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해석.”
주인의 짧은 명령에 진리의 서는 「빛」을 다시금 해석한다.
오른 레벨, 성장한 지능, 그간 마법을 사용하며 쌓인 감각, 정보, 지식……. 그 모든 것들을 진리의 서는 재료로 녹여 냈다.
진리의 서 위로 떠 있던 복잡한 문양과 수식들이 어지럽게 얽히기를 수 초.
[「빛」의 해석 한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구현 숙련도가 1.8% 상승합니다.]
진리의 서는 순식간에 해석을 마쳤다.
레벨도 갖춰졌고, 그간 쌓인 것을 해석에 갈아 넣었다.
마나를 순환시켜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마법’의 수준이 이미 2성을 넘겼음을.
‘거기다 내 예상이 맞다면, 진리의 서를 전개한 상태에서는 더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다.’
LOST에서 마법사로 오랜 시간을 살았다.
그 경험으로, 도진은 그냥 마법을 쓸 때와 「진리의 서」 상태에서 쓸 때 확연한 차이를 체감할 수 있었다.
확신을 갖고 「빛」을 발동했다.
허공에 광점이 찍혔다.
하나, 둘, 셋.
기초적인 마법이라 해도, 그리고 같은 마법이라 해도 여러 개를 중첩해서 시전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얼마 전 마법회로를 뚫은 마법사라면 더더욱.
‘주문을 동시에 3개를 깔아 둔다고?’
그렇기에 시살라의 경악은 당연한 것이었다.
4성 마법사인 그녀조차 중첩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의 숫자는 1성 마법 4개가 한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광점을 찍으려 들었다.
처음에는 한계에 다다른 마법회로가 비명을 질렀지만, 곧 마법회로를 대신해 진리의 서가 마나를 빨아들이며 술식을 완성해 나갔다.
‘역시.’
그냥 시전할 때보다 훨씬 빠르고 안정적인 캐스팅.
결과, 도진은 광점을 무려 6개나 찍을 수 있었다.
이미 도진을 바라보는 시살라의 눈에는 경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압도적 재능을 목도한 범재의 눈빛이었다.
‘이걸로 시온 그레이스와의 관계에 대해서 더 확신을 갖게 되겠지.’
극적인 연출이 가져올 부수적 이득까지 생각하며 도진은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주변의 마나가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접근하는 자를 감지하고 깨어나 제 할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법진이 흡수해야 할 악령들은 이미 전부 도진이 처치한 상태.
삼킬 것이 없으니, 마법진은 아쉬운 듯 포효하며 안에 담고 있던 악령을 토해 냈다.
-끄어어어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귀곡성.
커다란 실루엣이 드리우며 <악에 잠식된 마법공방>의 첫 번째 네임드 몬스터 ‘악의에 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순간.
딱.
도진의 손가락이 맞물리며 청량한 소리가 울렸고, 바늘구멍 크기로 찍혀 있던 광점이 터졌다.
지금까지 썼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나를 쏟아부은 「빛」은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어둠이니 그림자니 부정이니 하는 것들의 천적은 언제나 성(聖)과 광(光)이었다.
‘악의에 사는 그림자’는 이름에 ‘그림자’까지 박혀 있으니, 강렬한 빛 앞에서 위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랗게 부풀렸던 실루엣이 절반 이하로 작아지는 걸 본 도진이 외쳤다.
“시살라!”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진의 신호에 맞춰 4성 마법이 발현됐다.
이번에는 넓은 범위를 노리는 것이 아닌, 단 하나의 목표를 노리는 단일 마법이었다.
《화염 작렬》
빛 속성에 노출되어 약화된 상태로 4성 단일 공격 마법에 강타당한 순간 놈은 그로기에 빠졌고, 폭죽처럼 연속으로 터지는 폭발에 완전히 소멸했다.
마법진도 함께 소멸하여, 마법진이 끌어모으고 있던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
거뭇거뭇하고 끈적한 마나가 꾸물거리며 아직 파괴되지 않은 마법진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헉, 헉, 헉.”
긴장 그리고 도진에 대한 놀라움으로 밭은 숨을 내쉬는 시살라.
반면 「진리의 서」를 해제하며 돌아선 도진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이런 던전이 어려울 게 뭐가 있다고.’
지금과는 비교 못 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하에, 훨씬 강력한 적을 상대해야 했던 그에게 이 정도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당연한 것이었다.
[시살라 오멘의 호감도가 3포인트 상승하여 28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도진의 감상이고.
시살라의 감상은 달랐던 모양.
압도적인 재능을 목도한 영향인지 시스템 메시지는 시살라의 호감도가 올랐음을 알려왔다.
‘이건 예상 밖의 소득인데.’
평가가 높아지는 것과 호감도는 약간 다른 문제다.
‘저놈 엄청난 놈인데?’ 하면서도 질시나 견제하려는 마음을 품는 경우 호감도가 오히려 내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데 시살라는 오히려 호감도가 올라갔다.
이는 앞으로도 호감도가 오를 여지가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진리의 서」라는 사기적인 능력이 있는 한 당분간은 천재 마법사를 연기할 수 있을 테니.
‘솔직히 저 정도 눈빛은 조금 부담스럽긴 해도… 시살라 오멘 정도면 감수할 만하지.’
도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살라의 눈을 피했다.
저걸 무슨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부러움, 선망, 슬픔 같은 온갖 감정이 범벅된 눈이다.
