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20화 (21/271)

20

늦은 저녁 식사는 끝이 났고, 소피 가족은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노부부가 내어 준 방에서 도진은 로브를 벗었다.

“후우.”

겉옷을 벗자 창으로 들어온 차가운 산바람이 살갗을 서늘하게 매만졌다.

도진은 창가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봤다.

마을 주변을 두른 목책 위로 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달도 구름에 가려져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따로 없었다.

공기에 비 냄새가 묻어나는 것을 보니 비라도 내릴 모양이었다.

뭐, 당장은 실내에 있으니 비가 내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도진은 검은 도화지 같은 하늘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취했다.

그때, 도진의 감각에 무언가 거슬리는 것이 걸려들었다.

‘마나 파장?’

아직 마법사로서의 역량이 부족하여 정확히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어느 정도의 파장이 발생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인위적인 파장이 일었다.

이런 시간, 이런 장소에서 마나 파장은 이질적인 것이기에 도진은 마법회로를 활성화하여 마나 감응력을 끌어올렸다.

‘잠깐. 한 번이 아니잖아?’

방금 스치듯 느꼈던 마나 파장이 일정한 주기와 강도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도진은 마나 파장의 근원지를 특정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런데.

‘끊어졌어?’

마치 그런 일 따위 없었다는 듯 반응이 뚝 끊어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도진은 벗어 두었던 로브를 빠르게 걸치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동시에 땅에 닿기 직전 염동파를 이용해 낙하 충격을 줄였다.

쿵.

그럼에도 적지 않은 충격이 몸에 전해졌지만, 마법사치고 튼튼한 도진이기에 별 무리는 되지 않았다.

《암시(暗視)》

도진의 눈에 옅은 빛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어둠을 꿰뚫어 보는 마법으로, 던전 공략으로 얻은 골드를 퍼부어 배운 마법들 중 하나였다.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인 도진은 목책에 설치된 망루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렸다.

목책에 어설프게 박힌 통나무 계단을 오르자 시야가 탁 트이며 나무가 좀 있는 다른 방향과 달리 유독 삭막한 바위 능선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젠장…….”

저 바위 능선을 넘으면 나오는 곳이 바로 굴락 황무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기 꿈틀대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굴락 앤트.”

굴락 황무지의 무법자들이 낮은 능선을 넘어 이쪽을 향해 밀려들고 있는 것이다.

[퀘스트]

굴락 마을의 위기

등급: 운명

[오늘 밤 한 인간의 추악한 탐욕으로 인해 하나의 마을이 지워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최대한 많은 마을 사람들을 살리십시오.]

목표: 굴락 마을 사람들의 생존

보상: 경험치, 골드, ???

그 순간 도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운명 등급 퀘스트.

히든을 넘어, 사실상 LOST의 최고 등급 퀘스트였다.

운명 등급 퀘스트는 히든 퀘스트보다도 더 만나기 어려운 퀘스트다.

작든 크든 로스타니아라는 세계 자체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그 장소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퀘스트가 등장했다는 건.

‘저 벌레 새끼들이 이 마을을 쓸어버리는 게 그런 사건이라는 소리겠지.’

그런데 겨우 인구 수십 명쯤 되는 마을이 사라지는 게 운명 퀘스트가 등장할 만한 사건인가?

그럴 리 없지.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게 뭘까.

힌트는 퀘스트 내용에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마을 사람’을 살리라고 적혀 있다.

‘즉, 마을 사람 중에 죽으면 안 되는, 아니 살아남으면 이 세계에 이득이 될 사람이 있다.’

주어진 문제의 답을 도출했으나 그게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닥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을 추측이고 답이니까.

살려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살려야 하는 게 꼭 한 명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럼 다 살려 보는 수밖에.

생각을 마친 도진은 망루에 설치된 녹슨 종을 울렸다.

이렇게 아무도 감시하지 않고 방치할 거면 왜 이런 건 설치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땡땡땡땡.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에 쥐 죽은 듯 고요했던 마을이 소란스러워졌다.

