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91권 05화
나는 눈앞의 선택창을 보며 생각했다.
‘안 돼…… 내가 과거를 바꾼다는 선택이 도대체 얼마나 큰 파장으로 되돌아올지 감도 잡히지 않아!’
그동안 전생하며 수많은 모험을 겪었던 나는 알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선택의 차이만으로 뒤에 전개될 상황은 극단적으로 차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심지어 그 선택이 필연적이면 필연적일수록 그 변화는 더욱 막대하게 변화하기에 그 무수한 파생(派生)의 가능성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외신의 시련에서 [바꾼다]는 선택은 실패를 동반할 확률이 높았다. 설령 외신이 별 상관없다 했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뒤에 있던 미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그 미호와 눈이 마주친 나는 마음속이 크게 일렁이는 걸 느꼈다.
정말 미호다.
그 당시의 미호다.
내가 지켜주지 못하고, 죽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
속이 울렁인다. 머리로는 이건 과거일 뿐이니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현재 전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에 미호가 자신을 희생해서 풍탄을 막아준다는 것을. 그리고 풍탄에 당해서 비참하게 죽은 미호의 마지막 모습까지 갑자기 생생하게 기억났다.
…… 정말로 바꾸면 안 되는 걸까?
나는 과거를 바꾸면 안 되는 것인가?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치지직…… 치지지직
눈앞에 있던 선택창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그 윤곽과 글자 모두가 빠르게 희미해지며 기이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앗!!”
나는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바꾸지 않는다]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 순간 선택창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선택에 제한 시간 같은 게 있었던 건가……?!’
내가 당혹해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죽어라!!”
후와아악……!!
용비천이 만들어낸 수십장 크기의 거대한 풍탄(風彈)이 내게 직격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고, 그와 동시에 내 뒤편에 있던 미호가 풍탄 앞으로 뛰어들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풍탄이 날아오는 전방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멸혼보(滅魂步)
콰과과광!!
“아앗……!!”
“저런!!”
뒤편에서 미호와 서산대사, 유정의 비명 소리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날아오는 풍탄을 피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정면으로 들이받았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폭음이 울리며 잠시동안 폭발음과 진동이 장내를 울렸다.
쿠구구구…….
“아, 손 따갑네.”
그러나 나는 연기 속에서 멀쩡히 살아서 걸어 나왔다. 애초에 다치지도 않았던 것이다.
“…….”
“……?”
그러자 등 뒤에 있던 일행들은 물론이고 내게 풍탄을 날렸던 용비천조차 크게 놀랐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당황했다. 용비천은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나를 보고 부들부들 떨더니 외쳤다.
“뭣이?! 너 따위가 어떻게 내가 전력을 다한 공격을……!!”
“…….”
나는 용비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호신강기 썼는데…….’
원래 용비천 정도 되는 고수가 날리는 풍탄을 호신강기만으로 막는 건 불가능하다. 강호에 극히 일부의 초절정고수들이 호신강기를 쓰곤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의 강기가 치명상을 입히는 걸 막는 용도였으며 상대의 절기를 정면으로 막을 정도의 위력은 없다시피 했던 것이었다. 예외라면 백련교의 교주와 호법사자 정도였는데 그들은 내공이 막대하여 호신강기에 비효율적일 정도의 막대한 내공을 퍼부어서 강대한 방어력을 얻는 게 가능했다. 상식적이라면 용비천의 공격을 뇌신류의 절초로 막거나 피해야 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방금 전 그냥 내공을 돋우어서 호신강기를 간단하게 펼쳤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용비천의 공격은 마치 손 앞에서 풍선이 터진 정도의 따끔함밖에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기운의 일부만 끌어냈을 뿐인지라 조금만 더 집중했으면 그 따끔함조차 느끼지 않았으리라.
‘아니 그딴 것보다…… 이거 설마 역사를 바꾸는 걸 선택해 버린 건가? 제 시간 내에 내가 안 바꾼다는 선택을 하지 않아서……?’
그러면 이미 외신과의 내기에서 지는 선택을 해버렸단 말인가?!
나는 적지 않게 고민이 되어서 끙끙거렸다.
