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굴락 마을이 건너 보이는 장소에서 륀베른 남작의 욕설이 울렸다.
“제기랄! 이 빌어먹을 비랑 안개 때문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잖아!”
그가 걷어찬 썩은 나무둥치가 퍼억 하고 부서지며 파편이 흩날린다.
그 모습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마법사가 그를 보며 말했다.
“아마도 저 마을에 머물고 있던 모험가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비가 내려 놈들이 부리던 수작질이 수포로 돌아갔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훨씬 더 많은 개미들을 불러들일 테니 놈들에게는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결말이 없을 겁니다.”
마법사는 마나 고갈로 하얗게 변색된 입술을 핥으며 희게 웃었다.
“남작님께서는 저놈들의 피와 살을 뜯어 먹고 이곳에 터를 잡을 개미들로 어떤 이득을 취하실 것인지. 그것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말인가? 이번에는 확실히 저것들을 청소할 수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마나를 퍼부어서 최대한 많은 개미들을 불러 모으는 중이니까요.”
마법사의 확언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작은 만족스레 웃었다.
안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한 차례 훔쳐낸 남작은 마법사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며 말했다.
“이번 일만 잘되면 내 전속 마법사 자리는 자네 거야. 지금은 내 비록 힘없는 남작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돈줄만 확실히 잡으면 자작, 주류 귀족 사회에 편입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그럼 자네도 자연스럽게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지.”
“흐흐, 이 자그너. 목숨을 다해 남작님께서 더 높이 날아오르실 수 있도록 보좌하겠습니다.”
44세라는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3성 마법에 도달한 재능 없는 마법사 자그너는 생각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기껏해야 3류, 아니 3류 축에도 못 낄 쓰레기 학파 주제에 날 내쳐?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죽을 때까지 지랄발광을 해도 4성 마법사에 머물다 뒈질 새끼들이랑 좋은 머리 써서 권력을 쥐게 될 나랑 누가 더 성공한 인생인지.’
자그너는 쫓겨나던 날 몰래 훔쳐온 유인의 법구의 반쪽을 바라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 조금 더 힘내서 마나를 퍼붓자.
마나 파장을 1초 더 유지할 때마다 더 많은 개미들이 저 마을로 향할-
“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의욕을 불사르던 자그너는 이상함을 느꼈다.
내리던 비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비가 하늘로 올라가지? 생각하는 순간.
퍽.
큰 충격이 느껴졌다.
‘저게 뭐-’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본인의 몸뚱이였다.
* * *
적들을 발견한 도진은 일단 몸을 숨겼다.
나무나 수풀이 없는 곳이었으나 숨을 바위는 차고 넘쳤다.
‘이쯤 다가오면 반격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이건 뭐 반격은커녕 아예 눈치를 못 채잖아?’
도진은 이렇게까지 접근을 했는데도 여전히 신호를 보내는 것에만 매달리는 마법사를 보며 어이없어 했다.
능선을 타 넘고, 험지를 주파하는 와중에도 언제 상대가 눈치를 채고 공격을 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껏 긴장했던 게 억울해지는 기분이었다.
‘뭐… 적이 만만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도진은 잠시 「암시」를 활성화해 적들을 살폈다.
조잡한 갑옷을 검게 칠한 병사들이 17명.
다른 놈들보다 고급스런 장비를 입은 지휘관이 1명.
아까 소리를 질렀던 살집 있는, 화려한 옷을 입은 두목이 1명.
그리고 반푼이 마법사 하나.
정면으로 붙는다면 쪽수 때문에라도 적지 않은 고생을 했을 조합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놈들과 정면에서 싸울 때의 이야기.
지금은 전혀 걱정할 게 없는 과녁들에 불과했다.
‘먼저 마법사랑 저 지휘관부터 보내버리고, 나머지는 천천히 처리하자.’
