈가 다른 사람들을 피해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우스워 촌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촌장님, 왜 주무시지 않고 그러고 계세요?”
“허허, 자네야말로 더 자지 않고.”
촌장의 말에 하놀즈가 촌장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서로 끌어안고 자고 있는 아내와 딸이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충분히 잤습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일어나서 산 탈 준비를 할 시간인데요.”
“평소가 아니지 않나. 어제 그렇게 고생을 해 놓고.”
“저만 고생했습니까? 다 같이 고생했지.”
하놀즈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자신의 아내와 딸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이 꿈이 아니란 걸 확인하듯.
“고맙네.”
그런 그를 보며 촌장이 말했다.
하놀즈는 영문을 몰라 촌장을 바라봤다.
“뭐가요?”
“자네가 그 마법사님을 모셔 오지 않았으면 우린 다 죽었을 게 아닌가. 문제는…….”
말끝을 흐리며 마른세수를 한 촌장은 후우, 하고 한숨까지 다시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마법사님께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하느냐는 걸세. 우리가 가진 걸 전부 드린들 그게 몇 푼이나 되겠나.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많던 몬스터를 혼자서 처치한 분께는 푼돈으로 보이겠지. 자네도 알지 않나. 힘 있는 자들은 자신이 정해 놓은 선 안에서만 자비롭다는걸. 혹시라도 우리가 돈을 아끼려 수작을 부린다 생각하면 어쩌나… 그게 걱정일세.”
“…마법사님은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저희가 저희 나름대로 성의만 다하면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한데, 그러면 그 뒤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이번 일로 겨울을 나려고 준비한 것들이 다 날아갔네. 땔감은 다 태웠고, 식량도 절반 이상은 못 쓰게 됐어. 나머지도 젖어 버려서 당장 먹어 치워야 할 판이지. 이런 상황에 가진 걸 다 주고 나면…….”
“…….”
살아남은 것을 기뻐할 겨를도 없는 약자의 설움.
사람을 절단 내고 씹어 삼키는 괴물에게서 살아남았더니 이제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다른 괴물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한참 고민을 하던 촌장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하놀즈를 보았다.
“어쩔 수 없지. 날이 밝는 대로 우리가 가진 걸 모아서 마법사님께 드릴 돈을 마련하도록 합세.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리고 사정을 잘 설명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으니. 그리고 겨울을 날 돈은… 영주성에 가서 빌리는 수밖에.”
“초, 촌장님!”
촌장의 말에 하놀즈가 화들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주성에서 돈을 빌린다는 건 그만큼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영주에게 빚을 지는 순간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며 돈을 갚을 때까지 자유민 신분을 잃게 된다.
빚을 갚으면 되는 문제라지만, 높은 이율을 생각하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자를 상환하는 게 조금만 늦어져도 가산을 압류당할 것이고, 결국에는 영주의 땅을 일구는 농노로 전락하고 만다.
괜히 귀족들이 평민에게 웃으며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닌 것이다.
제대로 갚으면 이자를 두둑하게 챙기니 좋고, 못 갚으면 평생을 넘어 그 자식의 자식까지 뽑아먹을 노동력을 얻는 셈이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촌장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영주한테 돈을 빌리는 순간 마을 사람들 전체가 노예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요. 저희야 그렇다 치지만, 애들은요? 부모가 진 빚 때문에 평생 농노로 살게 되는 건 너무하잖습니까!”
“…잘 갚아 봐야지.”
“그 높은 이자를 어떻게요? 차라리 제가 마법사님께 사정을 해 보겠습니다. 나중에, 날이 따뜻해지면 약초를 열심히 캐서 사례금을 마련해 볼 테니 사정을 좀 봐 달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촌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용없는 일일세. 어차피 겨울을 나기에는 돈이며 먹을 것이며 입을 것까지… 턱없이 모자라. 애들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면 영주성에서 돈을 융통하는 방법뿐이야.”
“그런……!”
녹록치 않다 못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하놀즈는 말을 잃었다.
그때 회관 앞에서 번을 서고 있어야 할 청년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촌장과 하놀즈를 발견하고는 조심조심 사람들을 뛰어넘으며 다가온다.
“루카스, 무슨 일이냐?”
“바, 밖에 마법사님이 하놀즈 씨를 좀 데려와 달라고 하셔서요.”
“마법사님이? 아직 새벽인데 벌써 일어나셨다고?”
“네, 하놀즈 씨한테 할 말씀이 있으시다고. 조용히 깨워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부름에 하놀즈와 촌장은 당혹스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같은 날 저녁.
하놀즈는 울다 지쳐 잠든 딸을 보며 이른 새벽 떠나간 마법사를 떠올렸다.
흐르듯 나타났던 마법사는 훌쩍 떠나면서 많은 걸 남겼다.
사례를 요구해도 모자랄 판에 겨울을 나기 힘들 거라며 1,000골드라는 거금을 남겼고.
딸아이의 마음에는 당분간은 쉬이 아물지 않을 멍을 남겼다.
아니, 당분간이기는 할까?
이런 인연을 쉬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도 딸내미는 아주 오랫동안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할 터였다.
“…소피가 일어날 때까지만이라도 계시면 좋았을 것을.”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소피는 정말 많이도 울어 댔다.
지금도 소피는 그 마법사가 준 단검과 팔찌를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그중 단검을 눈에 담으며, 하놀즈는 마법사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소피에게 엄청난 검의 재능이 잠들어 있다는, 다소 믿기 힘든 말을.
“상상이 안 되는군. 그분이 허튼소리를 하실 리는 없으니 정말 그렇긴 하겠지만…….”
하필이면 검이라니.