“이런 젠장…… 큰일 났군…….”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자 용비천은 갑자기 득의양양해져서 전신에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비장의 한 수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제 남은 수가 없나 보군! 깜짝 놀랐잖느냐 애송이……!!”
“…….”
“보아라. 나는 잠깐만 쉬어도 무한의 내공을 다시 회복한다!”
쿠구구
용비천의 양쪽 팔에 다시금 거대한 기운이 맺혔다. 명백히 풍신류의 강기(罡氣)를 잔뜩 머금고 있는 그 위용은 보통 무림인이라면 그저 회전에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박살 나는 위력을 갖고 있을 것이리라. 용비천의 눈에서 흉광이 일렁였다.
“이번엔 확실하게 끝장내 주마!”
저건 뭐였더라? 기술 이름이…….
‘에이 몰라.’
풍신류 무공에 대해서도 잔뜩 배웠던 것 같지만 세월이 꽤 지나면서 많이 까먹어 버렸다. 용비천 따위가 쓰는 무공이 뭔지 알게 뭐란 말인가?
“끝장이라고?”
나는 고개를 털면서 주먹을 꽈득 하고 붙잡으며 소리를 내었다.
“참나…… 지금 판이 엎어진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예전 빚을 갚아주마.”
계속 당황하고 있기만 하는 것도 좀 그렇다.
꼴보기 싫은 얼굴이 눈앞에 있으니 내 속풀이를 하는 게 나으리라.
용비천이 비릿하게 나를 비웃었다.
“크하하…… 빚을 갚아주겠다고? 운이 좋아서 내 공격을 한 번 막아낸 주제에 허세가 심하구나!”
“이렇게 하는 거였나?”
슈슈슉!
다음 순간, 나는 손에서 강기를 치솟게 하여 검형(劍形)을 만들어내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용비천을 겨누었는데, 내 자세를 본 용비천이 흠칫하고 당황했다.
“접도난무(蝶刀亂舞)의 세(勢)? 어떻게 네가 그걸…….”
그렇다. 내가 지금 잡은 것은 풍신류의 도법 중에서도 직계에게만 전승되는 최상승의 도법인 접도난무의 자세!
‘풍신류 고수들에게 배우기도 했고 전뇌자가 전승해준 자료에 있기도 했고…… 근데 이런 거 설명해봐야 뭐하겠어.’
사실 접도난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만든 검형이 사신검형(四神劍形) 중에서 풍신검형(風神劍形)이라서 풍신류의 용비천이 어떤 초식을 펼치든 전부 쉽게 파훼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내가 수련세계에 있는 동안에 이런 도법도 틈틈이 연마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용비천한테 그런 걸 설명해줄 이유가 없다.
그냥 때려잡자.
삼보절기(三步絶技)
나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용비천을 족치기 위해 전방으로 돌진했다. 단 일 보(一步)만으로 나는 단숨에 용비천의 코앞에 당도했고, 이보(二步)에서는 올려베기로 접도난무(蝶刀亂舞)를 개시(開始)했다. 한번 펼쳐지면 마치 나비가 나는 듯 현란한 도법 때문에 상대가 대항조차 하지 못하는 극환(極幻)의 도법이 바로 접도난무였기에, 용비천은 자기 코앞에서 접도난무가 펼쳐지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콰광!!
일순간 용비천이 방어하려고 내린 수강(手罡)이 접도난무의 도로(刀路)에 부딪히며 폭음이 울렸다. 용비천은 무한의 내공을 믿고 도법을 밀어내려고 자신의 손을 쭉 미는 듯했는데 나는 그 순간 씩 하고 웃으며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삼보절기의 마지막 삼보(三步)의 조화가 상대방의 허점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순간에 내가 초식을 꽂아 넣기 쉽게끔 만들었다.
필살절초(必殺絶招)
접도십육난무(蝶刀十六亂舞)!
퍼퍼퍼퍽!
나는 용비천의 모든 방어초식을 무시하고 단숨에 그의 전신을 난도질할 수 있었다.
“크아악!”
용비천은 삽시간에 몸 여기저기에 열여섯 개의 참흔(斬痕)이 생겨나서 비명을 질렀는데 잠시 후 크게 낭패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왜냐하면 내가 치명적인 급소를 모조리 베어 버릴 수 있었기에 전신이 토막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몸에 스친자국만 남았기 때문이리라.
