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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의 염동력은 순식간에 무력화됐고, 계단 아래로 날려 보냈던 시체는 허공에 멈춰 뿌드득거리며 고개를 돌려 이쪽을 노려봤다.
<악에 잠식된 마법공방>의 가장 약한 악령조차 35레벨은 넘기에 레벨 20도 못 넘긴 도진의 마법은 놈들의 마법 저항력을 뚫을 수 없었다.
-키히힉!
하지만 이곳엔 도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50레벨이 훌쩍 넘는 4성 마법사 시살라가 있었다.
순식간에 불로 조각된 화살이 허공에 붙들린 듯 멈춰 있는 어린아이의 시체를 향해 쇄도했다.
퍽.
건조한 파열음을 동반하며 메마른 시체를 꿰뚫은 불화살은 순식간에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타올랐다.
시살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속해서 불화살을 쏘아냈다.
-키하하학!
비명인지 웃음인지 구분 안 되는 단말마가 스쳐 지나가며 시뻘건 불꽃 안에서 검은색 얼룩 같은 악령이 소멸됐다.
도진은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 피부를 쓸며 전방을 훑어봤다.
“적에 비해 과한 화력인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가면 마나가 먼저 바닥날 겁니다.”
아무리 1성 마법이라지만 악령 하나에 여섯 방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시살라도 그걸 아는지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뱉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시체가 튀어나와서 놀라는 바람에. 앞으로는 잘 조절할게요.”
4성 마법사가 있으니 화력은 흘러넘친다.
관건은 지닌 화력을 효율 좋게 소모하는 것이었다.
마법사란 마나가 다 떨어지면 아무것도 못 하는 깡통이 되는 슬픈 존재니까.
“그래도 성수를 넉넉히 챙겨 와서 다행이네요. 막 쓸 수는 없는 게 문제지만. 아무래도 역할 분담을 해야겠어요. 저는 최대한 적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마나를 쓸게요.”
“네. 공격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도진과 시살라는 천천히 진입을 재개했다.
계단에는 몇 구의 시체가 더 있었지만, 처음과 마찬가지로 시체에 숨어 있던 악령은 밖으로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소멸됐다.
“생각보다 구조가 복잡하네요.”
계단을 다 내려와 복잡한 복도를 보며 시살라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복도 양옆으로 뚫려 있는 수많은 문들과 그 안에서 풍기는 을씨년스런 분위기에 압도된 듯했다.
“이대로 진입하나요?”
묻는 시살라에,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진입하는 건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아마도 이 공방 전체를 악령이 가득 채우고 있을 텐데,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에 적들을 두고 싸워야 하는 신세가 될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도진은 자신들이 내려온 계단 쪽을 손짓했다.
“우리가 내려오면서 계단 쪽 안전은 확보했으니, 여기서 악령들을 일차적으로 청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천천히 안전한 구역을 늘려가는 식으로 진입하면- 하고 뒷말을 잇던 도진은 자신을 감탄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아뇨, 그냥. 이런 상황이 엄청 익숙한 것처럼 보여서요. 저는… 도진의 침착함이 전염돼서 망정이지, 혼자였으면 벌써 도망치고 싶어졌을 거 같거든요.”
“공방 구조가 적힌 일지를 미리 읽었으니까요. 악마와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방치된 곳이니 뭔가 부작용이 생겼을 거라 짐작하기도 했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닌데…….”
시살라의 중얼거림을 흘리며 도진은 염동력으로 성수를 복도 중간지점에 가져다 놨다.
병에 담겨 있음에도 성(聖) 속성을 강하게 품은 물건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거뭇거뭇한 기운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최대한 아껴서 써야 하는 성수지만, 몰이사냥을 할 때는 ‘써야 할 때’였다.
“숨어 있는 악령들을 최대한 끄집어낼 테니까 큰 거 한 방 날려서 쓸어버리도록 하죠.”
“음… 「화염 파도」 정도면 될까요? 제가 쓸 수 있는 제일 센 마법이긴 한데.”
4성 마법 「화염 파도」는 넓은 범위를 강렬한 불길로 천천히 휩쓸어버리는 마법이었다.
“딱 좋네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살라는 마법을 준비했다.
그녀의 마법회로가 마나를 받아들여 술식을 전개, 조합하였고, 이윽고 마법이 장전됐다.
언제든 말만 하라는 그녀의 눈빛에 도진 또한 행동에 나섰다.
도진이 고른 것은 어둠과도, 악령과도 상극인 속성 마법 「빛」이었다.
《빛》
짧은 영창과 함께 복도 중간에 광원이 생겨나며 섬광이 터졌다.
1성 마법사의 「빛」은 공격력이 전무하지만, 상대가 악령이라면 웬만한 도발 스킬 이상의 자극을 주고, 또한 아주 잠깐이지만 약화도 시킬 수 있었다.
-캬아아악!
역시나.
건방진 침입자가 자신들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오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기 위해 숨죽이고 있던 악령들이 발광을 시작했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숨어 있어 봤자지.”
낮게 하는 말을 듣기라도 한 양 한껏 고양된 악의를 내비치며 악령들이 뛰쳐나왔다.
첫 번째 방에서, 두 번째 방에서, 저 멀리 일곱 번째 방에서.
긴 복도에 뚫린 구멍에서 밀려 나오는 악령들의 모습은 숨어 있다 뛰쳐나오는 바퀴벌레와 다르지 않았다.
하수도가 역류하듯 검은 물결이 밀려온다.
휩쓸리면 저레벨 마법사 따위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만큼 난폭한 힘을 지닌 물결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한 걸음도 물러섬 없이 놈들을 노려보며 기다렸다.
