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없는 형편에 마법 스킬북을 뇌물로 바치면서까지… 그래, 속된 말로 집적대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1성 마법 스킬북 한 권에 불과했다.
시온 그레이스와 모종의 대화를 나누고, 그녀에게서 직접 무언가를 건네받고, 마지막에는 출장소 문을 통해 만리서고로 사라진 사람에게 1성 마법 스킬북은 아예 가치가 없다 해도 좋을 뇌물일 것이다.
흥분이 가라앉고 머리가 좀 식은 뒤에 그 사실을 깨달은 시살라는 두 번째 만남은 물론이고 나중에 우연히 마주치면 아는 척은 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조차 접은 상태였다.
기대는 무슨.
다짜고짜 이성을 잃고 달라붙었을 때 그가 지었던 당혹스런 표정이 떠오를 때마다 이불을 걷어차곤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 그 사람이 직접 찾아오다니?
“왜 나를 찾는 걸까?”
시살라는 도진이 갑작스레 찾아온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마법적인 도움이나 모종의 청탁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고.
더 설마하니 자신의 미모에 반해서 찾아온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아……!”
어떻게든 이유를 짐작하기 위해 안 돌아가는 뇌를 혹사시키는 사이 어느새 출장소 건물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꿀꺽. 시살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지독한 피로와 졸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엘토마기아의 흑색위와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문 너머에 있다. 그걸 생각하니 머리가 백지장이 됐다.
시살라는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문을 열고는, 마찬가지로 삐걱대는 걸음으로 출장소 안으로 들어섰다.
“힉.”
그러고는 뱉는 건지 삼키는 건지 헷갈리는 숨소리를 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입구 쪽에 시선을 두고 있던 도진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시온 그레이스의 후광 효과 때문인지 처음 마주쳤을 때랑 다르게 더럽게 비범해 보였다.
삐딱하게 기대 있는 자세나 날카로운 눈매 전부.
그때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적극적으로 들이댈 수 있었는지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시살라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굳어 있는 사이 도진은 카운터에 앉아 있는 순둥해 보이는 마법사와 몇 마디 나누더니 저벅저벅 그녀에게 다가왔다.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군요. 차분히 대화를 나눌 장소는 아닌 것 같으니.”
“네? 아, 네. 그렇죠.”
반 박자 늦게 대답한 시살라는 도진의 뒤를 따랐다.
도진은 매우 익숙한 걸음으로 복잡한 골목을 누볐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고요한 커튼.
이곳은 도진이 전생에도 가끔 이용했던 곳으로, 이름처럼 각각의 테이블이 칸막이와 커튼으로 분리되어 있는데다 방음 마법까지 걸려 있어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인 카페였다.
도진은 묻지도 않고 시살라의 음료까지 주문했다.
당연히 가장 싼 것이었다.
그러나 시살라는 자신 앞에 놓인 액체가 맹물이든 걸레 빤 물이든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오직 도진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그것만이 중요했고 궁금했다.
그런데 정작 말을 해야 할 도진이 아무 말이 없었다.
태평하게 제 몫으로 나온 음료를 휘휘 젓고, 맛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따름이다.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시살라가 먼저 입을 열고야 말았다.
“저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절 찾으실 이유가 없는 거 같아서…….”
그렇게 침묵이 깨지고서야 도진은 시살라를 보았다.
* * *
시살라 오멘이 자신에게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도진은 잘 알고 있었다.
그 관심의 지분 대부분을 시온 그레이스가 차지하고 있겠지만, 그건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녀의 관심을 이용하면 도움을 얻어 내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도와 달라’는 말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도진은 그 말을 먼저 꺼낼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형식적으로나마 자신이 을이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 거래는 굳이 내가 을을 자처할 필요가 없는 거래니까.’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말이다. 협상이란 건 말로 하는 거고.
말만 잘하면 같은 상황 속에서도 갑과 을을 뒤바꿀 수 있다.
시작부터 깔아 놓은 침묵도 최선의 협상을 위해 고른 ‘말’이었다.
‘이제 슬슬 한계인 거 같군.’
도진은 음료를 맛보는 척하며 시살라를 살폈다.
음료에는 손도 못 대고 있고, 괜히 애꿎은 로브 자락만 뜯어 놓을 기세다.