치리링
나는 수강으로 만들어낸 검형(劍形)을 거두며 히죽 웃었다.
“접도난무가 아니라 투명호접도(透明胡蝶刀)를 썼으면 넌 이미 죽었다.”
“……!!”
뭐 사실 옥좌의 파수병이 쓰는 기술이라서 내가 쓸 수 없긴 하지만 한 번 이런 말을 해보고 싶었다!
사실 방금 전에도 접도십육난무로 한방에 끝낼 수 있었지만, 일부러 봐줬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연기한 셈이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경악하는 용비천에게 말했다.
“네가 자랑하는 분신술이나 써 볼래? 쓰고 싶은 기술은 다 써봐야 죽기 전에 후회가 없을 것 같은데.”
“이…… 이런 건방진 놈……!! 크아악!”
용비천은 내게 압도적으로 밀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잠시 후 내공을 크게 끌어올리고는 대량으로 분신을 만들어내었다.
슈슈슉!!
무려 열두 명이나 되는 분신을 만들어낸 용비천은 눈에서 혈광(血光)을 흘리며 외쳤다.
“어떻게 우리 풍신류의 도법을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진심으로 나서는 이상 너는 죽은 목숨이다!!”
“흐으으음!!”
“죽어라!”
파앗
나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용비천의 열두 분신을 보며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렇게 보니까 정말……!!’
나는 이윽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마음을 외쳤다.
“너 진짜 개허접이구나!!”
“뭣……?!”
퍼버버벅!!
콰광
잠시 후 용비천의 분신들의 합공이 단숨에 내게 틀어박혔다. 수십 번의 권격과 각법이 내게 꽂히고 더러 도법으로 나를 베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맞기만 했다.
이딴 건 피할 필요도 없다!
콰과광
퍼버벅
그렇게 용비천의 본체와 그의 분신들은 무려 일각이 넘는 시간동안 나를 패고 패고 또 팼다. 그러나 본체까지 합세해서 나를 패는데도 나는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채 계속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이윽고 용비천은 아연실색해서 뒤로 물러섰다.
“아…… 아…… 아니?!”
“…….”
“저…… 전설의…… 금강불괴…….”
용비천이 입술을 달달 떨면서 말하자 나는 호통을 쳤다.
“아니야 등신아!! 그냥 호신강기 썼어!!”
“……?!”
당연한 것이었다. 내공만으로 치면 말 그대로 [무한]이라 할 수 있는 호법사자가 나보다 위였지만, 내 내공 또한 무진장에 가까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호법사자도 인간이기에 한 번에 뽑아 쓸 수 있는 내공의 양은 정해져 있었는데, 나는 오랜 수련과 경지개척으로 그 내공의 출력과 폭발력이 용비천보다 최소 몇 배 이상 많았다. 게다가 의념도 쓸 수 있으니 타격의 순간 상대의 힘을 최소화시키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즉, 용비천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호신강기를 뚫고 한 방 제대로 먹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소리! 내가 대놓고 죽어주려 하지 않는 이상 나는 하품하면서 용비천을 때려죽이는 게 가능했다.
물론 백련교주가 이런 식으로 때린다면 나도 막거나 피할 필요가 있겠지만 사실 백련교주와 용비천의 수준 차이가 너무 커서 논할 필요도 없었다.
‘대체 이게 뭐냐고……?’
나는 용비천이 생각보다 너무 약했기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사실 트리무르티나 흑웅, 신력, 카발라, 천계의 술법, 보패, 사대신기, 신역의 무공처럼 내가 진짜로 장기로 삼는 능력들은 아예 쓰지도 않았고 그냥 인간세상의 무공만으로 상대해 줬는데도 용비천은 터무니없이 약했다.
‘정말 내가 이런 허접한 놈한테 그렇게 처참하게 당했다는 말인가?’
전생하면서 용비천과 싸워보기도 하고 점차 내가 실력이 늘고 있다는 걸 실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주변에 강자들이 들끓었기에 그걸 크게 체감하지는 못했는데, 막상 용비천과 제대로 싸워 보니까 알 수가 있었다.
내가 너무 강하다.
