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8화 (9/271)

8

“허억!”

늦지 않게 정신을 차린 덕에 바닥과 키스를 하는 꼴은 면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쉰 게 닷새 전이던가?

역시 이쯤에서 로그아웃한 다음에 쉬어 줘야 하나.

고민하며 고개를 들던 도진은 그대로 굳었다.

“뭐야? 여긴 지금 올 수 없는 곳인데……?”

서 있는 곳이 지금의 자신은 절대 들어설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각각의 보관물들이 하나하나가 별도의 차원 단절 술식으로 보호받고 있고, 그것들 전부가 딱 봐도 최소한 유물 등급 이상의 물건.

1성 마법사가 올 수 있는 층일 리가 없잖은가.

도진은 멍하니 주변을 거닐었다.

그러다가 눈에 익은 낡고 불길해 보이는 책 앞에서 멈춰 섰다.

“고대 저주의 서잖아.”

강력한 고대 저주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아이템 ‘고대 저주의 서’.

도진이 이 책에 익숙한 이유는 간단했다.

전생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 번 봤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이 책은 건드리지 않았었다.

‘저걸로 좆 됐던 게 누구였더라?’

고대 저주의 서로 배운 저주 마법을 써 대다가 회로가 싹 다 망가져서 랭커 하나가 문자 그대로 병신이 됐다는 걸 알고 있는데 저걸 건드리는 미친 짓을 할 리가 있나.

마법사는 술(術)을 다루는 모든 직업 중 가장 중립적인 직업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는 가장 다재다능한 술사(術師)인 것이다.

다만 가장 중립적인 마법사는 마치 하얀 도화지와도 같아서 어떤 색에 물들기도 쉬웠다.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지만, 갈수록 배우고 쓰는 마법에 따라 회로도 변형되고, 그로 인해 특화되는 분야와 취약해지는 분야가 갈리게 된다.

이게 극단적으로 가 버리면, 고대 저주 마법 잘못 배웠다가 마법회로가 망가져서 병신이 되거나 전생의 도진처럼 회로 변형으로 인해 파괴 마법만 쓸 수 있는 반병신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도진은 이미 보고 듣고 겪은 바가 있어서 이런 부분에서 고생할 일은 없었다.

“어쨌든 저게 있다는 건 여기가 5층 이상이라는 건데.”

그래. 중요한 건 고대 저주의 서 자체가 아니다.

이 고대 마법서가 보관되는 곳이 5층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만리서고 5층은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기본으로 깔고, 거기에 더해 엘토마기아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기세로 온갖 퀘스트를 주는 대로 해결해야 출입이 허가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도진은 1성 마법사 주제에 여기에 서 있다.

이유가 뭘까?

고민은 짧았다.

“역시 이 반지 덕분이겠지?”

시온이 직접 건네준 나무 반지.

아마도 이 반지가 마스터키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하지만 지금의 도진에게는 다 소용없는 이야기다.

여기도 그렇고 여기보다 더 위도 그렇고 어차피 뭐 하나 건드려 볼 수도 없으니 말이다.

도진은 혹시나 하고 제일 안전해 보이는 검을 봉인한 마법진에 나무 반지를 가져다 대봤다.

‘…….’

혹시 몰라 열심히 비벼도 봤다.

“음. 역시 안 되나.”

결과는 역시 실패.

나무 반지는 어디까지나 장소에 대한 제약만 없애 주는 모양이었다.

도진은 입맛을 다시며 주변에 널려 있는 어마어마한 가치의 마도서와 마법 재료, 무구 등을 보았다.

그림의 떡이지만, 저것 하나하나가 웬만한 성보다 더 비싸다는 걸 알아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시간만 축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으니까…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는 올라가 볼까?”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이런 마스터키를 손에 넣을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전생에 갈 수 있었던 한계는 7층이었다.

가장 높은 층을 구경한 유저가 도달한 곳조차 겨우 8층이고.

