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섯 개의 마법진이 전부 파괴되자 바닥을 검게 물들이고 있던 마나의 흐름이 멎었다.
더 이상 흐를 장소가 사라지니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그러나 흐르지만 않을 뿐 검은 마나는 넘실거리며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잠시만 보아도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급속하게.
그것을 본 시살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나가 옅어지질 않아요. 아니, 오히려 더 농도가 진해지는데… 아무래도 이 검은 마나가 생성되는 곳이 따로 있는 거 같아요.”
시살라는 현상을 보자마자 그것의 의미를 바로 짚어 냈다.
엘토마기아의 황색위 마법사다운 통찰력이었다.
“우리가 파괴한 건 생성된 마나를 순환시키고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를 파괴할 때마다 다른 방향의 마법진을 향해 마나의 흐름이 몰린 건 그 때문이고요.”
“그러면… 큰일이잖아요!”
잠시 생각하던 시살라가 하얗게 질려 꽥 소리를 질렀다.
“순환되고 있을 때도 이 모양 이 꼴이었는데, 그 순환을 깨 버리면 계속 생성된 힘이 고일 거고, 그런 식으로 힘이 쌓인 불완전한 마법진은……!”
“압니다. 만들어지기만 하다 보면 고이고, 그렇게 고이다 압력이 한계에 도달하면 터질 수도 있다는 것쯤.”
시살라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무, 무슨 생각이에요! 아니, 물론 생각이야 있겠지만! 이건 정말 너무 위험해요.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무모한 짓이라고요. 이 정도로 커다란 마법진의 순환이 엉킨 것도 아니고 완전히 끊어졌으면, 지금 우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안에 있는 셈이라고요!”
그녀의 말이 맞다.
다섯 개의 마법진을 다 파괴한 순간 이 던전은 그야말로 시한폭탄으로 변한다.
제한 시간을 넘기면 순환되지 못하고 고인 마나가 폭주할 거고, 그러면 터져 죽지는 않아도 부정한 기운에 오염되어 죽는다.
얼핏 들으면 불합리함도 이런 불합리함이 없는 것 같은 기믹.
하지만 사실 파훼법 자체는 전혀 어렵지 않고 간단했다.
정면 돌파를 하려면 중심부로 가서 시간 안에 던전 공략을 마치면 되고, 그게 안 되겠다 싶으면 일단 도망쳤다가 다시 와도 된다.
관건은 ‘길’과 ‘시간’.
중심부로 가는 길을 시간 안에 찾을 수 있는가.
나가는 길을 외워서 시간 안에 도망칠 수 있는가.
‘도망치는 쪽이 안전한 방법이지만… 그렇게 하면 다누미네 계곡 전체가 오염돼. 그러면 점수가 꽤 많이 깎일 거고.’
같은 히든 던전이라고 해도 공략 과정이 다르면 받는 보상 또한 달라진다.
목표한 레벨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안전한 방법을 골랐겠지만, 30레벨을 넘긴 이상 최선의 결과를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이런 위험한 일까지 거들게 할 수는 없지.’
도진은 시살라를 보며 말했다.
“시살라, 밖으로 나가는 길. 혹시 기억해요?”
“당연하죠! 마법 재능은 부족해도 기억력 하나는 좋거든요. 따라오세요!”
발을 동동 구르던 시살라는 도진의 손을 잡아끌고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인이 직접 말한 대로 정말 기억력이 좋아서, 헤매지도 않고 복잡한 길을 되짚어 출구를 찾아냈다.
“저기! 저기 계단이요!”
계단을 발견한 시살라는 밝은 얼굴로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도진의 손을 꽉 쥔 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즈음.
툭.
도진 쪽에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녀를 던전 밖으로 떠밀었다.
“어?”
도진과 달리 평균적인 마법사의 균형 감각을 지닌 시살라는 그대로 발을 헛디디며 넘어졌다.
“미안해요. 이대로 폭주하는 마법진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요.”
“그게 무슨 소-”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보는 시살라의 눈에 분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한발 빠르게 도진의 손이 움직였다.
그런 그의 손엔 던전의 열쇠인 쇠붙이가 들려 있었다.
쿠르릉.
