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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 던진 작은 공은 순식간에 제국 마탑 전체로 퍼져 나갔다.
사소한 정보 하나라도 덥석 물어 제 상전에게 가져다 바치려는 말단 마법사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뭐? 모험가 길드에서 온 놈이 만리서고를?”
“뭐? 그놈이 리제니안이야? 그럼 관문을 넘어왔다는 거잖아?”
“뭐? 그놈이 ‘그분’을 언급했어?”
“모험가 길드랑 ‘그분’ 사이에 그런 약속이 있었다고?”
보고를 받은 나름 높은 위계에 속한 마법사들은 일제히 하던 일을 그만두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법사란 무릇 호기심에 제 목숨은 물론이고 타자의 목숨도 기꺼이 거는 자들.
하물며 ‘흑색위’는 엘토마기아 마법사들의 발작 버튼이나 다름없는 단어다.
그들 입장에서는 누구 입에서 튀어나왔든, 흑이니 블랙이니 하는 단어가 나왔으면 일단 확인은 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흠흠, 이거 참. 내 아주 바쁘지만, 그렇다고 모험가 길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중요한 사안은 정확히 확인을 한 뒤에 대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런데 확인을 하려면 ‘그분’께 직접 여쭙는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최상층에 가는 수밖에.”
마법사들은 이걸 탑의 최상층에 가 볼 기회로 받아들였다.
허락받지 못한 자는 헤매고 헤매다 결국 탑 밖으로 걸어 나가게 만든다는 흑색위(黑色位)의 독립 차원 마법을 경험할 기회.
“허허, 자네는 요즘 워낙 바쁘지 않나. 마법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큰 실험을 한다고 들었네만. 이런 사소한 일은 한가한 뒷방 늙은이인 내가 처리하도록 할 테니, 자네는 그만 신경 끄게.”
“선배님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일은 원래 밑에서 알아서 하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선배님들께서는 곧 있을 마법학회 준비에 매진해 주시지요. 이 건은 제가 잘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소식을 들은 엘토마기아 마법사들의 눈이 돌아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새끼가? 야, 너 색깔 뭐야?”
“여기서 색이 왜 나옵니까?”
“엘토마기아에서 그럼 색 말고 뭐가 나와!”
결국 마법사들은 자기가 최상층에 올라가 보겠다고 머리채를 부여잡고 싸우기에 이르렀다.
* * *
잘난 마법사님들께서 마법사로서의 체통은 집어던지고 머리채를 부여잡고 싸우고 있을 때.
도진은 갑자기 나타난 검은 고양이를 마주하고 있었다.
“누가 내 귀를 간지럽게 하나 해서 와 봤더니,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아이였구나.”
검은 고양이는 뻣뻣하게 굳은 도진과 말단 마법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뭘 그리 보느냐? 뻔한 흐름인 것을. 시온이다.”
엘토마기아의 정점에 선 흑색위. 대륙에 다섯밖에 없는 그랜드 마스터 중 하나.
대마법사 시온 그레이스.
그녀가 자신을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약속’에 대한 건 어떻게 알았지? 지금은 그것에 대해 아는 자가 별로 없을 터인데. 지금의 모험가 길드에는 더더욱.”
갑작스레 등장한 시온의 물음에, 도진은 숨을 골랐다.
‘…여기서 시온이 등장한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시온 정도 되는 NPC는 한참 이후에나 등장해야 정상이다.
아무래도 5년 넘게 시간이 지난 후. 그것도 엘토마기아와 관련된 여러 퀘스트들이 해결된 이후에 발견됐던 히든 피스를 너무 빠르게 써먹으려다 보니 뭔가 꼬인 듯했다.
하지만 꼬였다고 해서 현재 상황이 도진 입장에서 나쁘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지금 이런 거물을 마주친 것 자체가 히든 피스지.’
시온 그레이스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만큼 거물이었다.
이런 기회를 얼굴도장 찍는 정도로 흘려보내는 건 너무 아쉬운 일.
도진은 자신이 지닌 미래 정보 중 시온과 관련된 정보를 끄집어냈다.
잘만 활용하면 갑자기 찾아온 이 상황을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당장 써먹을 수 있고, 시온 그레이스의 관심을 확 끌 떡밥은…….’
미래에 풀릴 전개에 대해 길게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시온 그레이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차원의 경계에 빠져 행방불명된 그녀의 옛 동료에 관한 에피소드였다.
운 좋게도 시온의 동료가 행방불명된 장소는 유저. 즉, 리제니안과도 관련이 있다.
“저는 리제니안입니다.”
“안다. 죽음을 허락받지 못한 이방인아.”