검이라. 참,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단어다. 살벌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하지만… 재능이 있다면. 정말 그분의 말씀이 맞다면.
“…이 아이는 우리처럼 살지 않을지도 몰라.”
가난에, 괴물에, 세상의 부조리함에 치이는 일 없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검을 쥐지 않는다고 안전한 세상인가?
아니다.
오히려 검을 쥐고 살아가는 게 안전한 게 이 세상이다.
내 딸은 매해 겨울 배곯을 걱정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딸은 짐승이나 괴물 밥이 될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하놀즈는 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분께서 딸을 키울 때 쓰라며 따로 주신 돈과 정말 필요할 때 쓰라고 준 추천장이 만져졌다.
돈도 돈이지만, 추천장은 무려 엘토마기아의 어느 마법사 앞으로 써 주신 추천장이었다.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인 하놀즈도 엘토마기아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가장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제국 마탑의 이름.
아마도 은인께서도 그곳에 몸을 담은 마법사시겠지.
그런 분의 말을 믿어서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거다.
하놀즈는 결심을 세웠다.
하늘이 딸에게 내려준 기회에 걸림돌이 되는 일 없이, 정말 제대로 부모 노릇을 하겠노라고.
* * *
굴락 마을을 떠난 도진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가장 가까운 모험가 길드 지부였다.
그곳에서, 도진은 굴락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진술하고 있었다.
“…꽤나 심각한 사건이군요. 혹시 그건 저희가 증거물로 받아 둬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도진은 망가진 유혹의 법구를 내밀었다.
마을에서 발견된 건 돼지한테 선물하고 왔고, 이건 반푼이 마법사가 들고 있던 쪽.
그것을 받아 든 길드 관계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적더니, 곧 고개를 꾸벅, 하고 숙였다.
“모험가님의 제보 및 사전 조치에 모험가 길드를 대표해 감사를 표합니다. 이번 건에 대한 보상은 사건 조사를 끝마치는 대로 지급이 될 것입니다. 보상 수령은 어느 모험가 길드 지부에서든 가능하도록 조치할 테니 편하신 곳에서 수령하시면 됩니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제대로 조사해서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습격당한 마을은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거든요. 그쪽도 꼭 조치를 취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도록 잘 조처하겠습니다. 모험가님의 말씀대로 정말 몬스터를 이용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려 한 것이라면, 이건 인류에 대한 배반 행위. 모험가 길드의 검 끝에 자비란 없을 겁니다.”
모험가 길드뿐일까.
이 세계에서 몬스터란 존재는 그야말로 인류의 공적 취급을 받는다.
그렇다 보니 로스타니아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몬스터의 편에 서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모험가 길드는 황실에 조사 협조 요청을 할 테고, 그러면 연루된 자들은 줄줄이 목이 매달릴 것이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그놈도 다 알고 있었을 텐데.’
도진은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영주와 떨거지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쨌든 마지막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했고, 그걸 이용해서 또 한 번 모험가 길드에서 줄 보상까지 예약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운명 퀘스트도 완료했겠다, 소위 뽕에 취해 더 얻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겠지만.
도진은 달랐다.
무엇이 되었든 사건 하나, 퀘스트 하나에서 우릴 수 있는 건 무엇이 되었든 삭아 없어질 때까지 우려먹어야 하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모험가 펜던트에 저장된 몬스터 토벌 기록 보상까지 잊지 않고 챙긴 도진은 모험가 길드를 나섰다.
“그럼 이제 거래소만 들르면 끝인가.”
도진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거래소였다.
돈이 부족할 때야 높은 거래 수수료가 아까워서 발품을 팔았지만, 지갑이 두둑해졌으니 시간을 절약하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금으로 시간을 사는 셈.
거래소 건물에 당도한 도진을 반긴 건 소란스러움이었다.
“저레벨용 장비나 각종 아이템 최고가로 구입합니다. 거래소 수수료 아끼시고, 바로 돈 받아 가세요!”
“이런저런 장비템들 거래소보다 싸게 팝니다!”
“직접 만든 질 좋은 물약 팝니다.”
규모가 작은 마음임에도 거래소 앞은 거래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거래소를 이용하러 온 사람들을 상대로 아이템을 사고파는 유저들로 붐볐다.
도진은 그런 물건들에 관심이 없었기에 곧장 거래소 건물로 들어가서 바로 거래소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정해진 장소에서만 열 수 있는, 익숙한 검색 화면이 떠올랐다.
‘매물이 있을지 모르겠네.’
도진은 검색 카테고리를 스킬북으로 설정하고 매물을 훑었다.
워낙 스킬북이 귀한 시기여서 그런지 매물은 적고 값은 비쌌다.
쓸 만하다고 소문 난 것들은 아예 재고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도진은 걱정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마법인 저주 계열 스킬북이 지금 시점에는 애물단지 취급이나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직 이게 비싸질 타이밍이 아니지.’
공격 마법조차 몇 번 쓰다 보면 마나통이 텅텅 비어서 토끼니, 조루니 하는 조롱을 당하는 게 현재 마법사의 입지다.
그런 마법사 입장에서 마나 효율은 엉망에, 활용하기 까다로운 저주 마법은 계륵을 넘어선 영역의 무언가였다.
하지만 조건과 상황만 갖춰지면, 저주는 효율의 끝을 달리는 효자 스킬로 둔갑한다는 걸 도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는 다른 놈들이 꿀 빠는 걸 보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제일 먼저 꿀통에 빠져 주마.’
찾는 이가 없어 거래소에 쌓이고 쌓인 악성 재고를 헐값에 사들이며, 도진은 한 맺힌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