순식간에 닫히는 던전 입구.
[시살라 오멘의 호감도가 3포인트 하락하여 27이 되었습니다.]
[시살라 오멘의 호감도가 3포인트 하락하여 24가 되었습니다.]
[시살라 오멘의 호감도가 1포인트 하락하여 23이 되었습니다.]
‘…….’
도진은 살벌한 메시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완벽히 차단되어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도 닫힌 벽 너머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쿠구웅-
아니, 실제로 들렸다.
무슨 마법이라도 날린 건지 약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래 봐야 4성 마법사의 마법으로는 절대 뚫을 수 없겠지만.
‘호감도는 아쉽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까지는 시살라가 죽을 위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니다.
유저와 달리 NPC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은 NPC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도진은 잘 알고 있었다.
썩 유쾌하지 못한 경험들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그럼… 빨리 해결해 볼까.”
씁쓸한 기억을 털어 낸 도진은 발길을 돌려 공방의 중심부로 향했다.
시간은 부족하지 않았다.
제한 시간이 꽤 넉넉하게 주어지기도 하고, 워낙 빠르게 움직인 덕분이기도 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돼 있었구나.”
전생에 왔을 때는 뻥 뚫려 있던 곳이, 지금은 튼튼한 석문에 가려져 있었다.
도진은 문을 열기에 앞서 성수를 꺼내 마셨다.
던전에 머무는 동안 주기적으로 마시긴 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모든 도핑을 리필해야 할 타이밍이다.
“그럼 가 볼까.”
어차피 해야 할 일.
시간 끌지 않고 바로 부딪히려던 도진이 멈칫했다.
[시살라 오멘의 호감도가 10포인트 상승하여 33이 되었습니다.]
하락했던 시살라의 호감도가 원래보다 높은 수치까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서였다.
화가 잔뜩 났을 텐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호감도가 오른 건지.
가끔 도진은 호감도 시스템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어쨌든 내려갔던 게 올랐으니 호재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는 LOST NPC의 마음과 엮인 시스템을 완전히 파악하려 들면 골치만 아플 뿐이다.
‘일단 눈앞에 일에 집중하자.’
도진은 다시 한번 던전 열쇠를 사용했다.
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커다란 석문.
완전히 열리지도 않았는데 틈새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흘러나왔다.
중앙 마법진에서 생성되어 고여 있던 마나다.
‘역시 레벨이 조금만 낮았어도 도전해 보지도 못하고 죽었겠어.’
지능은 마법 저항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능력치.
레벨이 올라 지능을 높여 두지 않았으면 저항하지 못했을 정도의 오염도와 농도다.
‘비주얼 한번 엄청나네.’
문이 활짝 열리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엄청났다.
파괴한 다른 마법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별을 새겨 넣은 마법진의 군데군데에는 사람의 심장이 놓여 있었다.
특수 처리되어 부패를 막은 심장은 마치 플라스틱 모형처럼 보였지만, 엄연히 진짜 사람을 죽여 뽑은 사람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그 심장 아래에 깔린 돌팔이 마법사의 마법진은 지금도 계속해서 희생자들의 원념을 증폭하여, 순수한 마나를 흡수해 원념에 오염된 마나로 치환하여 뱉어 내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빡셀 거 같긴 한데. 그래도 해 봐야지 뭐.”
회귀한 이래 처음으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더 짜릿하다.
위기를 인식한 뇌에서 온갖 호르몬이 뿜어지는 기분.
익숙한 동시에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고양감 속에서 도진은 황금의 마나를 발했다.
《진리의 서》
진리를 기록하는 책이 된 스스로를 펼치고.
우웅.
염동력을 발휘했다.
대상은, 인벤토리에서 쏟아 낸 성수 담긴 병들.
도진은 그것들을 한데 뭉쳐 바닥을 후려쳤다.
단번에 깨져 대량의 물이 주변을 적셨다.
중앙 마법진이 접근한 타자의 마나와 성수의 성스러운 기운에 반응하여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래, 그야말로 생물처럼 꿈틀댄다.
검은 기운이 짙게 뭉치며 원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살려 줘!
