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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9화 (2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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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재잘대던 소피는 피곤이 몰려왔는지 꾸벅꾸벅 졸다 잠들었다.

15살치고는 약간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는 모습이 마치 콩벌레 같았다.

짹짹대는 새 같던 소녀가 잠드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들리는 거라고는 색색대는 소피의 숨소리, 다각대는 늙은 말의 발굽 소리, 늦가을 막바지를 장식하는 풀벌레 소리 같은 백색 소음뿐.

도진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상을 주홍으로 물들이던 해가 저물고, 그 대신 떠오른 밝은 달이 내비치는 빛에 사위가 어두운 은청색으로 덧씌워진 모습.

고즈넉한 풍경은 과하게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보다 가상현실을 사랑하고, 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여겨질 만큼.

“피곤하시면 잠시 눈을 붙이셔도 됩니다. 이 녀석이 워낙 늙어서 걸음이 느려 꽤나 걸릴 것 같습니다.”

하놀즈의 말대로 마차의 속도는 사람이 걷는 것보다도 느렸다.

늙은 말이 땔감 가득한 짐마차를 끄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적당히 덜컹대는 마차에 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건 도진이 좋아하는 일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덮어 줄 만한 거 없나요? 이렇게 자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 같은데.”

“덮을 만한 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피 그 녀석, 어릴 때는 몸이 약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이제는 한겨울에도 맨발로 돌아다닙니다. 제발 건강만 해졌으면 하고 빌었더니 아주 과하게 건강해져서는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닌다니까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딸에 대한 하놀즈의 사랑이 묻어났다.

찡긋찡긋 움직이는 작은 코를 본 도진은 자신의 로브 자락을 펼쳐 소피를 감싸줬다.

“마을 꼬마들 코피를 좀 자주 터뜨리고 다녀서 걱정입니다만. 열병에 시달리는 걸 보고 있을 때랑 비교하면 그깟 코피가 문제냐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놀즈의 기분 좋은 웃음 뒤로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서로 불편함 없는 고요였다.

하놀즈가 느끼던 두려움이 많이 가셨기 때문이었다.

워낙 외진 마을로 향하는 길로 빠진 터라 방해도 없었다.

산적 같은, 으레 등장하는 기타 방해물들도 어느 정도 유동 인구가 있는 길목에나 등장하는 법이다.

일주일에 사람 한두 명 지나가면 다행인 이런 곳에서 영업을 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도진을 태운 마차는 예상한 시간에 산 초입에 들어섰고, 다시 한참을 이동한 끝에 산 깊숙한 곳에 있는 굴락 마을에 도착했다.

“하놀즈, 소피까지 데리고 가서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떻게 해! 막심 씨는 벌써 아까 도착했는데 당신은 안 와서 걱정했잖아!”

마을 입구로 마차가 들어서자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하놀즈의 비명이 들린다.

“아악, 아파! 아프다고, 여보!”

“덩치는 산만 해서 엄살은! 소피는 어디 있어?”

“짐칸에서 자고 있어! 으윽, 여보 뱃살 뜯어져, 뜯어졌어!”

엄마의 목소리에 소피가 눈을 떴다.

몽롱한 눈으로 ‘엄마…….’ 하고 눈을 비비는 소피.

어두운 곳에서 더듬거리며 내려가려 하는 걸 도진이 붙잡아 내려줬다.

소피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비틀대면서 엄마 목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소피!”

“엄마…….”

졸음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딸을 발견한 소피의 엄마 제니는 냉큼 달려와 소피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혹여나 다치거나 상한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또래보다 작은 체구 탓에 정말 쏙 안겨 있는 모양새였다.

“으이구, 그러길래 엄마가 밖에 나가 봐야 힘만 든다고 집에 있으랬지?”

“아냐, 밖에 나가서 재밌었어. 마법사 오빠도 보고.”

“마법사?”

“마, 맞다. 여보, 오는 길에 마법사 한 분이-”

남편의 말을 무시하고 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제니는 마차 뒤편에서 걸어 나오는 검은 로브 차림의 도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손님을 데려왔으면 그것부터 얘기해야 할 거 아냐!”

급히 다가온 자신의 남편을 응징했다.

“끄아아악! 지금, 지금 얘기하고 있었잖아!”

“더 빨리! 보자마자 했어야지!”

인사를 하려던 도진은 끼어들 틈이 없는 부부의 모습에 잠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검은 로브 차림을 한 외지인의 모습에 놀랄 법도 한데 저러는 걸 보니, 소피가 누굴 닮았는지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엄마, 엄마, 아까 검문소 통과할 때 마법사 오빠가 도와줬어!”

