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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9화 (1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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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 본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육체가 순식간에 황금빛 입자로 분해되는 광경이었다.

그 공간이 정체 모를 마법진과 어마어마한 마나로 가득 찬 순간 말 그대로 금빛 먼지가 되어 흩어진 것이다.

[새로운 육체가 형성되는 중입니다. 새로운 육체가 준비되기까지 당신의 영혼은 로스타니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결과는 사망으로 인한 접속 제한.

도진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게임 오버가 낫기 때문이다.

히든 피스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건 전생에 뼈저리게 경험했다.

10레벨 이전의 리제니안, 그러니까 유저의 새로운 육체가 준비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하루.

하루만 기다리면 다시 게임을 할 수 있다.

…고 도진은 안도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망 페널티가 끝나고 LOST에 접속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진

레벨: 8

클래스: 진리의 서

근력: 7

민첩: 8

체력: 61

지능: 60

스킬: ( 1 ) [열기]

특성: ( 0 )

혹시나 하고 열어 본 상태창이 그렇게 만들었다.

……?

도진의 뇌가 비워졌다.

새하얗다.

표백제에 뇌를 집어넣고 박박 문질러도 이것보다 새하얗진 못할 것 같았다.

“시발.”

그나마 공격 마법은 남아 있었던 전생과 달리, 이번에는 스킬이 겨우 하나만 남고 싹 다 사라져 있었다.

* * *

겨우 사고 비슷한 걸 머릿속에 굴릴 수 있게 되기까지 약 5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침착하자.”

그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이미 벌어진 일.

돌이킬 수 없다면 해결 방법이라도 찾아야 했다.

일단 뭐가 달라졌는지부터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도진은 숨을 고르고 상태창을 응시했다.

토씨 하나라도 변한 게 있다면 찾아내기 위해.

그러자 스킬이 단 한 개만 남은 충격으로 미처 발견 못했던 점들이 눈에 띄었다.

‘진리의 서……?’

일단 클래스가 마법사에서 ‘진리의 서’라는 생뚱맞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눈떠 보니 용사. 눈떠 보니 4000년 묵은 대마법사. 눈떠 보니 재벌집 막내아들.

좋은 거 많은데 하필이면 된 게 책 쪼가리라니?

그래도 이게 히든 클래스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히든 클래스라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감당 못 할 히든 피스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전생에 지겨울 정도로 보고 듣고, 또 겪기까지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안다.

‘지능 조금 오른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딱 하나 남은 스킬이 무엇이냐다.

‘아니지. 원래 배웠던 건 싹 날아가고 새 스킬이 생긴 걸 수도 있어.’

도진은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스킬창을 활성화했다.

「진리의 서」

그러자 새롭게 얻은 클래스명과 같은 단어가 스킬창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기록하고, 해석하여, 구현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잃어버린 진리에 닿으리니.]

스킬에 대한 설명은 짤막하고, 모호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계속 진리 타령하는 걸 보니까 마법사 계열 히든 클래스인 건 확실한 거 같네.”

진리라는 단어에 이렇게 집착하는 놈들은 도진이 아는 한 마법사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애초에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던 곳이 마법사 집단인 엘토마기아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 히든 피스가 마법사의 상위 호환이냐 하위 호환이냐… 그것도 아니면 전생처럼 불량품이냐인데.

그건 결국 뚜껑을 완전히 열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써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

도진은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서(書)니까 떠올려야 할 이미지는…….’

펼치는 것.

그리고 펼쳐야 할 대상은.

‘진리의 서가 된 나 자신.’

도진은 마법 스킬을 발동할 때처럼 강렬한 심상을 떠올렸다.

그러자 뻗은 손에서 희미한 황금빛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마법회로가 주인의 의지에 반응하는 것이다.

촤라락.

도진의 손바닥 위로 반투명한 황금의 서책이 펼쳐졌다.

그런데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 하나하나는 깨끗하여, 무엇도 쓰여 있지 않았다.

왜일까? 이 책에는 정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걸까?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문이었다.

그 의문을 읽은 듯 책장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

《기록 열람》

차르륵.

그리고 멈춘 곳엔.

「점화」

도진이 가장 먼저 배운 마법 스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설마……?’

사라진 마법들이 증발한 게 아니고 이 책 안에 기록된 건가?

이번에도 진리의 서는 주인의 의문에 착실히 답했다.

책장이 다시 빠르게 넘어간다.

「점화」

「바람 화살」

「얼음 화살」

「빛」

「염동」

차례로 펼쳐지는 페이지에는 도진이 배웠던 마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도진은 홀린 듯 「점화」라 적힌 부분을 쓸었다.

그러자 책장에서 피어난 빛이 「점화」의 수식과 마법진을 포함한 술식 전반을 3차원으로 그려 냈다.

허공에 떠올라 3차원으로 회전하는 마법의 구성요소들 위로 메시지가 떠오른다.

[기록된 마법 「점화」를 해석하시겠습니까?]

‘해석?’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확인해 봐야지.

“해석.”

[해석을 시작합니다.]

[「점화」 해석 1%… 2%… 3%…….]

느릿느릿 오르는 해석율과 함께 마법회로에서 익숙한 통증이 느껴졌다.

같은 패턴의 통증이 여러 번 느껴지는 걸 보아 아마도 해석되고 있는 마법의 마력 패턴이 반복해서 회로에 흐르는 모양.

그러다가 해석율이 5%에 도달했을 때.

[「점화」의 해석율이 한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구현 숙련도가 해석율에 맞춰 조정됩니다.]

마법회로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사라졌다.

‘기록.’

‘열람.’

‘해석.’

그리고 ‘구현.’

이 정도 단서가 주어졌는데 ‘이게 뭐지?’ 하고 있을 만큼 도진은 순진한 뉴비가 아니었다.

도진은 「점화」를 사용했다.

마법회로에 집중하며 뚜렷한 심상을 떠올린다.

《점화》

마법사의 언령(言靈)이 준비된 술식의 트리거를 당겼다.

그리하여 화르륵 하고 마나를 연료로 삼는 불이 피어났다.

‘써진다.’

마법사라는 클래스를 잃고, 마법 스킬마저 잃었음에도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럼…….’

다른 마법들은 어떨까?

반드시 해석 과정을 거쳐야 사용할 수 있는 걸까?

도진은 아직 해석을 거치지 않은 「바람 화살」을 사용했다.

후우웅.

마나를 머금은 인위적인 이적의 바람이 날카롭게 일렁였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굳이 ‘해석’을 하지 않아도 ‘기록’만 되어 있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해석율 그리고 구현 숙련도는 무얼까.

‘말 그대로 기록된 마법의 숙련도가 올라가는 거겠지.’

도진은 바로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점화」를 사용해 봤다.

화륵.

‘방금 배운 마법이라고 보기엔 발동이 빨라.’

이 정도 발동 속도는 「점화」의 숙련도가 1성 마법사의 수준을 상회해야 가능한 속도다.

그건 곧 5퍼센트의 해석율로 1성 끝자락 혹은 2성 마법사 초입 수준의 숙련도를 얻었다는 이야기.

이쯤 되면 확실했다.

히든 클래스 ‘진리의 서’는 마법사 클래스의 완벽한 상위 호환 클래스임에 틀림이 없다.

‘그 검은색 큐브… 진리를 파헤치겠다고 만든 마법 해석 장치 비슷한 거였나?’

지금까지 알아낸 것과 정황들을 따져 볼 때 가장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하나 중요한 건 그런 가설이 아니었다.

잭팟이 터졌다.

그것도 꽤나 당첨금이 후한 제대로 된 잭팟이.

중요한 건 그것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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