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검붉은 키틴질 외피가 번들거린다.
무리 지어 움직이는 개미들은 어림잡아도 백은 훌쩍 넘어 보였다.
그나마 굴락 마을의 진입로가 북쪽의 협곡뿐이어서 다행이다.
사방에서 저런 놈들이 밀려들었다면 손도 못 써 보고 마을은 폐허가 됐을 터.
우뚝 솟은 봉우리 위에 마을이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진입로가 한 방향인 것만으로는 안 된다.
도진 혼자 밀려드는 개미들을 모조리 감당하기 위해서는 방향만이 아니라 한 번에 몰려오는 놈들의 숫자는 물론 그 속도까지 제한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마을 사람들이 악착같이 긁어모아 마을 앞, 협곡의 출구에 쌓아 놓은 ‘타는 것들’이었다.
“마, 마법사님, 저, 저기! 저기 개미 새끼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마을 밖에서 작업을 하던 마을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목책 안으로 피신했다.
「암시」로 개미들을 살피고 있던 도진은 놈들이 협곡을 벗어나기 직전, 그 앞에 쌓아 놓은 목재 더미에 불을 붙였다.
마나를 연료로 삼는 불이 순식간에 미리 뿌려 놓은 기름에 옮겨붙으며 목재들을 사정없이 집어삼키며 퍼져 나갔다.
그러자 협곡을 기어오르던 개미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협곡을 벗어나는 와중에 불길로 인해 길목이 좁아지자 가운데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벌레들이 일으키는 병목현상이었다.
‘안 통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본능대로 움직여 주는군.’
사실 마법이 아닌 저런 식으로 기름과 나무를 태우는 불로는 굴락 앤트를 막을 수 없었다.
저레벨 몬스터인 코볼트 정도는 죽일 수 있겠지만, 레벨 29 몬스터인 굴락 앤트는 어느 정도의 피해만 감수하면 돌파를 할 수 있기 때문.
그래서 도진은 아예 마을 사람들에게 협곡 입구 좌우에 땔감과 가구를 부순 목재를 쌓도록 지시했다.
생문을 열어 두고, 개미들이 그 생문으로만 들어오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어어! 놈들이 가운데로 통과하려고 합니다요, 마법사님!”
북쪽의 두 망루 중 한 곳을 차지한 마을 청년의 외침에 대한 답은 허공을 가르는 불덩이였다.
《화염구》
단일 공격과 관통에 특화된 ‘화살’과 달리 더 큰 화력과 폭발력을 품은 화염 구체.
이것 또한 도진이 새로이 배운 마법들 중 하나였다.
특히 이 마법은 불이 약점인 황무지의 개미들을 사냥하기 위해서 배운 2성 마법.
놈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많이 죽이기 위해 준비한 수단이었다.
퍼어엉.
양쪽에서 불타는 나뭇더미를 피해 비좁은 틈으로 들어오던 개미 3마리가 동시에 폭발에 휘말렸다.
페널티 대신 마법 공격력을 무식하게 올려주는 「수상한 의식용 검」을 착용한 데다 진리의 서까지 펼친 도진의 화염구는 폭발에 휘말린 개미들을 즉사시키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굴락 앤트는 워낙 많이 뭉쳐 있어서 무서운 놈들이지, 한 마리 한 마리가 강력한 놈들이 아니다.
비슷한 레벨일 때 사냥하러 오면 피똥을 싸지만, 마법 한 방에 여러 마리를 처리할 여건만 갖춰지면 그야말로 경험치를 쓸어 담으며 레벨업을 할 수 있는, 숨은 꿀 덩어리라는 소리다.
그런데 그 꿀 덩어리들이 제 발로 걸어서 몰려오네?
누가 꾸민 음모인지는 몰라도, 도진 입장에서는 경험치 이벤트나 다름없었다.
다만, 삐끗하면 목숨이 달아나는 살벌한 이벤트라는 게 문제지만.
‘누가 먼저 지쳐 쓰러지나 해 보자고.’
도진은 다시 화염구를 시전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뒤쪽으로 타점을 잡은 덕에 5마리의 개미들이 타 죽었다.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폭발 범위가 좁은 데도 잘도 죽는다.
이글거리는 불길과 터지는 화염 마법, 타 죽은 동족의 냄새가 놈들을 흥분시킨 것일까.
굴락 앤트들이 광분하여 턱을 딱딱거렸다.
그러면서 더욱 맹렬한 기세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도 최대한 불길에서 멀어지려는 본능은 남아 있어, 결국 놈들이 선택한 것은 도진이 뚫어 놓은 생문이었다.
지능은 거의 없고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하급 곤충 몬스터는 동족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도 그것이 생문(生門)을 닮은 사문(死門)임을 깨닫지 못했다.