어떤 식으로 습격을 시작할지를 정한 도진은 은밀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최대한 마나가 밖으로 새지 않게 시전을 하느라 주문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4배, 5배 걸렸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마법사는 두목으로 보이는 놈에게 아부하기 바빴고, 제일 레벨이 높을 게 확실한 지휘관은 그런 마법사와 두목을 흘겨보며 바닥에 침이나 뱉고 있다.
《바람 칼날》
바람으로 벼린 날 3개가 완성과 동시에 비를 가르며 날았다.
폭우가 내는 소음이 바람 칼날을 완전한 무음의 칼로 만들어 줬다.
서걱.
그 결과 마법사는 자신의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죽었다.
마나 고갈로 마력장이 약해져 있던 탓에 완전히 무방비하게 죽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조금 달랐다.
“헛?”
꼴에 레벨 좀 높은 NPC라고,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바람 칼날을 뒤늦게나마 알아챈 것이다.
파핫.
목이 잘린 마법사와 달리 지휘관은 어깨에 상처를 입는 선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적이다! 적의 습격이다!”
“저, 적 말씀이십니까!”
“어어- 어디, 어디 방향 말입니까?”
“시발, 밥버러지 같은 새끼들! 당장 영주님부터 보호해!”
지휘관은 검을 뽑아 들며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윽박질렀다.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본다.
‘제기랄.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그는 고민했다.
어둠 속에 있을지 모를 적을 향해 달려들지.
아니면 이대로 영주를 데리고 후퇴를 해야 할지.
그때.
번쩍, 하는 푸른 섬광이 그를 덮쳤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
“커억-”
뒤늦게 고통에 찬 신음을 뱉으며 지휘관은 또 다른 이변을 보았다.
내리던 빗물이 얼어붙어 작은 얼음조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보인다 하여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전격에 적중당해 일시적으로 마비된 탓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저 어둠 속에 뛰어들어 습격한 놈을 최소한 물러나게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니, 하다못해 이 비라도 아니었으면 횃불에 불이라도 붙여 시야라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을.
생각하는 그였으나 전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어둠 속의 도진은 그에게 그런 기회 따위 주지 않았다.
《돌풍》
작은 회오리에 가까운 돌풍이 일어났다.
그 돌풍에, 빗물을 얼려 만든 작은 얼음조각들이 편승했다.
“끄아악!”
“이, 이게 뭐야!”
“엎드려! 바람에 뭐가 날아다닌다!”
“처, 천벌이야! 천벌이라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돌풍을 타고 날아다니는 작은 얼음조각은 병사들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병사들 또한 레벨 20이 넘는지라 죽은 자는 없었으나 신체 이곳저곳에 관통상을 입고 바닥을 구르는 신세는 면치 못했다.
“생각보다 튼튼한데? 수련만 열심히 했으면 제대로 된 기사가 될 수 있었겠어.”
어깨, 이마, 옆구리 등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무릎 꿇은 지휘관이 도진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오랫동안 빗속에 있느라 떨어진 체력 그리고 적지 않게 흐른 피로 그의 시야는 잔뜩 흐려져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도진의 모습은 뿌옇게 번진 검은 사신처럼 비쳤다.
“…마, 마을에서 몬스터를 막던 게 네 녀석이냐?”
지휘관의 물음에 도진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둘러보며 아직 전투가 가능한 자가 있는지를 살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저건 제외해야 하나. 지나치게 멀쩡한데?”
취소한다. 얕은 구덩이에 빠져 엉덩이만 내밀고 벌벌 떠는 돼지 하나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딱 봐도 저놈이 이번 일의 원흉 같은데 혼자만 멀쩡하다니.
도진은 악인의 악운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대충 정리는 끝난 것 같고.”
돌아서며, 도진은 얼음 화살 하나를 빚었다.
목표는 반쯤 죽어가는 지휘관이었다.
다 죽어가는 산송장이라도 전장에서 레벨이 가장 높은 적은 확실히 마무리해야 했다.