“그건 곧 제가 관문을 넘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는 것을 굳이 계속 언급할 필요는 없느니라.”
도진이 고개를 젓는다.
“필요합니다. 제가 그곳을 넘어오는 동안 당신의 옛 동료를 만났으니까요.”
“……!”
고양이의 눈이 커졌다.
움직임이 멎는다.
어쩌면 심장박동까지도.
대마법사임에도, 상상도 못 했다는 반응을 숨기지 못한다.
도진은 상대가 경악을 수습할 새도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속삭임을 들은 정도였지만요. 그것마저도 넘어오는 과정에서 많이 잊었고, 남아 있는 건 그 사람이 당신의 동료였다는 것과 리제니안인 제가 엘토마기아에 요구할 수 있는 특혜에 관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도진의 말을 시온이 끊었다.
고양이 눈을 날카롭게 좁힌 그녀가 물었다.
“녀석이 그렇게 된 건 내가 모험가 길드 녀석들과 그 약속을 나누기 전이다. 그런데 녀석이 그걸 네게 알려 줬다고?”
작은 고양이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마나가 일렁였다.
아무리 도진이 리제니안이라지만, 상대는 대마법사다.
그녀라면 리제니안의 영혼을 묶어 두어 부활 장소를 제한하는 게 가능했다.
리스폰 킬을 수도 없이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진은 엄청난 마나가 가시화되어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도 겁먹지 않았다.
이 정도 의심은 충분히 예상했고, 그에 대한 준비도 다 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잘린 말을 그대로 잇는 도진.
시온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당신에게 전하는 전언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녀의 눈은 날카로움을 잃었다.
“뭐라고……? 녀석이 내게 전언을?”
슬픈 눈으로 묻는 시온을 본 도진은 잠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전생의 전개에서는, 끝내 시온이 재회하지 못했던 그녀의 동료가 품고 있던 마음.
그걸 지금 대신 전한다고 해서 몹쓸 짓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곳에서도,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걸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해 주는 이야기들이 자신을 자신으로 남아 있게 해 주었다고.”
“……!”
시온은 몸이 떨렸다.
그리움과 죄책감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아서.
하염없이 차원의 경계 끝자락에 서서 흘려보내던, 차라리 일기에 가까운 넋두리들이었다.
혹시나 닿을까 하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으나… 마법사로서의 이성은 언제나 그럴 확률은 0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데 그 말들이 전해졌다니.
“다행이야.”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시온은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다 도진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달리 기억에 남은 말들은 없느냐? 어떤 것이라도 좋다.”
도진은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시온 그레이스의 동료가 남긴 마지막 말을 전했다.
“고맙고.”
고양이의 숨이.
“미안해.”
또 한 번 멎었다.
시온은 생각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그립고, 야속하고, 원망스럽고, 죄스럽고…….
그 오랜 세월 겪은 모든 감정들이 단 두 마디 말에 녹듯이 사라질 수가 있다니.
시온은 그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돌아가야겠어.’
더 머물다간, 까마득히 어린 것들 앞에서 추태를 보일 것만 같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오랜만에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쓰던 얼굴을 부러 떠올리며, 옛 기억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이방인을 처리해야지.’
다른 세계의 인간들을 용병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미 수많은 리제니안이 넘어온 지금이다.
그런 와중에 녀석과 접촉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고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싹수가 보이니 고른 것이겠지.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그리 생각하며 시온은 앞발로 허공을 건드렸다.
그러자 허공이 열리며 고급스런 나무 반지 하나가 나타나 도진에게 날아갔다.
“어떠한 문이든, 그 반지를 지니고서 열면 단 한 번 만리의 도서관으로 통하는 문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무얼.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을 가져온 객에게 이 정도야.”
말한 시온은 고양이의 입으로 슬쩍 웃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대마법사의 퇴장은 등장할 때만큼이나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도진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관계 형성!]
[엘토마기아의 마스터 시온 그레이스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시온 그레이스의 호감도가 10포인트 상승하여 10이 되었습니다.]
거물 NPC와의 관계 형성.
이것만으로도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의 폭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하는 유의미한 수확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시온의 호감도 10포인트라니.
이 정도면 시온과 관련된 퀘스트를 굵직한 에피소드 단위로 끝까지 밀어야 상승할 만큼 높은 수치였다.
물론 시온 그레이스는 앞으로도 꽤나 오래 은거를 유지할 테니 당장의 이득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나중에 시온급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할 시기에는 얘기가 달라지지.’
오늘만 게임할 것도 아니고. 나중에 돌아올 이득을 생각하면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였다.
도진은 손바닥 위의 반지를 보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저, 저기요!”