도진은 그런 무지한 벌레들을 향해 끝없이 마법의 불을 퍼부었다.
“대, 대단해……!”
도진과 반대편의 망루에 선 남자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도진을 보다가, 도진이 쏘아낸 화염구를 좇았다.
화염구가 터지면 넋을 놓고 탄식을 뱉었다.
“지금 밖에 상황이 어때!”
그때 망루 아래에 모인 마을 남자들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아니 아직도 계속 탈 만한 걸 모으고 있었는지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망루의 남자가 말했다.
“우, 우리 산 거 같아.”
“웅얼대지 말고 똑바로 말해!”
“우리 산 거 같다고! 이 자식들아!”
거의 울먹이며 하는 말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옅은 기쁨이 번졌다.
저것 좀 보라고! 저렇게 손에서 막 불덩이를 만들어서 쏘는 분이 계시는데 저까짓 벌레들이 문제겠어!
공포를 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흥분해서인지, 그들은 화염구를 쏘는 도진을 보며 와아아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젠장, 돌겠네.’
정작 도진은 죽을 맛이었다.
도진은 벌써 2병째인 마나 포션을 입에 털어 넣었다.
원래 특수한 포션이 아닌 한 이런 포션은 마신 뒤에 휴식을 취해야 제대로 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도진은 쉴 시간이 없이 마법을 퍼부어야 하는 처지.
회복 효율이 절반은커녕 1/4도 안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어떤 새낀지 잡히면 진짜 죽여 버린다.”
마나 고갈이 조금이나마 가시자마자 도진은 고개를 휘휘 저어 어지러움을 쫓아내고는 마법을 썼다.
《기어 다니는 불》
이번에는 화염구가 아닌 3성 마법 「기어 다니는 불」이었다.
꿈틀대는 뱀처럼 생긴 불이 날아가 터지는 대신 바닥을 말 그대로 기어 다니며 개미들을 집어삼켰다.
키이익, 키이익.
개미들이 곤충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해 발광했다.
몇몇은 더욱 뜨거운 도진의 불을 피하려 덜 뜨거운 불타는 목재더미를 넘으려 들었다.
“안 되지!”
그걸 본 도진은 출력 높인 화염구를 급히 시전했다.
콰앙.
목재 더미가 터져 나가며 그곳을 넘어오던 개미들이 죽는다.
하지만 그 탓에 그쪽 부분이 뻥 뚫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게 다 동레벨과 비교 안 될 만큼 강한 화력 때문이다.
“태울 만한 거 얼마나 있습니까!”
급히 고개를 돌린 도진의 눈에 손을 흔드는 남자들이 보였다.
“여기 잔뜩 모아 놨습니다, 마법사님!”
이제 정말 모을 게 없는지, 그들이 모아 놓은 잡동사니 더미에는 지붕이나 문을 뜯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 조각은 물론이고, 실시간으로 부수고 있는 수레의 잔해들까지 보였다.
그야말로 살아남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엿보이는 처절함이었다.
저렇게 살고 싶어 하는데 살아남게 해 줘야지.
이를 악물며, 도진은 마나를 동원했다.
진리의 서가 황금빛을 내고, 그의 마법회로도 빛을 발했다.
그에 맞춰 마을 사람들이 모아 놓은 것들이 차례로 공중에 떠올랐다.
“오오……!”
그렇게 들어 올린 것들을, 도진은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염동」의 연속 시전으로 인해 기껏 회복한 마나가 물 새듯 줄어든다.
콰지직.
던져진 것들은 중간부터 힘을 잃고 흩어지다가, 불타는 잔해들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마치 포물선을 그리는 산탄 사격 같다.
그것을 도진은 몇 번이고 반복했고, 결국 그곳은 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크윽.”
과한 마나 동원의 여파로 코피를 쏟으며, 도진은 3병째 마나 포션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달짝지근해야 할 포션의 맛이 약간 텁텁하고 조금 씁쓸했다.
여기서 더 마시면 슬슬 포션 중독 증상이 시작될 거라는 신호였다.
‘이 속도로 마셔 대면… 10병 정도가 한계겠는데.’
그 이후로는 포션을 마셔도 회복이 거의 안 될 터.
도진은 전방을 바라봤다.
남은 적의 수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차곡차곡 쌓인 채 타들어 가는 죽은 개미들과, 동족의 시체를 넘으려는 놈들을 보고 있으려니 진절머리가 난다.
그래도 저만큼이나 죽였으니 절반 정도는 줄이지 않았을까?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다시금 마법을 쓰려 했다.
그런데 그때.
꽈르릉.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개미 쪽도, 도진 쪽도, 그렇다고 산 어딘가도 아니었다.
“설마…….”
도진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바라본, 불길한 소리가 난 곳은 바로 하늘이었다.