“무, 무슨 소리야?”

“모리스, 이 자식! 내가 또 장난 삼아 오밤중에 종 울리면 거꾸로 매달아 버린다고 했냐, 안 했냐!”

어리둥절하여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는 사람들.

몇몇은 동네 꼬마의 장난이라 생각했는지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도진이 소리치기 전까지였다.

“지금 밖에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몬스터’라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눈을 퉁방울만 하게 떴다.

“모, 몬스터래!”

누군가가 소리쳤고, 몇 명은 목책으로 달려왔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우아악!”

“아오, 이 병신. 내가 살 좀 빼라고 했지? 저리 비켜!”

도진이 서 있는 곳과 다른 방향에 설치된 망루에 오르던 뚱뚱한 남자가 고꾸라지고, 대신 바짝 마른 남자가 날래게 망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멀리 시선을 던지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된다.

어둡지만, 산에 익숙한 마을 청년 한스는 어렵게나마 어둠을 뚫고 보았다.

꿈틀거려서는 안 되는 능선이 검은 실루엣으로 꿈틀거리는 것을.

“몬스터다! 황무지 쪽 능선에 몬스터들이 넘어오고 있다! 제기랄! 한둘이 아냐!”

한스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 또한 새하얗게 질렸다.

그래도 험한 세계의 사람들답게 겁먹고 아무것도 못하지는 않았다.

“제니! 소피 데리고 지하로 들어가 있어! 먹을 거 챙겨서 들어가는 거 잊지 말고! 완전히 조용해지기 전까지는 절대 나오지 마!”

“하놀즈, 당신은! 당신도 같이 숨어!”

“멍청한 소리 하지 마! 그럼 마을은 누가 지키고?”

“…알았어. 하지만 절대 죽으면 안 돼! 아니, 다치지도 마. 다치면 죽을 줄 알아.”

각 가정의 가장들은 아내와 자식들을 집 지하에 파 놓은 굴에 숨게 하고 자신들은 조악한 무기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한스, 한둘이 아니라는 건 몇 마리나 된다는 말인가? 지금까지는 그래도 목책 때문에라도 짐승이나 몬스터한테 피해를 입는 경우가 거의 없었잖나.”

마을 촌장의 물음에 망루에서 내려온 한스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너무 어두워서 능선에 꿈틀거리는 정도만 보이는데… 아시잖습니까. 저쪽 바위 능선이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 이렇게 멀리서도 능선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이는 걸 보면 적어도 수십 마리에서 많게는 수백 마리도 넘을 거 같습니다.”

한스의 말에 옹기종기 모인 마을 남자들 모두가 겁먹은 얼굴을 했다.

잠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마을을 버리고 도망을 치자, 그러면 겨울에 뭐 먹고 살 거냐, 그래도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 어차피 지금 시간에 목책 밖으로 나가 봐야 어차피 죽을 확률이 높다 같은 말들이 오갈 때였다.

“지킬 수 있습니다.”

망루에서 상황을 살피던 도진이 내려온 것은.

낯선 목소리에 마을 남자들의 시선이 도진을 향했다.

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설마 처음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외친 게 당신이오?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도대체 누구-”

먼저 촌장은 경계를 하며 정체를 물으려 했으나.

“마, 마법사님!”

하놀즈와 그의 친구들은 촌장의 말을 끊으며 도진을 반겼다.

뜬금없는 몬스터의 등장에 놀라 잊고 있다가 이제야 마을에 마법사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도진이 마법을 쓰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그들 눈에 도진은 구세주처럼 비추어졌다.

“마, 마법사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마법사라는 말에 촌장이 놀라 물었다.

“저분은 검문소에서 곤혹을 치를 뻔한 걸 구해 주신 착한 마법사님이십니다.”

“맞아요, 맞아! 아까 땔감을 내리는 일도 저분이 마법을 써서 단숨에 해결해 주셨어요!”