역시 얼마 가지 않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절 찾으실 이유가 없는 거 같아서…….”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미소 지은 도진은 자신이 짠 각본 첫 줄에 적힌 대사를 읊었다.
“당신에게 마법이란 무엇입니까?”
“……?”
예상은커녕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을 짓는 시살라.
도진은 그런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에게 마법이란 무엇입니까?”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은 시살라는 짧지 않은 침묵을 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고민을 끝낸 그녀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저한테 남겨진 전부예요. 마법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이, 태어나 처음 가져 본 제 것이 마법뿐이었던 사람의 답.
예상했던 것보다 더 무거운 진심에 도진은 만족했다.
진심이 드러났다는 건 그만큼 심리적인 빗장이 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도진은 풀리려는 빗장이 긴장으로 인해 다시 닫히지 않게끔 말투와 사용할 어휘를 조금 더 부드럽게 조정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당신은 저한테 조언을 했었죠. 엘토마기아보다는 아카데미에 가 보는 게 좋을 거라고.”
도진의 말에 시살라는 쥐구멍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햇빛을 안 봐서인지 지나치게 하얀 살이 약간의 홍조를 띠는 게 보인다.
“그땐 죄송했어요. 저 따위가 조언을 해도 될 분이 아니신데. 쓸데없는 오지랖이나 부리고…….”
“아뇨, 저는 고마웠습니다.”
“네?”
“나쁜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아니까요. 당신은 진심으로 저한테 아카데미가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했던 조언이었잖아요. 실제로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카데미로 가는 편이 나은 게 사실이기도 했고.”
“그렇긴… 하네요……?”
자신 없는 목소리로 기어들어 가듯 말한 시살라는 목이 타는지 음료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뻔히 뇌물인 게 보이는 스킬북을 줬을 때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그냥 이 사람은 진짜 마법에 진심이구나 싶었죠.”
그러나 제대로 마시진 못했다.
뇌물이라는 단어에 놀라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입이며 코로 음료가 다 넘어온 것이다.
그나마 뿜어내면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견딘 덕에 물대포를 쏘는 것만은 피했지만, 괴로운 기침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침이 진정되고도 머리를 테이블에 박고 미동도 않는 모습은 충분히 애처로운 것이었으나, 도진은 시살라를 계속해서 말로 흔들었다.
“부끄러워할 거 없습니다. 어떤 마법사였어도 그 상황이었으면 눈이 돌아갔을 거예요. 갓 마법사 딱지를 단 놈이 갑자기 나타난 대마법사랑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대마법사한테 반지를 받는 걸 봤다? 아마 절 고문하거나 죽이고 반지를 뺏으려 드는 놈이 절반은 넘을 겁니다.”
그런 거에 비하면 1성 스킬북을 뇌물이랍시고 건네는 순수함은 귀여운 거죠. 덧붙이는 말에 시살라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빌었다.
“제발… 제가 죽을죄를 지었으니 그만해 주세요.”
“시살라.”
“…….”
“지금 하는 말은 부끄러우라고 하는 말도 아니고, 비꼬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당신은 제가 마법사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조언을 해 줬던 호인이고, 같은 마법사로서 존경할 만큼 마법에 대한 열정도 있습니다.”
그만, 그만. 시살라는 칭찬이 더 괴롭다는 듯 몸서리쳤다.
하지만 도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게 다른 마법사에게 도움을 줄 기회가 생겼을 때 제일 먼저 당신이 떠오른 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마법사니까.”
버둥대던 시살라의 움직임이 멎었다.
도움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이다.
슬쩍 고개를 든 눈에 언뜻 간절함이 비친다.
도진은 그런 그녀의 눈을 짐짓 못 본 척하며 흘러가는 듯이 말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냥 어느 마법사가 남긴 유언과 그의 연구일지를 얻었고, 그의 공방의 위치를 알게 됐을 뿐이죠. 연구일지에 적힌 대로라면 악마들의 세계와 여기를 연결하는 마법을 연구했던 것 같은데…….”
하나 도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여 그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담긴 내용의 무게감에 놀란 시살라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자, 잠깐만요. 지금 다른 세계랑 로스타니아를 연결하는 마법이라고 했어요?”