아니, 너무 강해져 버렸다.
“진지하게 상대하는 게 바보같군.”
나는 그만 맥이 빠져서 머리카락을 한움큼 뽑아서는 훅 하고 불었다.
퍼벙
그리고 그 순간 단숨에 36명 이상의 분신이 생겨났다. 수보리가 가르쳐준 분신술이었고 위력은 당연히 용비천이 쓰는 기의 분신 따위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불러낸 분신들에게 말했다.
“저거 패. 죽이지는 말고.”
그러자 분신들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싫어.”
“니가 패.”
“왜 우리한테 시켜?”
크윽…… 용비천보다 이 자식들이 더 짜증나는데?
나는 분신들을 구슬리듯이 말했다.
“솔직히 패면 기분 좋게 생기지 않았냐?”
“흐음…….”
“그렇긴 한데.”
분신들이 용비천을 가늠하듯 말똥말똥 쳐다보자 용비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신 중 하나에게 뛰어들었다.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분신은 본체보다 크게 약한 법!! 나를 너무 얕보았구나!”
콰앙
용비천이 거대한 힘을 쏟은 풍신류의 절초로 분신 하나를 타격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땅거죽이 솟아오르며 폭음이 울려 퍼졌지만 그 순간 내 분신은 안광을 짙게 흘리더니 단숨에 멸혼보를 써서 용비천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뇌신류 정권을 내질렀다.
꽈광!
“크헉!!”
등 뒤를 제대로 얻어맞은 용비천이 입에서 피 화살을 내뿜으며 전방으로 날아갔고 내 분신은 그런 용비천을 따라가듯이 초상비의 경공을 쓰며 뇌신류의 권각술으로 용비천을 패기 시작했다.
슈웅
콰과과광
퍼벅!
용비천이 초수를 받아내며 반격하고 있었지만 내 분신이 훨씬 기술로도 우위인지 용비천은 계속 공중에서 후드려맞고 있었다. 용비천이 10대 맞을 때 분신이 1대 반격을 당했는데 그나마도 전부 타격을 흘리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흠…… 용비천한테 반격을 허용하다니. 분신이 나보다 약하긴 약하군.’
아마 신역의 무공을 못 써서 그런 거겠지? 신역의 경지라면 반격을 허용할 리가 없으니까.
“본체보다 약해서 미안하구만! 그래도 너보단 세니까…….”
용비천의 얼굴에 타박상이 꽤 많이 새겨져서 그의 몸이 후들거리기 시작할 때 내 분신은 그의 뺨을 세게 한 번 후렸다.
“까불지 마라!”
“크학……!!”
퍼벅!
용비천의 이빨이 두 개 뽑혀나가자 내 분신이 용비천의 멱살을 잡고는 분신들이 모여 있는 한가운데에 던졌다.
“작살을 내자고!”
“가자!”
“이 건방진 새끼.”
퍼버버벅
콰직
콰광
잠시 후 서른 여섯 명의 합공에 맞은 용비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초죽음이 되어서 피칠갑이 되어 기절하고 말았다. 나는 용비천을 제압하자 분신들을 회수하며 생각했다.
‘참나. 내 분신보다 약할 줄이야…….’
물론 미리 패놔서 힘을 빼놓긴 했지만 그런 걸 감안하고도 설마 분신 하나도 감당 못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수보리의 분신술이 굉장히 뛰어나기도 했지만 이미 내 적수라기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약하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실컷 용비천을 갖고 놀며 분풀이를 하자 꽤나 기분이 좋음을 느꼈다.
그러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다음생에 가서 용비천한테 복수하려 한 적도 있었지만 왠지 의미없는 것 같아서 늘 망설였는데……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한 거였나.’
아무것도 모르는 놈한테 은원을 갚겠다고 들이대봐야 사실 마음속 한 곳은 늘 허망함을 느낀다.
그 허망함을 이겨내고 제대로 된 앙갚음을 한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나는 진정한 복수의 희열감이라는 걸 느끼자 손발이 덜덜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짜악
나는 기절한 용비천의 뺨을 때려서 깨우고는 말했다.
“용비천. 살고 싶으냐?”
