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91권 04화
나는 상대방의 말에 비몽사몽한 가운데에서도 기억을 되살렸다.
‘알 카르다흐……?’
어디서 들어봤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아…… 그때…….
‘……외신(外神)!!’
허공록의 사서!!
선지자 종족이 섬기는 진정한 신(神)!
나는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엄청난 수마(垂魔)가 갑자기 확 날아가는 기분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외신이 눈앞에 있다면 그것 또한 절대적인 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뻣뻣이 굳어 있자 자신을 알 카르다흐라고 밝힌, 선지자의 모습을 한 존재가 말했다.
“말하지 마라.”
…… 어?
말하지 말라고?
내가 멍하니 있자 알 카르다흐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청흑(靑黑)색 머리카락을 지닌 인간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그의 복식은 중원의 무림인과 같아 보였다. 색목인처럼 생긴 외양에 중원의 옷이라니 무척 어색했지만 묘하게 그는 왠지 실제로 존재할 법한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으로 변한 알 카르다흐는 커피를 홀짝 마시고는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어떤 대화를 할지는 정해져 있으니까.”
“……네?”
“말하지 말라 해도 말하는군.”
“……헉!!”
나는 외신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생각에 움찔하고 놀라고 말았다.
나 정말 바보짓 한 건가?!
하지만 의외로 외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커피의 향을 그윽하게 음미하는 듯했다.
“이렇게 될 것 같았지. 말하지 말라고 해도 말하는 게 정해진 기록이니까.”
“…….”
“내 권능으로 이 운명을 거스를 수도 있었지만 거스르지 않았다. 무척 사소한 흐름이기에.”
알 카르다흐의 화법은 무척 묘했다.
마치 우리가 나눌 대화가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태도!
‘에잇…… 본인이 신경 쓰지 않는데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금기를 한번어기나 두 번어기나 마찬가지야!
나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알 카르다흐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대화를 어떻게 할지 이미 다 정해져 있고 당신은 그걸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정확하군. 그 말대로다. 우리가 하게 될 대화는 정해져 있지.”
나는 그 말에 괜히 어깃장을 놓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아무 말이나 했다.
“망량 평소에 내가 당신한테 가장 유감이었던 건 삼계탕을 먹을 때 꼭 고려인삼을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오!”
어떠냐!
망량의 닭 취향에 대한 유감을 표출했다!
지금 이 순간 이런 말을 할지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외신!
…….
…….
유쾌하지 못한 정적이 맴돌았다. 알 카르다흐는 나를 무시하고 계속 커피나 마시고 있었고 나는 뻘쭘해서 가만히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
…… 그러고 보니 이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너무 바보짓을 한 것 같은 느낌에 머쓱해져 있을 때 알 카르다흐가 말했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까봐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어…… 그렇군요…….”
왜 이렇게 설득력이 있지…….
왠지 스승에게 혼이 난 듯한 기분에 계속 어색함을 눌러참고 있을 때 문득 알 카르다흐가 말했다.
“이제 잠은 깼나?”
“아……!!”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 마구 몰아치고 있던 수마가 상당히 사라진 것 같았다. 졸음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가능할 정도는 된 것 같다. 내가 신기해하고 있자 알 카르다흐가 말했다.
“네 안에 있던 봉인을 풀어 이제야 혼돈의 기운이 발현했다. 비로소 대화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겠군.”
“무…… 무슨 말씀이신지.”
“불확정성.”
알 카르다흐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커피를 홀짝 하고 마셨다.
“네가 그 소양을 갖추지 못하는 한 너는 벌레 미만이니 대화할 가치를 느낄 수 없다. 허나 지금은 조금이지만 너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으니 대화를 할 수도 있겠군.”
무슨 말이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나는 알 카르다흐의 말이 알쏭달쏭해서 영 알 수가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알 카르다흐는 이제 나와 대화를 해줄 거라는 사실.
나는 이제는 바보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이유가 뭡니까?”
상대가 외신인가 아닌가 의심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런 곳에서 외신을 사칭하는 존재가 있을 리가 없으며 있다 한들 지금의 나로서는 상대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신력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런 만큼 도저히 얼마나 위대한 자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자 알 카르다흐가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해져서 확인하고 싶었다.”
“선택이라니요?”
“아직 달라지는 건 없군. 하지만 끝까지 지켜보면 또다시 그자가 장난질을 치겠지.”