“…나의 이름은 쿠자-”
퍼억.
이름을 밝히고, 기사 흉내를 내려던 남자의 머리에 얼음 화살이 박혔다.
볼품없이 뒤로 넘어가는 시체를 보며 도진은 차게 웃었다.
“꼭 이런 새끼들은 죽을 때만 명예로운 척한다니까.”
그런 도진에게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말했다.
“제발 사,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옆에 쓰러져 있는 병사였다.
그런데 병사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었다.
기억을 더듬자 어렵지 않게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검문소에서 행패를 부리던 병사들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방금 죽인 놈도 병장이라고 불렸던 그놈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애원을 들어줄 가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있다.
마무리를 할 때였다.
이제 곧 유인의 법구에 이끌린 개미들이 들이닥칠 테니.
도진이 여전히 구덩이에 머리를 박고 벌벌 떨기만 하는 륀베른 남작에게 걸어갔다.
‘이건 뭐 꿩도 아니고. 대가리만 숨기면 저 비대한 몸뚱이가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몸은 돼지, 지능은 꿩. 뭐 그런 건가? 이거 참 골 때리는 조합이네.
실소한 도진은 염동력으로 륀베른 남작이 자빠져 있는 땅의 흙을 퍼서 남작의 얼굴에 퍼부었다.
“어푸푸, 어푸. 커어어.”
대가리만 생매장당할 위기에 화들짝 놀란 남작이 발광하며 몸을 굴렸다.
“자, 잠깐! 너, 너 이 자식!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짓을! 커어억!”
헛소리를 시작하려는 남작의 입으로 다시금 흙더미가 쑤셔 넣어졌다.
요란하게 구역질하며 흙을 토해 내려는 남작의 얼굴에 이번에는 돌이 날아와 꽂혔다.
이어 양쪽 허벅지를 날카로운 바람이 스치며 커다란 상처를 냈다.
“그, 그만! 그만해 이 개새끼야! 난 제국의 귀족이라고! 날 이렇게 만들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아? 교수형이야, 교수형! 귀족을 살해하면 무조건 목이 매달린단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그, 그래. 날 무사히 돌려보내 주면 돈을 주마. 원하는 만큼 줄게!”
화를 내다 애원을 하다, 횡설수설하는 남작에게 도진은 마을에서 가져온 유인의 법구를 던졌다.
턱, 하고 가슴팍에 부딪혔다가 데굴데굴 구르는 유인의 법구를 본 남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 젠장! 이게 왜 여기 있어? 이, 이건 괴물을 끌어들이는 물건이라 그랬는데!”
남작은 유인의 법구를 알아보더니 그나마 멀쩡한 팔로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들었다.
그 모습이 짠하여, 도진은 그 정도는 할 수 있게 해 주기로 했다.
‘병신. 그쪽은 황무지 방향인데.’
할 일을 마친 도진은 자리를 떠나기 전 마법사의 시체에서 회수한 발동 장치를 잠시 활성화했다.
혹시라도 잠시 신호가 끊어져 몰려오던 개미들이 길을 잃거나 흩어졌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서.
“어울리는 무덤에, 어울리는 최후인가.”
아직까지는 살아 있는 자들을 뒤로하고, 도진은 훌쩍 자리를 벗어났다.
* * *
륀베른은 필사적으로 기었다.
무슨 생각이나 계획이 있어서 기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무서워서,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기고 있을 뿐이다.
“우욱… 우욱……!”
입으로 진흙이 밀려 들어왔다.
숨이 차서 자연히 입이 벌어진 탓이다.
흙을 먹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입을 다물면 숨이 차서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륀베른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억지로 고개를 쳐들었다.
“…아.”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키익.
옅어지는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 커다란 개미였다.
콰직. 끄아아악.
불행히도, 개미들은 륀베른의 팔과 다리부터 뜯어 대기 시작했고.
그는 꽤나 오래 그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