어쩌면 그보다 높은 곳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를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뭐가 있는지 미리 봐 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마음을 정한 도진은 걸음을 옮겼다.

안내를 받기 위해 떠올리는 심상은, 잊고 싶은 기억.

순식간에 장소가 변한다.

휙휙 바뀌는 배경 사이로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보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걸음이 멎은 곳은 만리의 도서관 7층의 한구석. 황폐한 도시를 배경으로 둔 공간이었다.

물건만을 따로 분리하여 가져올 수 없어서 당시의 공간 전체를 도려내어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파괴의 원령’이 보관된 장소였다.

이곳은 전생에서 도진이 천운과 금전과 노력을 동시에 갈아 넣어 도전했던 히든 퀘스트의 중간 지점이기도 했다.

도진은 폐허의 한가운데에 수십의 차원 격벽에 의해 봉인되어 있는 악귀를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놈을 흡수해서 반쪽짜리 히든 피스를 손에 넣은 탓에 도진은 마법사로서 끝장났었다.

기분이 안 좋은 걸 넘어 PTSD를 겪어도 이상하지 않을 입장이다.

‘진짜 그땐 미치는 줄 알았는데.’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스킬창에서 순수한 공격 마법을 제외한 모든 마법 스킬이 사라진 걸 봤을 때 도진은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었다.

농담이 아니라 한강 밑에 인생 리셋 버튼이 있다에 모든 걸 걸고 잠수라도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저건 히든 피스는 히든 피스지만 불량품인 동시에 반쪽짜리다.

파괴의 원령을 만든 또라이 파괴광 마법사가 완전한 파괴 마법을 만들어 보려다 회로 과변형 및 역류로 비명횡사하고, 본인이 만들던 마법에 집어삼켜지는 바람에 저런 몰골이 됐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만 알았어도 저걸 흡수할 생각은커녕 보자마자 전력으로 도주했을 거다.

아니, 애초에 히든 퀘스트를 가져다 버렸겠지.

‘…저게 사실은 퀘스트 완료 보상이 아니라 퀘스트 본편 시작점일 줄은 몰랐으니까.’

무슨 X피스의 해적질에 미친 골가 놈도 아니고.

‘하하하, 찾을 수 있으면 찾아봐라! 네 팔다리는 내가 잘 떼서 세상 어딘가에 숨겨 뒀으니!’ 같은 미친 소리가 적혀 있는 퀘스트 창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결국 도진은 이어지는 퀘스트를 해결할 어떤 방법도 찾지 못했고, 마법회로는 변형된 채 굳어 버렸고, 공격 마법만 쓸 수 있는데 연비가 처참한 것도 모자라 마법 몇 번 쓰면 마법회로가 과부하돼서 픽픽 쓰러지는 마법사로 살아야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함께해서 더없이 좆 같았고, 다시는 보지 말자. 이왕이면 내가 싫어하는 새끼들 중 한 놈한테 가면 더 좋고.”

도진은 과거의 악몽에게 중지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걸음을 뗐다.

더 위로. 가능한 한 높이.

엘토마기아가, 아니… 로스타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 중 한 명인 시온 그레이스가 숨겨 놓은 비밀들을 내게.

도진의 마음을 읽은 만리서고가 안내를 시작했다.

그러나 8층부터는 봉인의 격이 말도 못 할 만큼 강력해서 혹은 차원 격벽 안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기운 탓에 봉인된 물건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봉인 자체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저게 없으면 저 물건들이 뿜어내는 폭력적인 마나의 격류에 휘말려 그야말로 먼지로 화해 이곳에서 쫓겨날 테니.

“그럼 어차피 더 위로 올라가 봐야 소용없는 건가.”

도진은 잠시 고민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식량이 동날 때까지 1성 마법사가 손댈 수 있는 책들이나 탐독할까 하고.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는 뭔가 아쉬웠다.

그래도 기회가 기회인데 중간은 생략해도 마지막 지점은 찍고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금방 구경하고 내려가서 읽으면 되지.”

마음을 정한 도진은 다시 걸었다.