“……?”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외신이라서 그런지 그의 말은 하나같이 수수께끼 같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뭐라도 따지고 싶었지만, 경험상 이런 자에게 뭘 따져봤자 아무것도 얘기 안 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포기하고는 말했다.
“확인하셨다니 잘 됐군요. 이제 저를 밖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안 돼.”
“……안 된다니요? 저를 여기 가둬두실 생각입니까?”
내가 불안해하며 반문하자 알 카르다흐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섰다.
“글쎄.”
그러고는 커피잔을 든 채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말도 없이 걷고 있던 알 카르다흐가 차분히 말했다.
“무신(武神)에 이르는 연기(緣起)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고 싶군.”
“네?”
“너와 나의 지표에 무엇을 기록할지 결정했다.”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던 알 카르다흐가 자신의 손을 앞으로 뻗었고, 그와 동시에 내가 앉아 있던 탁자가 통째로 무언가로 뒤바뀌었다.
펑
나는 탁자의 바뀐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다.
“이건?!”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알 카르다흐는 내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그러고는 돌이 들어있는 통을 만지작거렸다.
찰그락
그 익숙한 소리.
“홀짝을 골라라. 맞추면 네가 흑(黑)을 잡는다.”
이윽고 그렇게 말한 알 카르다흐가 돌을 한주먹 쥐어서는 판 위에 올렸고, 나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알 카르다흐의 주먹 쥔 손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나직이 말했다.
“홀수입니다.”
촤악
이윽고 판 위에 흑(黑)의 돌이 풀려났고, 나는 빠르게 판 위에 있는 돌의 갯수를 확인했다.
‘7개.’
맞췄다…….
그러자 알 카르다흐는 조용히 자신의 흑색 돌이 든 통을 내 쪽으로 건네주었고, 나는 반대로 내 쪽에 있던 하얀 돌이 담긴 통을 알 카르다흐에게 주었다.
찰그락 찰그락
나는 알 카르다흐가 돌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알 카르다흐에게 말했다.
“저기……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해라.”
“왜…… 우리가…… 바둑(棋)을 두는 것이죠?”
그렇다.
아무리 봐도 이 가로세로의 선이 죽죽 그어져 있고 흑백의 돌으로 선후를 가리는 이 놀이는…… 바둑!
내가 알기로는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설마 여기서 외신이 바둑을 두자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질문하자, 알 카르다흐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바둑 둘 줄 모르는가?”
“아, 아뇨. 적당히 둘 줄은 아는데…….”
모르지는 않는다. 화신류의 한진성과도 둬 본 적이 있었고 사실 평범하게 취미 생활 하는 사람 정도로는 둘 줄 안다. 하지만 결코 잘 둔다고는 할 수 없었으며 사실 전생하면서 바둑을 열심히 둘 일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 카르다흐의 말에 급히 대꾸하자 알 카르다흐는 돌을 만지작거렸다.
찰그락…….
“이 바둑은 전생연기(轉生連棋)라고 이름붙였다.”
“전생연기요?”
“네가 이 전생연기에서 나를 상대로 불계패(不計敗)를 당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이대로 놓아주겠다. [기록]에 침입한 불경(不敬)을 모두 용서해 주지.”
불계패.
그것은 바둑의 규칙이었다. 더 이상 계산할 것도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패배해서 스스로 돌을 던질 수밖에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패배를 의미했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리에 떠올리며 반문했다.
“……만일 불계패를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
알 카르다흐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츠쿠요미의 가면을 썼는데 네가 여기로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네? 그건…….”
“츠쿠요미의 [기록] 또한 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생자(轉生者)가 어떤 여정을 거쳐왔는지 모조리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 기록의 인과에 이끌려 [기록] 내부로 소환되었다.”
“……!!”
뭐, 뭐라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역대 전생자의 삶의 기록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알 카르다흐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나에게 불계패를 당한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봐주지 않고 곧장 이 서고(書庫)의 기록으로서 박제할 생각이다.”
“……?!”
“너의 전생여정은 끝날 터이니, 네가 두려워하는 반고에 의한 소멸과 크게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이, 이런 젠장……!!
이러나저러나 외신한테 죽을 운명이라고?!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는 문득 화가 나서 외쳤다.
“아, 아니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소멸시킨다니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지금 이 순간도 특혜라는 걸 모르는군.”