검은 물결이 적절한 위치까지 밀려오기를.
쩡.
그리고 가장 완벽한 순간을 노려 미리 배치해 놓은 성수 담긴 병을 염동 충격파로 터뜨렸다.
강력한 충격에 의해 터지듯이 깨진 병에 담겨 있던 성수는 희뿌옇게 넓은 범위로 퍼졌다.
가뜩이나 밝은 빛에 노출되어 발광하던 놈들은 성스러운 기운이 담긴 액체가 비말처럼 퍼진 영역에 들어서자 거의 발작을 했다.
《화염 파도》
그것을 본 시살라는 별도의 신호가 없었음에도 마법회로에 장전해 둔 마법을 발동했다.
고삐 풀린 불의 파도가 도진 앞에서 생성되어, 전면으로 복도를 휩쓸며 지나간다.
원래도 버티지 못했을 악령들은 빛과 성수에 약화되었기에 그야말로 불에 닿는 즉시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살라를 도진이 불렀다.
“그러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지금 빠르게 정리하면서 전진해야 돼요.”
도진은 말하기 무섭게 첫 번째 방으로 다가가 고갯짓을 하며 마법을 썼다.
번쩍.
이번에는 방 한가운데서 터진 섬광에, 가장 구석의 그늘진 곳에 숨죽이고 있던 악령들이 뛰쳐나왔다.
시살라는 화들짝 놀라 가장 빠르게 발현할 수 있는 마법으로 놈들을 요격했다.
“그, 그렇게 막 말도 없이 그러면 어떻게 해요!”
“혹시 마나라도 떨어졌어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습니다.”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도진은 반대쪽 방에 섬광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시살라는 헐레벌떡 마법을 써서 튀어나오는 악령들을 처리해야 했다.
도진은 원수라도 진 것처럼 악령을 박멸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30레벨 중반대의 몬스터를 단둘이 학살하고 있으니 경험치는 무섭게 쌓였고, 쌓인 경험치는 레벨업 메시지로 치환됐다.
순식간에 도진의 레벨은 24를 돌파했다.
원래라면 파티원과 레벨 차이가 많이 나면 경험치 페널티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광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의 최초 발견자는 해당 던전 내에서만큼은 보상과 관련된 모든 페널티를 상당 부분 면제받기에 도진은 경험치를 비교적 온전히 획득할 수 있었다.
도진은 그렇게 얻은 보너스 포인트를 모조리 지능에 투자했다.
‘찾았다.’
그러다 복도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도진은 커다란 마법진을 발견했다.
“저, 저건……!”
한 템포 늦게 방 안을 살핀 시살라는 마법진을 보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법진 위에 사람의 다리가 놓여 있는 탓이었다.
고관절 어림에서 절단한 왼쪽 다리였다.
“일지에 적힌 대로네요. 이 공방의 중심에 들어가려면 저걸 포함해서 총 5개의 마법진을 무력화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마법진인데요?”
익숙하지 못한 잔혹한 자극에 힘들어하면서도 시살라는 마법적 호기심을 포기하진 않았다.
도진은 열심히 몬스터를 잡는 소환수 역할을 톡톡히 한 보상으로 설정상의 이야기를 풀어줬다.
“처음에 말했듯 악마의 세계와 이곳을 연결시키기 위한 마법진입니다. 마법진의 중심부에 놓인 두 개의 오망성 중 정방향은 로스타니아, 역방향은 악마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 중간을 잇는 것이 저 인간의 육신이고. 인간을 제물로 악마를 소환했다는 이야기에 착안해 만든… 확신 없는 마법사의 발악 같은 겁니다.”
“그럼 다른 4개의 마법진은……?”
“마법진이 5개인 이유가 뭐겠습니까. 마법진 5개로 거대한 역오망성을 형성하고, 별의 중심에 문을 만들고자 한 거죠.”
“…새삼스럽지만, 저걸 보니 왜 숨어서 실험을 해야 했던 건지 알겠네요.”
로스타니아에서 악마와 관련된 연구는 금지되어 있지 않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 닥쳐 오는 위기를 타파해 살아남는 게 최우선 과제인 세계에서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연구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
다만 그 방법이 인간의 살과 피를 흩뿌려, 그 부정한 기운을 매개로 악마를 부르려는 거면 문제가 된다.
“어쨌든 저 실패작부터 해결을 하도록 하죠. 일지에 적힌 대로면 저 마법진에 접근하면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훨씬 강한 악령이 깨어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일지에 적혀 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현상 자체는 진실이었다.
역오망성 모양으로 퍼져 있는 다섯 개의 마법진은 각각 네임드 몬스터가 지키고 있는 핵심 오브젝트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접근하면 해당 마법진이 설치된 구역에 남아 있는 모든 악령들의 기운을 흡수하여 그만큼 더 강력한 네임드 몬스터가 소환되는 식.
도진이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악령을 단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박멸하려 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네임드 몬스터를 최대한 약한 상태로 소환하여 한 방에 처리해 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네임드는 네임드.
아무리 4성 마법이라 해도 한 방에 처리할 수 있다 확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한 번에 처치할 수 있을 만큼 약화를 시키면 된다.
다량의 성수를 퍼부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만, 성수는 따로 쓸 데가 있기에 최대한 아껴야 했다.
“이번에는 넓은 범위를 공격할 필요 없이, 저 마법진에서 소환되는 악령만 노리는 공격으로 부탁합니다. 최대한 강력한 걸로.”
시살라에게 당부하며 도진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서서히 황금빛이 피어나며 뻗은 손끝에서 황금의 서책이 펼쳐졌다.
《진리의 서》
촤라락, 하고 펼쳐진 페이지에는 「빛」이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