확실한 건 마주 보기 힘든 종류의 눈이었다.
“마나는 괜찮아요?”
도진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시살라의 마나 상태를 물었다.
“…아직 괜찮아요. 절반 정도. 아니, 조금 더 남은 거 같아요.”
“절반이라. 그럼 여기서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군요. 당장은 괜찮아도 전투가 격해지면 언제 문제가 될지 모르니까요.”
“아, 네.”
도진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적당한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마법사용 연초를 꺼내 피우며 눈을 감았다.
마나를 품은 풀을 태우는 것도, 눈을 감는 것도 전부 회복을 빠르게 하는 루틴.
편안히 눈을 감은 도진은 그저 연초가 타오르는 향에 집중했다.
전투 흥분으로 올라갔던 심박수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그에 맞춰 마나 회복 효율이 안정되고 가속된다.
의도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빠르게 진입하는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 테크닉이었다.
[「명상」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그간 틈만 나면 같은 루틴을 반복한 덕에 마나의 회복과 효율 등에 영향을 주는 「명상」이 생성됐다.
스킬이 생성된 순간 도진의 눈과 마법회로에서 황금빛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새롭게 얻은 스킬이 진리의 서에 기록되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생성됐네.’
눈을 감은 채 상태창과 스킬창을 확인한 도진은 계속해서 회복에 집중했다.
방금 전보다 조금이나마 빨라진 마나 회복 속도에 만족스러워하며.
* * *
도진이 앉는 것을 본 시살라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자세가 엉성한 것은 생각도 시선도 모두 도진에게 집중된 탓이었다.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지? 내가 본 게 진짜 맞는 거야?’
시살라는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마법계에서 마법적 비전에 관한 질문은 금기이기 때문.
하나 참기 힘든 호기심에 그녀의 시선은 계속 도진을 향했다.
황금색 마나로 빚어졌던 그 책. 그건 뭐였을까?
‘고유 마법? 아니면 고대 유물쯤 되는 아티팩트인가?’
이런저런 가설을 떠올렸지만, 무엇이 되었든 시살라의 상식과 충돌했다.
고유 마법을 1성 마법사가 펼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유물급 아티팩트로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된다.
능력 안 되는 자가 발동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유물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마법이든 다른 무엇이든… 시온 님과 연관이 있다는 거.’
얼마 전 마법회로를 뚫은 그가 저런 능력을 어디에서 얻었겠는가.
마법회로를 뚫고 마법사가 되자마자 들어갔던 만리서고다.
그리고 도진이 그곳에 들어가기 직전 그에게 주어졌던, 시온 님의 나무 반지.
시온 님이 직접 건넨 물건이다. 평범한 물건일 리가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시온 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하는 공간으로 들어갈 때 필요한 열쇠였을 확률이 높아.’
만일 이 예상이 맞다면 그곳은 대마법사의 비전이 숨겨져 있는 장소일 테고.
추측을 거듭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도진의 눈과 마법회로에 황금빛 마나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인 시살라는 저것이 마법사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고단한 전투를 마무리하고 잠깐 쉬는 이 순간에도 저 사람은 마법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방금 펼쳤던 마법에 대해서? 파괴한 마법진에 대해서?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
무엇이 되었든 저 사람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마법을 갈구하고 있다.
‘바보같이. 이러니까 발전이 없는 거잖아.’
시온 그레이스라는 대마법사와의 관계성과 별개로, 저 사람의 재능은 진짜다.
그런 사람조차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시살라는 눈을 감았다.
마법회로에 집중하고, 명상을 시작했다.
잡념이 지워지고, 마법에 대한 사색이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 * *
「명상」을 얻은 덕에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을 마친 도진은 눈을 떴다.
‘아직인가?’
시살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미약하게 일렁이는 마법회로의 빛을 볼 때 그녀도 명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기다리자 그녀도 눈을 떴다.
“갈까요?”
“네.”
통로는 갈수록 복잡해졌다.
여전히 마법진이 활성화된 구역은 악령들이 득시글댔고, 심심치 않게 공방 주인이 설치한 마법적 함정들도 있었다.
하지만 공략의 큰 틀이 변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같은 악령이고, 같은 던전이었다.
‘갈수록 악령들이 더 잘 죽는 거 같아.’
시살라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공략은 갈수록 수월해졌다.
악령들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도맡아 하는 도진의 레벨이 쑥쑥 오른 덕이었다.
두 번째 마법진과 네임드 몬스터를 발견하여 처리했을 때 도진의 레벨은 27이 됐고, 세 번째에는 30이 되었다.
이제 슬슬 사냥하는 몬스터와의 레벨 차이가 많이 나지 않게 되어 레벨업 속도가 느려졌지만, 그래도 히든 던전 보너스가 워낙 빵빵하여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구역을 쓸어버리니 32레벨까지는 올랐다.
‘32라. 아슬아슬하긴 해도 이 정도면 마지막은 내가 장식할 수 있겠어.’
얻은 모든 포인트를, 이번에도 지능에 올인한 도진은 미소 지었다.
<악에 잠식된 마법공방> 공략을 계획하면서 가정했던 모든 시나리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아무리 히든 던전이라고 해도 던전 하나로 30을 넘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레벨 30대 진입.
이것은 도진이 생각한 시살라의 도움 없이 <악에 잠식된 마법공방>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