“특혜요?”
“네가 아닌 다른 전생자였다면 이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곧장 박제했을 것이다. 그 목걸이와 권능…… 네가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하고 있기에 나로서는 집행유예에 가까운 처분을 한 것이니.”
“…….”
“두기 싫다면 이야기하라.”
씨, 씨발……!! 이렇게까지 겁박해놓고 누가 거부할 수 있겠냐고!
죽든가 살든가 어찌 되었든 도전할 수밖에 없도록 해놓고!
순간 나는 오기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고는 도리어 담대해져서 알 카르다흐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제가 너무 밑지니까 제가 이겼을 때의 조건을 좀 더 추가하지요!”
“조건?”
“네. 여기를 나갈 때 제가 반고를 피해서 다음 전생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주시지요!”
“그러지. 또 있나?”
“어…….”
뜻밖에 알 카르다흐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되레 내가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외신끼리의 충돌이라서 망설일 줄 알았는데 그는 힘든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 그리고 좀 봐주십쇼! 여태 바둑을 거의 손도 안댔는 데 갑자기 바둑이라니 너무 뜬금없잖습니까!”
“알았다. 봐 주지.”
“네? 정말입니까?”
“어차피 두기 시작하면 네 걱정이 의미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전생연기는 네가 아는 바둑과는 다를 테니까.”
“……?”
바둑이 바둑이지 대체 뭐길래 그러지?
설마 돌을 두면 칼이라도 바닥에서 튀어 나오는 건가?
나는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윽고 돌을 잡으며 호쾌하게 첫 수를 두었다.
“그럼 갑니다!”
타악
내 흑돌은 정확히 천원(天元), 바둑판의 한가운데에 놓여졌다.
‘바둑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기를 두면 바둑고수들도 놀라더라고!’
뭔가 좋은 수니까 놀란 거였겠지!
찰그락…….
타악
그리고 내 천원의 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알 카르다흐가 이윽고 평범하게 우상(右上)귀의 화점(花點)에 착수했다. 화점이란 4번째 줄이 교차하는 귀퉁이에 있는 곳이었고 바둑을 둘 때 초반에 가장 많이 놓는 곳이었다.
‘평범한 대국이 될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알 카르다흐의 맞은편에 있는 좌하(左下)의 귀퉁이 화점에 돌을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
뭐, 뭐야?
왜 갑자기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내가 완전히 엉뚱한 장소에……?!
그리고 변화한 시공간에서 나는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악인보다 더욱 가혹하게 처벌되는 게 바로 반역자이지. 전생자에게 반역했으니 각오는 되었소.”
눈앞에는 외우주의 제갈현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화요의 칼날을 그의 목에 갖다 대고 있었다.
……?!
서, 설마…… 여기는…….
’내가 경악하고 있을 때 내 눈앞에는 기묘한 선택지가 생겨나 있었다.
[역사를 바꾼다 / 바꾸지 않는다 ]
……!!
나는 나도 모르게 후자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걸 마음속으로 선택한 순간, 나는 어느 새 착수(着手)하고 있었다.
타악!!
“…….”
나는 돌을 놓았음에도 손가락을 떼지 못하고 전신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외우주의 제갈현이 있었던 그 공간이 거짓말처럼, 다시금 알 카르다흐와 대국을 하고 있던 공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내가 손가락으로 돌을 꾹 누르고 있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알 카르다흐가 말했다.
“첫 선택은 질서적 성향이군. 기록되어 있는 역사를 바꾸지 않았는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알 카르다흐를 쳐다보았다.
“무, 무슨 소립니까. 방금 보았던 그 환영이…… 설마…….”
“환영이 아니다. 그건 실제 기록되어 있는 과거로 잠시동안 갔던 것이다.”
“……?!”
“이것이 전생연기.”
알 카르다흐는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바둑판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는 냉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바둑에서 착수할 때마다 과거의 한 순간으로 무작위로 되돌아가 역사를 바꿀 권리를 얻는다. 반대로 내가 착수할 때는…….”
차르륵…….
잠시 바둑알을 매만지던 알 카르다흐가 정갈하게 한 수를 놓았다.
타악.
“방금 전의 네 선택을 현실로 바꾸어 주지.”
후와악!!
갑자기 내 전신이 뒤집어지는 듯한 역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내 30번에 이르는 전생을 한번 다 순식간에 반추해본 듯한 기괴한 느낌이었다.