그때, 투명인간 이하로 전락했던 말단 마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그녀가 있다는 것도 잊고 있던 도진은 ‘아, 이 여자도 있었지’ 하고 생각하며 돌아봤다.
* * *
말단 마법사는 갑작스런 사태에 숨 쉬는 것도 잊었다.
고양이의 등장과 함께 온 세상을 구성하는 마나가 일제히 착 가라앉는 듯한 그 감각.
마법사로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어렴풋한 감각만으로 미천한 경지를 반걸음쯤 내디딜 깨달음을 얻을 정도로.
그래서 확신했다.
저 검은 고양이는 시온 그레이스다.
제국 마탑 엘토마기아의 시작이자 끝. 자신은 물론 엘토마기아의 모든 마법사들이 존경하다 못해 갈망하는 자.
마법사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대화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가 대화를 듣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도진이라는 남자의 입 모양을 읽어 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마법사는 이것이 시온 그레이스가 자연스레 두르고 다니는 인식 저해 마법의 작용임을 알 수 있었다.
숨 쉬듯 뿌려지는 고위 마법에 감탄하기도 잠시.
마법사는 호기심에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이 오가기에 이제 막 마법사 딱지를 붙인 자와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시는 걸까.
궁금하다. 궁금해 미칠 것만 같다.
‘저건……!’
그런 그녀의 궁금증은 도진에게 나무 반지가 주어질 때 정점을 찍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간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저 리제니안 분명 뭔가 있어.’
시온 그레이스와 모종의 연이 있음이 분명한 자다.
마법사는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추천장을 꺼내 남자의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도진.’
시온 그레이스 님과 뭔가가 있는 거 같은 리제니안.
‘절대 놓쳐선 안 돼.’
마법사의 이글거리는 눈이 도진에게 꽂히는 순간이었다.
“저, 저기요!”
* * *
“왜요?”
“방금 검은색 고양이. 시온 그레이스 님 맞죠……?”
방금 대화를 못 들은 건가? 의아해하면서도 도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저 여자, 왜 저렇게 숨이 거칠지? 입술은 왜 저렇게 잘근잘근 씹어 대고?
도진은 저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질 쳤다.
아무래도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역시 마법사 놈들 중에 정상인은 하나도 없다니까.’
도진은 동족혐오성 생각을 하며 최대한 빠르게 도망치려 했다.
괜히 더 머물다가는 마법사 특유의 광증이 옮을 것만 같았다.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파바박.
갑자기 뒤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방금 전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마법사가 무슨 악령에 빙의된 사람처럼 테이블을 넘어오는 게 아닌가.
그 기세가 워낙 엄청나고 기괴해서 도진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혹시 마법 스킬북 필요하지 않으세요? 제가 갚아야 할 돈이 있어서 두 권은 무리지만, 한 권은 드릴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통성명부터 하지 않을래요?”
어깨를 부여잡고 거의 온몸을 감싸다시피 들러붙은 마법사는 질문 같은 협박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마음 같아서는 그깟 1성 마법 스킬북 안 받는다고 칼같이 거절하고 튀고 싶었다.
하지만 입에서 흘러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염동」으로 부탁드립니다.”
관문을 나서면서 보상으로 받은 골드가 300골드인데 1성 마법 스킬북은 아무리 싸게 사도 150골드는 줘야 한다.
돈을 아끼려면 ‘스킬북’이 아닌 일반 마법서를 사서 익혀야 하는데… 이건 마법 하나를 배우는데 하루를 꼬박 써야 할 만큼 효율이 별로였다.
그러니 준다는 건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절대 희번덕대는 눈빛에 쫄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도진은 스킬북을 건네받았고, 아주 조금 얌전해진 마법사가 이름을 밝혔다.
“저는 가장 위대한 마탑, 엘토마기아의 황색위(黃色位). 시살라 오멘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게 웬걸.
‘시살라 오멘……? 잠깐 오멘이면……?’
상대가 미래의 제작 마법 거장이자 오멘 마법공방 사장이 될 시살라 오멘이었다.
네임드급 등장인물과의 관계 형성 및 호감도 상승.
성장에 박차를 가할 히든 피스 ‘만리서고 입장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달달한데.
말단 마법사 겸 엑스트라 겸 악령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 오멘 마법공방 사장(진) 시살라 오멘이었다니.
달다. 너무 달다.
이러다 당뇨에 걸리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물론 이런 당뇨라면, 도진은 수천 번 걸려 줄 의향이 있었다.
미친놈이면 어떻고, 미친년이면 어떤가.
돈 되고 쓸모 있으면 그만이지.
“도진이라고 합니다.”
도진은 돈줄, 아니 시살라 오멘에게 악수를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