쏴아아-
“시발.”
쏟아지기 시작한 비를 보며 도진은 욕을 뱉었다.
순식간에 젖어드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바라본 정면은 끔찍했다.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했던 협곡 진입로에는 이제 타오르는 거라고는 개미들의 분노밖에 없었다.
까드득, 까드득.
턱관절이 마모되도록 과격하게 움직이며, 놈들은 불이 꺼지기 시작한 방해물 더미를 사납게 뜯어내고 부수었다.
이제 놈들을 막는 건 사라진 셈이었다.
“다들 도망가서 숨을 수 있는 곳에 숨어요!”
비가 내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불안하게 도진을 바라보던 자들의 얼굴에서 그나마 있던 희망이 사라졌다.
“으아아, 다 끝났어!”
“제, 젠장! 역시 도망치는 게 나았어! 이제 협곡을 저놈들이 막고 있으니, 여기 꼼짝없이 갇힌 꼴이 됐잖아!”
“이렇게 된 이상 죽더라도 싸워 봅시다. 애들은 살려야 할 거 아닙니까.”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마을 사람들.
그때 도진의 외침이 거센 빗줄기를 뚫고 다시 한번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빨리 나한테서 떨어지라고!”
그 기세에 다시금 사람들의 시선이 마법사에게 모였다.
“헉!”
그들의 눈에 펄럭이는 마법사의 로브와 그의 손에 응집된 황금빛 마력이 들어왔다.
마법사는 아직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다들 빨리 도망칩시다! 여기 있어 봐야 우린 마법사님한테 방해물밖에 안 됩니다. 차라리 각자 집으로 가서 굴속에라도 숨어요!”
그것을 본 하놀즈가 사람들을 떠밀었다.
공황에 빠진 몇몇에게는 아예 주먹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엉덩이도 걷어찼다.
“하놀즈 말이 맞네! 우리는 있어 봐야 저분께 도움은커녕 짐덩이밖에 안 돼. 차라리 마법사님이 싸우시기 편하게 숨어 있도록 하세.”
거기에 더해 침중한 촌장의 말까지 더해지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놀즈도 집을 향해 달렸다.
“흐흑……!”
무섭고, 절망적이고, 또 도진에게 미안하고.
여러 감정에 북받쳐 울며 달리는 하놀즈의 뒤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마법이었다.
* * *
마나를 아끼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는 지금 밀려들어 올 놈들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 놔야 한다.
그래야 나중의 섬멸전이 조금이나마 쉬워질 테니.
《대지의 창》
콰드드득.
3성 공격계 주문에 의해 땅이 솟아올랐다.
원래는 커다랗고 뾰족한 암석이 올라오는 마법이지만, 도진은 그것을 여러 개의 작은 스파이크로 변형했다.
그 결과 방해물을 뚫고 신나게 짓쳐들어 오던 개미들 5마리쯤이 한꺼번에 쓸려 나갔다.
“허억-”
가뜩이나 쓸 수 있는 마법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마법.
그것을 출력은 있는 대로 끌어올리고, 거기다 변형까지 했으니 마나 소모량이 엄청났다.
그 여파로 심장이 아플 지경.
4병째 포션이 도진의 입으로 들어갔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턱과 목으로 흘러내리는 액체가 빗물인지 포션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흐릿해졌던 시야가 마나가 조금 회복됨에 따라 다시금 돌아왔다.
“더럽게 빠르네.”
그리고 보인 광경에 도진은 쓰게 웃었다.
어느새 굴락 앤트들이 마을 바로 앞에 도달해 목책을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다닥따다닥.
딱딱한 턱과 발이 목책을 두드리는 소리는 참으로 기분이 더러워지는 소리였다.
“쉽게 기어 올라오게 할 수는 없지.”
말하며, 도진은 그나마 회복된 마나를 쥐어짰다.
《갈라지는 번개》
빗물에 젖은 벌레들은 훌륭한 전도체였다.
워낙 뒤섞여 뭉쳐 있던 탓에 꽤 많은 굴락 앤트들이 전격에 휘말려 죽었다.
혹시나 하고 3성 전격 마법도 하나 추가로 사서 배워 둔 게 다행이었다.
‘이러다 진짜 기절하겠군.’
조금 차오르던 마나는 3성 마법 한 번에 또 바닥을 드러내려 했다.
그래도 도진은 어지러움을 참아 가며 몸을 날려 망루 아래로 도망쳤다.
거센 빗줄기로 가득한 마을 안쪽으로.
‘어디 끝까지 한번 해 보자.’
상황이 변하면, 그 상황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어둠과 빗줄기는 몸을 숨기기 딱 좋은 장막이었다.
이제부터 조용한 사냥을 시작하면 될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