‘우욱……!!’
이거 피곤해!!
내가 어질어질해서 옆에 있던 의자 손잡이를 꾹 잡자 알 카르다흐의 말이 이어졌다.
“역사를 개변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정신이 피로감을 느끼는 정도일 것이다.”
나는 알 카르다흐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중얼거렸다.
“……만일 역사를 바꾼다면, 실제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 자신도 바뀐다는 겁니까?”
“그렇다. 제갈현을 만난 시점부터 바뀐 미래가 적용되어 있겠지.”
“…….”
믿겨지지가 않는다. 이건 그 자체로 [큰 굴레]를 무시하고 모든 전생자의 과거사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옛 지배자]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상식을 초월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일개 바둑놀이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내가 겪은 건 전부 환영이 아닌 현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실감이 났다.
‘이게…… 외신 알 카르다흐…….’
고작 바둑으로 전생자의 모든 역사를 농락할 수도 있는…… 허공록의 사서!
나는 그 무시무시함에 치를 떨었지만 동시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말했다.
“도…… 도대체 이런 이상한 짓을 왜 하는 겁니까? 죽이려면 그냥 죽이시지 왜 이런 식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바둑을 두게 시키는 거지요?”
“궁금하다.”
알 카르다흐는 여전히 내가 아닌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너는 네 인생의 모든 순간에 후회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가?”
“……!!”
“참고로 네가 역사를 바꾸느냐 아니냐는 이 바둑의 승패와는 큰 관련이 없다. 그저 네가 어떤 전생자인지를 알고 싶다.”
“…….”
나는 알 카르다흐의 말을 듣다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저를 기만하시는군요. 제가 살아온 역사가 바뀌면 저라는 인간 또한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될 텐데…… 그런 제가 과연 저 자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네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군.”
“뭐라고요?”
이어진 알 카르다흐의 말에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전생하면서 너 때문에 변한 기존 역사의 등장인물들은 본래의 그들 자신이라 할 수 있는가?”
“…….”
“이건 네가 전생하며 만들어냈던 나비효과를 너 자신이 겪어보는 과정에 불과하다.”
제기랄……!!
나는 뭐라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분했다. 하지만 눈앞의 외신이 정작 나와의 바둑에서 승패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챘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를 개변하는 게 대국의 승패에는 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잘만 선택한다면……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수정하면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건가?’
과거의…….
’잘못된 선택…….
잘그락…….
잘그락…….
침묵과 고요가 대국장에 감돌았다. 내가 둘 차례였지만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돌만 계속 매만지고 있었다.
어느 새 내 마음에는 격랑(激浪)이 일어나고 있었다.
‘……외우주의 제갈현을 베었던 사건은…… 안타까웠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리 중대한 사건이 아니었다. 먼저 배신한 건 제갈현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내게 후회를 가져다 줄 만한 중대한 사건도 따로 있었다.
만일에 대국 중에 그 중대한 사건을 맞닥뜨린다면……?
“…….”
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뭔가 정보라도 얻을 양으로 알 카르다흐에게 질문했다.
“혹시…… 전생연기를 둔 전생자는 제가 처음입니까?”
“아니.”
“그럼…….”
“이 대국에서 네가 이긴다면 알려주겠다.”
아무래도 모든 걸 친절히 말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후 마음을 굳히고는 천천히 돌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바둑의 법칙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닐 거야.’
승패에 별 상관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정말로 별 상관없는데도 이런 기괴한 현상을 일으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외신도 자기 이득에 따라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존재야…….’
아마 어떤 식으로든 과거를 바꾸는 행위는 진행되는 대국에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조심하자…….’
타악.
나는 착수하여 과거의 시공간으로 온 순간, 이를 악물었다.
“너희는 지금 모두 송장이 되겠구나.”
독기가 오른 풍신류 호법사자 용비천이 살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쿠구구구
크기가 십여 장이 넘는 풍탄.
내 뒤편에 있는 서산대사와 유정.
그리고…….
미호(美狐).
‘나는……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던 저 용비천의 풍탄을 막기 위해 미호는 뛰어들었다.
그리고…… 죽었다.
그 당시에 느꼈던 아픔을 되새기던 내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역사를 바꾼다 / 바꾸지 않는다 ]
그제서야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
이 또한 분명히 외신의 시련이라는 사실을.