마을 사람들을 헤치고 급히 다가온 하놀즈는 도진에게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마, 마법사님, 이런 부탁을 드리는 거 정말 염치없는 짓인 줄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게 마법사님뿐이십니다. 제발 저희 좀 도와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시면, 마을 사람들이랑 힘을 모아서 어떻게든 사례를 하겠습니다.”

제 아내랑 딸 좀 살려 주십시오. 거의 울며 말하는 하놀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억지로 억눌렀던 공포가 북받친 듯했다.

도진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진정해요, 하놀즈 씨. 벌써부터 힘 빼면 마을 지킬 힘이 남아 있겠어요?”

하놀즈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곰 같은 사내의 눈물이라니. 평소라면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겠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눈물이라고 생각하면 못 볼 만한 것도 아니었다.

“질문은 개미 밥이 되고 싶은 사람한테만 받도록 하죠.”

도진의 말에, 무언가 묻거나 말하려던 자들이 움찔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망루에서 계속 확인한 결과 더 이상 능선을 넘는 개미들은 없었지만, 넘어온 놈들만 해도 숫자가 상당할 거예요.”

여기저기서 겁에 질린 욕설이 들렸다.

도진은 그런 반응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제 말만 잘 따른다면.”

“여,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꽥 소리치듯 답하는 하놀즈. 그리고 도진의 마법을 목격한 자들도 투지를 불살랐다.

“저도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다! 저는 몰라도 마누라랑 자식새끼를 개미 밥으로 만들 수 없어요!”

하지만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러분을 구하려는 겁니다. 개미 밥으로 던져 주려는 게 아니라. 개미들이 목책을 넘어 마을 안으로 들이닥치면 모를까, 그런 조잡한 무기를 쥐고 싸우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

마을 남자들은 자신들이 쥔, 장대에 쇠붙이를 묶어 놨을 뿐인 조잡한 창을 바라봤다.

도진의 말대로 그들의 무기는 황무지의 무법자라 불리는 놈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 못해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거라도 쥐고 싸우는 것 말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퉁방울만 한 눈들이 도진을 향했다.

그들에게 도진이 말했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절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마, 말씀만 하십시오!”

이번에도 가장 먼저, 척수 반사에 가깝게 대답한 것은 하놀즈였다.

“능선까지의 거리와 개미들의 이동속도를 고려하면 놈들이 도달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좀 있습니다. 그동안 불에 잘 타는 것들을 전부 마을 앞으로 옮겨 주세요.”

“탈 만한 것 말씀이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하놀즈는 다른 마을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뭣들 하고 있어요? 마법사님께서 불에 잘 타는 걸 모아 오라시잖습니까!”

도진의 마법을 직접 보지 못한 자들이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하놀즈가 꽥 소리를 질렀다.

“아, 촌장님! 제가 저분이 마법을 부리는 걸 직접 봤다니까요! 그러니까 좀 믿고 움직이자고요.”

그러더니 하놀즈는 한스를 향해 말했다.

“한스, 네가 애들 좀 데리고 땔감 좀 다 꺼내 와라. 그리고 너희들은 날 따라오고. 집집마다 탈 만한 걸 찾아야 하니까. 그리고 촌장님. 회관 열쇠를 가진 게 촌장님이니까 회관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도진의 마법을 직접 목격했던 이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을 독촉하는 건 덤이었다.

고지대의 차가운 밤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사 온 땔감은 물론이고, 불에 탈 것처럼 보이는 건 다 그러모아 마을 앞으로 옮겼다.

“이번 겨울에는 아주 얼어 죽겠구만.”

“버텨야지.”

“버틸 수 있을까?”

“몰라. 그래도… 지금 살아남아야 버텨 보기라도 하지.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이번 겨울에는 다 같이 회관에서 살아 봐야지 뭐.”

마을 남자들이 쓴맛 나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무 탁자를 부수고 있을 때였다.

“목책 안으로! 목책 안으로 도망쳐!”

개미들이 목전에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