부모들의 소란에 잠이 완전히 깬 소피까지 재잘대기 시작하자 소란스러움이 더해졌다.

“안녕하세요. 저희 남편이랑 딸을 도와주셨다고요? 정말 감사해요.”

소피를 안고 다가온 제니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가까이서 보니 이목구비가 소피와 똑 닮은 것이 누가 봐도 모녀지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약간 나이 차이가 나는 자매처럼도 보이고.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아닌데. 검문소 병사들이 막 마법사 오빠 보자마자 겁먹고 우리 그냥 보내줬어. 막 빨리 가라고 손까지 이렇게 이렇게 했다니까?”

마치 자신의 무용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나서 떠드는 소피.

그런 소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니가 말했다.

“안 그래도 먼저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검문소에서 고생을 했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소란에 깬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놀즈가 돌아온 모양인데?”

“비명 소리 들으면 몰라? 또 제니한테 흠씬 맞고 있겠지.”

“꽤 늦은 걸 보니 하놀즈도 검문소에서 고생 좀 한 모양이야. 다른 사람들도 적잖이 고생했다잖아.”

“아마 늦은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 말 때문일걸? 그 자식네 말은 늙어서 더럽게 느리잖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하나둘 나타난 마을 남자들은 횃불에 비친 도진을 보고는 흠칫 놀란다.

새까만 로브를 입은 외지인이 봤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제니는 그런 겁먹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을 남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여간 누가 하놀즈 친구들 아니랄까 봐 덩치는 산만 한 것들이 겁만 많아, 겁만! 검문소에서 우리 소피 도와준 분이니까 손님이야, 손님! 하놀즈, 빨리 마차 끌고 가서 저 덩치값 못하는 당신 친구들이랑 땔감이나 창고에 넣고 와.”

철썩 하놀즈의 등짝을 시원하게 후려친 제니는 도진을 보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마법사님은 절 따라오세요. 저희 마을에도 여관은 있거든요. 평소에는 약초꾼으로 먹고살다가 가~ 끔 오는 손님들한테 방이랑 음식 내 주는 정도이긴 해도.”

“안 그래도 어디에 묵어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엄마, 그냥 마법사 오빠 오늘은 우리 집에서 같이 자면 안 돼?”

“우리 집은 좁아서 마법사님이 주무실 자리가 없잖아.”

“히잉.”

마을이 워낙 작다 보니 제니를 따라 조금 걷자 하놀즈가 다시 보였다.

공용 창고로 쓰는 건물 앞에 마차를 대고 땔감을 옮기려는 것 같았다.

이에 도진은 염동력을 발휘해 땔감을 들어 올렸다.

“어어?”

“으아악!”

“귀신이다!”

마을 남자들은 땔감이 공중에 둥둥 뜨는 모습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개중 몇몇은 도진을 바라보며 ‘역시 마법사였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와아!”

반면 제니와 소피 모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탄했다.

덩치는 저쪽이 커도 간은 두 모녀가 훨씬 컸다.

“하놀즈 씨 그리고 다른 분들. 옆으로 좀 비켜 주시겠어요?”

하놀즈와 마을 남자들은 뭔가에 홀린 듯 도진과 공중을 나는 땔감을 번갈아 보며 옆으로 비켜섰다.

곰 같은 덩치의 사내들이 일렬로 서서 땔감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는 모습은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레벨이 많이 올라서 그런지 「염동」 출력이 많이 올랐네.’

예전에는 들어 올릴 수 없었던 무게를 들어 올려 보며 도진은 자신의 성장을 체감했다.

염동력에 의해 옮겨진 땔감들은 보기 좋게 창고 안에 자리 잡았다.

땀을 흘릴 각오를 하고 나왔던 마을 남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빈 마차를 바라봤다.

“와아- 나 진짜 이런 거 처음 봐!”

난생처음 보는 마법에 흥분한 소피는 격렬하게 박수를 쳐 대며 좋아했다.

“대, 대단하네요……. 물건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말로만 들었는데.”

제니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평생 마법이란 걸 볼 일이 없는 게 대부분인 이런 작은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이적조차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겨우 정신을 차린 마을 남자들은 도진에게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겁먹은 시선이 절반, 호기심 어린 눈이 절반이다.

도진은 그들에게 마주 고개를 숙여 주고, 다시 걸음을 옮겨 여관으로 향했다.

“허허, 거의 6개월 만에 손님이 이런 귀한 분이 될 줄은 몰랐구만.”

여관 주인은 나이 지긋한 노부부였다.

그들은 도진을 위해 찐 감자를 내주었다.

“지금이 먹을 게 귀해지는 시기여서 이런 것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로라 할머니, 나도 배고파.”