이번에 품는 심상은 아주 간결했다.

이 공간의 끝.

더 이상 나아갈 곳 없는 마지막 장소.

이번에도 만리서고는 제 주인의 반지를 지닌 도진을 친절히 안내했다.

그렇게 당도한 곳은.

“…이건.”

어느 고대 유적의 커다란 방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사방의 벽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을 뿐이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관하고 있는 게 없는 건가?

궁금증을 느낀 도진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이질적인 공간 안에는 어떤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방으로 가는 문 같은 게 있는 건가?’

‘벽이라도 더듬어 볼까-’ 하고 생각하며 발을 뗀 순간이었다.

위이잉-

방 가운데 수백 수천 개의 마법진이 나타난 것은.

아니, 저걸 마법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저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또 미친 듯이 움직여 대는 것을?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마법진의 중앙에서 피어나듯 심연처럼 새까만 큐브가 생겨났다.

그러면서 기계적인 음성이 들렸다.

【신규 지적 생명체 감지.】

【감지된 개체에 대한 식별 및 탐색 개시.】

【‘운명’ 검색 결과. 해당 개체에 대한 정보 없음.】

【신규 진리의 서 접근 가능 개체로 인식.】

검은색 큐브가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파캉.

검은색 큐브를 감싼 마법진들이 차례로 깨지고 확장되기 시작했다.

환영처럼 흩날리는 빛 입자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기하학적인 문양들.

그리고 폭발하는 힘의 격류가 도진을 덮쳤다.

* * *

사실 만리의 도서관은 하나의 던전을 봉인하기 위한 마법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발견된 순간부터 주변 공간을 잠식하며, 제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던 정체불명의 던전.

시온은 무한히 공간을 확장하는 던전의 성질을 역이용해 그것을 봉인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공간을 활용하여 만리의 도서관을 만들었었다.

그러나 정작 던전의 정체는 끝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고대 문명의 유산인지 아니면 다른 세계에서 흘러들어온 무언가인지.

일정 영역 안으로는 접근조차 허용치 않는 절대적인 봉인의 중심부에 도대체 무슨 비밀을 품고 있는 건지조차도.

그런데 그 비밀이 허무하게 풀려 버렸다.

‘…….’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었던 던전 중심부에 서서, 시온은 간접적으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어째서…….”

어째서 봉인이 풀린 걸까.

아니, 그건 봉인이 풀린 것도 아니었다.

그 리제니안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에도 봉인은 여전히 이곳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그 리제니안만 예외적으로 막아서지 않은 느낌이었어.’

그렇다는 건 이곳을 보호하던 봉인의 결계를 통과할 조건을 그 리제니안이 충족시켰다는 뜻인데.

그게 뭘까.

‘단독 개체에만 적용되는 예외적인 조건은 아니었을 확률이 높아. 좀 더 포괄적인 조건일 터인데.’

지금이라도 그 리제니안을 조사해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이곳에서 터진 마나 폭풍에 휩쓸려 가루가 되었지만, 리제니안인 이상 며칠 후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조사하고자 하면 못할 것이 없는…….

사고를 확장하던 대마법사의 눈에 호기심이 과하게 맺힌 순간.

사아아-

그녀의 눈앞에 황금빛 파문이 일렁였다.

일명 세계율의 빛.

LOST 세계관의 개연이 어떤 이유에서든 심각하게 훼손될 경우 나타나 조정하는 빛이었다.

NPC는 볼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빛이 시온 그레이스를 감쌌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이 수정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만리의 도서관이 만들어진 과정이 고쳐졌다.

의문의 던전을 봉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파괴되며 발생한 여파를 막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만리의 도서관 최심부에 리제니안이 도달한 기억도 삭제되었다.

대신 동료를 추억하며 입맛에도 맞지 않는 포도주를 홀짝이던 것으로 기억이 새롭게 조각된다.

그렇게, 세계는 도진과 고대 유적 간의 연결고리를 철저하게 지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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