원념 짙은 소리.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울렁거리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려 한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히든 던전 보스가 그대로 태어날 거고, 그러면 시간 안에 마법진의 폭주를 막는 건 실패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도진은 눈을 부릅뜨고 날뛰려는 마법회로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두기 위해.
《얼음 화살》
도진이 지금까지 성수를 아낀 것 그리고 그렇게나 아껴왔던 성수를 주변에 전부 뿌린 것은 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평범한 1성 공격계 빙결 마법을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
쩡.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성스러운 물이 올올이 떠오르며 화살로 변했다.
쐐액.
아낄 필요 없이, 도진은 바로 얼음 화살을 쏘았다.
평범한 얼음 화살이었다면 뚫지 못했을 원념에 오염된 마력 장벽.
하나 성스러운 물을 재료로 만든 화살은 달랐다.
퍼엉.
부서지긴 했어도, 장벽을 손상시키고 파편이나마 마법진 안쪽에 떨어졌다.
충분하다.
화살을 만들 재료는 아주 넉넉히 가져왔으니.
쐐액. 쐐액. 쐐액.
도진은 마법회로를 채찍질하며 연속으로 얼음 화살을 만들어 쏘았다.
-죽어! 너도 죽어!
태어나는 걸 방해받은 ‘원념의 아이’가 울부짖는다.
그러나 도진은 멈추지 않았다.
연속해서 세 개, 다섯 개, 여섯 개의 얼음 화살을 쏘아 냈다.
퍼퍼퍼퍼펑.
후우웅.
반쯤 완성된 보스의 팔이 움직여 도진을 노렸다.
길쭉하게 늘어나 채찍처럼 쇄도하는 새까만 손아귀.
도진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목표를 바꾼 얼음 화살이 놈의 팔을 노렸다.
퍼퍼펑.
3연사가 한 점에 꽂힌다.
놈의 검은 팔이 휘어졌고, 도진은 고개를 젖혀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옅어진 중심부의 장벽을 드디어 도진의 후속타가 뚫어 냈다.
그러나 그 시점에 도진의 마나 또한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생각보다 보스 몬스터가 너무 질겼던 탓이었다.
‘앞으로 쏠 수 있는 건 많아 봐야 3발이 한계다.’
1초라도 늦어지면 뚫린 방어가 복구될 거고, 그러면 공략은 실패한다.
3개의 화살로 지금 이 순간 결판을 내야 했다.
가능할까? 가능하다.
시야에 담긴 정보를 토대로, 뇌가 아닌 경험이 결과를 도출했다.
쐐액.
도진의 화살들이 본능에 따라 날아갔다.
노린 곳은 보스 몬스터가 아닌 마법진 그 자체.
성수로 만들어진 얼음 화살 3개가 동시에 마법진의 급소, 마나의 순환을 담당하는 획을 끊고 점을 차단했다.
마나 쐐기를 얼음 화살로 대체한 마법 파훼였다.
그 결과.
-끄에에에엑!
원념의 아이가 목 졸린 아이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면서 팽창하고, 수축하고, 또 팽창하고를 반복했다.
그에 따라 공방 중심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오염된 마나도 함께 날뛰었다.
“으윽!”
그 성난 파도 같은 힘에 노출된 도진도 무사하진 못했다.
‘너무 안일했나……!’
마법진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저항이 심할 거라 예측하지 못한 탓이었다.
마나라도 남았으면 어떻게 버텨 보겠는데…….
[「마나 적성」 특성이 생성되었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순간 떠오른 한 줄의 메시지.
전직한 직후 만리서고의 순수한 마나에 연단되었던 도진의 마법회로가 강렬한 자극을 트리거로 한층 더 튼튼하게 변하면서 특성이 개화한 것이었다.
마법회로가 확장하고 튼튼해지면서 마법 저항력도 오르고, 조금이지만 여분의 마나도 생겨났다.
도진은 그 마나를 쥐어짜 바닥에 고여 있는 성수를 끌어올려 분사하고, 그곳에 「빛」을 덧씌웠다.
물안개에 띄워진 광구가 약간이나마 부정한 마나에 저항하여 숨 쉴 공간을 만들었고, 도진은 그 안에서 스러져 가는 원념의 아이와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지는 희생자들의 심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