“소피!”

찐 감자로 손을 가져가는 소피였으나 제니에 의해 빠르게 제압되었다.

“어이구, 소피 거는 따로 내줄 테니 그만해라.”

“괜찮아요, 할머니. 집에 데려가서 먹일게요.”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우리 집은 늙은이 둘뿐이라 얼마 먹지도 않는걸.”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으니 도진은 기분 좋아졌다.

없이 살아도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할머니, 감자는 더 가져오지 않으셔도 돼요.”

도진은 주방으로 가려는 할머니를 만류하며 인벤토리에서 식량을 꺼냈다.

물론 쓸데없는 소란을 피하기 위해 로브 안쪽에서 꺼내는 시늉을 했다.

유저 입장에서는 가장 값싼, 그야말로 배를 채우는 용도뿐인 싸구려 식량인 육포와 빵.

그러나 이들에게는 ‘고기’ 자체가 보기 힘든 식량일 터였다.

“헉.”

그 증거로 육포와 빵을 본 소피의 눈이 커졌다.

찐 감자에는 바로 손을 가져가더니, 고기가 보이니 오히려 조심스러워한다.

그만큼 귀한 것이라 여기는 탓일 것이다.

“여행을 할 때 식량을 넉넉히 챙기는 버릇이 있어서요. 함께 먹어도 될 만큼 많이 있으니 같이 드시죠. 하놀즈 씨도 불러서요. 아, 그 전에 주방을 좀 빌려도 될까요?”

“주, 주방은 왜……?”

“이왕이면 좀 더 맛있게 먹으려고요. 소피, 마법 구경할래?”

고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소피의 고개가 팍 하고 돌아왔다.

격하게 끄덕여지는 고개를 보니 목 건강이 염려될 지경이었다.

“따라와.”

도진은 그런 소피를 데리고 주방으로 가 마법으로 불을 피웠다.

마법의 불은 화력 조절이 자유자재이기에 요리에 활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 봐야 육포와 감자, 우유, 버터, 소금, 후추 정도만 들어가는 스튜였지만.

그래도 전생에 사냥터에 죽치고 사는 동안 요리를 해 먹던 짬이 있는지라 냄새와 맛 모두 훌륭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스튜를 앞에 두고 둘러앉게 된 노부부와 하놀즈, 제니 부부 그리고 소피와 도진.

첫술을 뜬 건 가장 어린 소피였다.

큰 육포 조각과 감자를 한꺼번에 입에 집어넣고 뜨거움에 쩔쩔매던 소피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아 이언 거 어음 머거 바.(나 이런 거 처음 먹어 봐.)”

이어 다른 사람들도 한마디씩 도진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스튜를 입에 넣었다.

넉넉하게 끓인 스튜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 * *

늦은 밤의 산은 차고 위험하다.

그런 곳에 굳이 들어가고 싶은 이는 없으리라.

그럼에도 굴락 산에는 어둡게 차려입은 스무 명 남짓한 인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더 접근해야 하는 거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황무지인데. 이러다가 우리까지 휘말리는 거 아니오?”

검게 칠한 갑옷을 입은 남자가 로브 차림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로브 차림을 한 음침한 인상의 마법사가 답했다.

“걱정 마시오. 우리가 있는 곳은 개미들이 이동할 길목과는 거리가 있으니. 개미들이 신호를 따라 몰려들면 저쪽 능선을 넘어 그 앞에 있는 협곡을 따라 우리가 치워야 할 마을로 몰려갈 거요.”

“그럼 다행이지만… 어쨌든 계획에 차질은 없어야 하오.”

“그것도 걱정 마시오. 내가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지만, 이렇게 잘 만들어진 마도구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오. 당신 부하들이 제대로 심어 놓기만 했다면 계획에 차질은 없을 것이오.”

그들의 대화가 지나가고, 뒤편에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이렇게 하면 여기까지 몬스터의 영역이 될 거라는 말은 사실이겠지?”

그의 물음에 마법사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지요, 륀베른 남작님. 몬스터라고는 해도 황무지에 사는 것들은 개미입니다. 한번 이곳에 들어와서 제대로 된 먹이 활동을 해 보면 놈들은 이곳까지 영역을 확장할 겁니다.”

“흐흐, 그렇게만 되면 내 영지 안에도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이 생기겠군. 드디어 우리 영지도 황실의 지원도 받고, 모험가 길드한테 세금을 뜯어낼 수 있게 되는 거야. 그거에 비하면 약초꾼 놈들 목숨 몇 개쯤이야 별거 아니지.”

륀베른 남작은 천박함 가득한 웃음을 흘리며 굴락 마을이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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