“허…… 으으…… 예…… 제발…… 살려주십시오…… 고인을 몰라봤습니다…….”
용비천은 이제야 주제파악을 한 듯 눈물을 흘리며 내게 빌기 시작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못 이긴다는 걸 비로소 인정한 듯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난 살려줄거야. 하지만 미호는 어떨지 모르겠군.”
“네?…… 허억!”
퍼억!
내가 곧장 용비천의 단전을 쳐서 박살 내자 그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단전을 깨봤자 잠시 후면 회복하겠지만 이로써 잠깐 동안 용비천은 내공을 못 쓰는 무능력자가 된 것이다. 내가 미호에게 축 늘어진 용비천을 대령하자 미호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는 곧장 손톱의 날을 세워서 용비천의 내장을 후벼팠다.
푸콱……!!
“끄아아악.”
잠시 후 용비천은 산 채로 간을 뜯겨서 죽고 말았다. 미호는 용비천의 간을 한 손에 들고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것이냐? 지금의 너는 마치 천신과도 같은 힘을 가졌구나.”
“천신이라…….”
아마 그 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에서 천신 같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그 말을 되뇌이다가 미호에게 말했다.
“미호. 내가 너와 함께하면 좋겠어?”
미호는 내 말이 뜻밖인지 잠시 눈을 끔벅거리다가 말했다.
“당연하지!! 안 그럴 이유가 있느냐?”
“미호…….”
나는 미호를 사랑한다.
지금 이대로 역사가 흘러간다면…… 나는 미호와 맺어지고 나아가 세상의 패자가 되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눈에 보일 듯이 행복이 코 앞에 있다.
“…….”
나는 잠시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는…… 바꾸지 않을 거야.”
***
파앗!!
다음 순간, 나는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냉막한 표정의 외신 알 카르다흐가 앉아 있었고, 그의 시선은 처음으로 바둑판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알 카르다흐가 입을 열었다.
“편의주의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을 의심한 것인가?”
“…….”
역시…….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알 카르다흐를 노려보았다.
“역시 저를 속이려 하셨군요. 이미 선택이 실패한 것처럼…… 그렇게 꾸며서 내가 과거를 바꾸는 선택에 순응하도록.”
“허나 속지 않았더군.”
타악
그렇게 대꾸한 알 카르다흐가 다음 수를 착수하자, 나는 아까처럼 다시금 역사가 머릿속에서 반추되는 기괴한 느낌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지 이상반응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알 카르다흐에게 말했다.
“왜 저를 기만하려 하십니까? 이러면 공정한 내기가 아니잖습니까!”
“세상에 진정으로 공정한 것은 어디에도 없지. 언제나 그러한 이치를 느끼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건……!!”
나는 성을 내려다가 무의미함을 깨닫고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하긴 환상 같은 건 많이 보아왔으니 한두 번 속는 것도 아니군요. 외신쯤 되는 분이 설마 환영 같은 찌질한 수를 쓸 줄은 몰랐지만.”
“환상이 아니다.”
“환상이 아니면 실제였다고 하실 셈입니까?”
“그렇다. 너는 실제로 그 과거에서 힘을 휘두르고 온 것이지. 단지 그게 역사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
“…….”
그런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방금 전에 용비천을 패고 왔단 말인가?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알 카르다흐가 말했다.
“기분 좋지 않던가?”
“뭐가 말입니까.”
“필멸자 따위가 상상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으로 유린하는 것…… 그 쾌감을 진정으로 느껴본 소감이 어떤가.”
“…….”
“이제 조금은 네가 [옛 지배자]라고 부르는 자들을 이해하지 않았나 싶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요.”
잠시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다.
“다음 수를 둬라.”
알 카르다흐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향했다.
“나는 너의 내면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고 싶으니까.”
알 카르다흐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착수했다.
더 이상 나도 망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딴 대국…… 빨리 끝내버린다!’
너무 오래 끌면 내 정신력이 고갈될 거야!
타악
그리고 돌을 놓자마자 나는 주변의 풍경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
[그대들은 꼼수를 썼군요.]
구천현녀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내 옆에는 신공표, 제천대성, 제갈부가 서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를 알 수 있었다.
‘칠요의 시련…….’
그 마지막, 일요(日曜)의 시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