“네. 성공하진 못한 모양이지만, 일단 시도 자체는 그런 것 같습니다.”
선선히 답하는 도진을 시살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단순히 악마를 소환하는 것도 아니고, 악마들의 차원과 연결로를 잇는 짓을 시도할 정도의 고위 마법사가 남긴 연구일지와 공방이다.
어떤 마법사라도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 그런 정보였다.
그런데 이런 걸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다니.
‘역시 이 사람,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시온 그레이스가 직접 나타났을 때부터 자리 잡았던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확신이 짙어질수록 점점 더 궁금증이 커졌다.
물어선 안 될 것 같고, 물어봤자 제대로 된 답을 얻기 힘들 걸 아는데도 묻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궁금했다.
결국 시살라는 마법사답게 호기심에 굴복하고 말았다.
“저, 저기, 그때 시온 그레이스 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잖아요… 혹시 그분과 어떤 관계이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 질문을 도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서.
사실 의도했던 침묵과 마찬가지로, 도진이 시온 그레이스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은 것 또한 의도된 생략이었다.
일부러 피하는 느낌을 주면 더욱 궁금해하고 수상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서.
도진은 기다렸던 질문이 나오자마자 준비한 답변을 돌려줬다.
“딱히 관계랄 게 없는데요. 그때 그건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찾아온 행운 같은 거였어요. 저는 평범한 이방인일 뿐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살라는 이 거짓 없는 진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유아독존에 막무가내로 유명한 대마법사가 우연히 나타나서 우연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직접 반지를 주고, 그것도 모자라 엘토마기아의 마법사도 아닌 사람한테 만리서고의 문을 열어 줬다고?
지독한 바보도 이런 말은 안 믿는다.
‘납득하기 힘든 대답을 들었으니 혼자 끙끙대면서 나랑 시온 그레이스가 어떤 관계일까에 대해서 추측하겠지. 그리고 결국 자기가 만든 가설들 중에서 제일 개연성 높아 보이는 걸 믿게 될 테고.’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고도 시온 그레이스의 후광 효과는 계속 누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는 것이다.
‘역시 전혀 안 믿는 것 같네.’
혹시나 하여 살펴보니, 역시 시살라는 도진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으나, ‘숨기고 싶은 무언가가 있구나’ 하는 의심으로 가득한 표정이다.
“그렇군요. 우연히 오셨던 거구나.”
말은 저렇게 하지만, 눈빛은 ‘속아는 드릴게’ 하는 눈빛이고.
이 정도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 새끼 뭐 있네’라고.
‘믿고 싶은 걸 만들어서라도 믿는 게 인간이니까.’
어쨌든 일련의 빌드업으로 도진은 시살라 안에 자신의 허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르긴 몰라도 시살라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도진이란 인간은 최소 100배쯤 대단한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허상의 힘을 등에 업고 마무리를 지을 차례였다.
“더 궁금한 게 없다면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죠. 시살라, 당신만 괜찮다면 저는 이번에 얻은 기회를 당신과 공유할 생각입니다.”
“왜인지 물어도 될까요? 자기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구축한 공방을 견식할 기회는 천금과도 같은 건데… 왜 굳이 저 같은 재능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마법사한테…….”
다른 유저와 보상을 나누기 싫으니까.
너는 시온이 무서워서라도 내 뒤통수를 칠 수 없을 테니까.
이유는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시살라가 듣고 싶은 종류의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자에게 끌리는 법.
해서, 도진은 지금의 시살라가 가장 듣고 싶어 할 진실을 골라 입에 담았다.
미래의 그녀를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을.
“전 당신이 충분히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잠시 길을 헤매고 있을 뿐, 걸어야 할 길만 찾으면 언젠가 정말 좋은 마법사가 될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1성 마법사가 재능 운운하는 건 분명 우스운 일이다.
하나 지금 도진은 시살라에게 있어 단순한 1성 마법사가 아니었다.
시살라 본인이 만든 허상으로서의 도진은 그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그리고 도진의 말은,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은 마법사가 ‘믿고 싶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관계 형성!]
[엘토마기아의 마법사 시살라 오멘이 당신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시살라 오멘의 호감도가 10포인트 상승하여 10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갑과 을이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